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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7-04-02 주일예배

2017-04-02 주일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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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2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하나님은 빛이시라

본 문 :

요한일서 1:5-10

오승주 목사

. 나는 겉과 속이 같은가?

 

우리는 흔히 힘들다고 말할 때 환경이나 다른 사람 탓을 하곤 합니다. 그것이 왜 문제인가요? 영국의 양심이라 불렸던 윌리엄 윌버포스는 심각한 위기를 만났습니다. 영국의 국회의원으로 대영제국의 노예폐지를 주도했던 그에게 닥친 영적 위기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위기는 이런 것입니다. 헨리 에딩턴이 차기 수상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에딩턴이 윌버포스를 장관으로 기용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정치적 야망이라는 소용돌이였습니다. 만약 그가 이 위기 앞에서 무너졌다면 19세기 영국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윌버포스는 기대에 부풀어있었습니다. 훗날 그는 그 당시의 자신을 두고 야망의 충동질에 취해 있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윌버포스에게 이 야망은 꽤 큰 유혹이었습니다. 더 크고 더 강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본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입니다. 야망에 사로잡히면 자아가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지배하고 편법을 쓰고 싶은 충동이 들게 마련입니다. 어느 주일, 윌버포스는 이 야망의 문제를 정직하게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로 하루를 보낸 그는 그의 일기장에 안식과 예배의 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세상의 것들은 그 실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야망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그는 비로소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윌버포스의 비밀은 주일은 분주한 정계활동에서 물러나 하나님을 예배하고 가까운 영적 친구들을 만나 조용히 반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괜찮을 거야. 나는 문제없을 거야.’ 그렇게 안심하지만 실상은 죄에 대해 무감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악행을 저지르는 것만 죄라고 생각합니다. 살인이나, 강도 같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굶주리는 아이들을 외면하는 것, 영적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돌보는 것과 같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모른 척하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사법 제도와 달리 이 죄는 경중이 따로 없습니다. 죄의 영역에서 경범죄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엄청난 회개와 엄청난 사역을 마무리했음에도 자신을 가리켜 죄인중의 괴수(디모데전서1:5)’라 했습니다. 바울이 온 인류의 죄를 다 조사하고 내가 그들보다 많은 죄를 지었구나 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죄가 악한 것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죄는 전체를 분리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영혼과 마음, 생각, 육신을 분리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정직하지 못하거나, 진실하지 못한 것들이 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겉과 속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삶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소망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중요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바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아와 같이 살아갑니다. 너무 많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지만,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늘 그것이 고민입니다. 어떻게 하면 실제로 믿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저도 처음에는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도 실망했지만, 제 자신을 보면서 많이 실망했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지? 그러나 사도 요한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사귀며 살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사랑을 주고받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말씀이시기에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사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빛 가운데 사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 하나님은 빛이시라.

 

1. 하나님과 사귀려면_요한일서1:5-6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_요한일서1:5-6’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입니까? 빛 가운데 행하는 자입니까? 이 말은 지난 주간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 그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는데 모든 삶을 다 공개하고 살았느냐, 감추고 숨기고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서부터 숨기고 감추고 누르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오늘도 교회에 오면서 얼마나 거울을 많이 보셨습니까? 그러나 영혼을 들여다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숨기고 감추고 누르고 삽니다. 그래서 진정 예수님을 믿는 자유함과 기쁨을 경험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항상 두려움 속에 삽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이 이미 만천하에 공개된 사람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데 감추고 숨기고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이 보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는 솔직히 자신을 드러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영적인 상황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사함을 다고 허물이 씻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빛이신데 기쁘지 않지요? 죄를 지으려는 다른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로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지만 어둠에 행하는 것입니다. 빛으로 가지 않으면 인간은 죄가 주는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진실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한 것이 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려면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숨기고 감추어서는 절대 사귈 수가 없습니다. 그것 까지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2.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은혜_요한일서1:7-8, 누가복음18:10-14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은 빛이라고 알려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빛 가운데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쉽게 빛 가운데 사는 삶은 죄짓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산다. 어두운 가운데 산다.’는 말은 죄 짓고 안 짓고와 관련된 말이 아닙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_요한일서1:7-8’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죄 짓지 않는 삶이라면 이 말씀은 틀린 말씀이 됩니다. 죄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와 사귐을 가지려고 하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햇빛을 쬐려면 햇빛이 비치는 야외로 나와야 하듯이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려면 누구나 빛 가운데 나와야 합니다. 빛 가운데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빛 가운데 나오면 자신을 다 드러내게 됩니다. 당연히 자신의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한 사람은 회개하고 고백하고 사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빛이 비취지 않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겉모양과 상관이 없습니다. 말솜씨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_누가복음18:10-14’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누가 더 의인입니까? 세상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바리새인이 더 의인입니다. 죄는 누가 많이 지었습니까? 분명히 세리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가 바리새인 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은 자기가 지은 죄는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죄 없는 척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는 죄인이라는 것 밖에 고백할 것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빛 가운데 살고, 누가 어두움 가운데 사는 것입니까?

죄를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느냐 아니냐? 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사느냐, 빛 가운데 사느냐?’ 차이는 죄를 숨기고 사느냐, 죄를 고백하고 사느냐?’입니다.

 

3. 회개의 기쁨_요한일서1:9-10, 1:4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_요한일서1:9-10’

 

그러면 빛 가운데 행하는 자란 어떤 자입니까?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약속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 예수님의 피로 우리는 이미 모든 죄에서 구원받았기에 빛이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또 죄를 지은 것이 있다면 이제는 즉시 회개하면 다시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이고 기쁨입니다.

회개하면서도 늘 똑같은 죄를 반복하게 되는데, 여전히 회개해야 합니까? 좌절감을 느끼고, 회개하는 것도 소용없다고 여길만합니다. 그러나 세수는 왜 매일하십니까? 어차피 또 더러워질 것 아닙니까? 죄 짓는 순간순간 회개하지 않는 것은, 어차피 더러워진다고 세수 안하고, 1주일, 한 달을 사는 자와 같습니다. 영적인 삶에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그때그때 마다 자백하는 자는, 결국은 성령께서 그 죄를 짓지 않게 만들어 주십니다. 회개의 열매가 맺힐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자백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다시 그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시 그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회개한 것이라 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짓지 않게 해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회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쉽고,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고백하는 것을 곧 회개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질문하는 분이 계십니다.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아담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다 아시면서 아담아, 아담아 하고 부르신 것은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기를 원하셨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 때 아담이 하나님 아버지여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가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너무나 두렵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 잘못의 책임을 먼저 하나님께 돌리고 그 다음 자기 아내 하와에게 돌리며 자기 잘못을 전혀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하와도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변명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한마디 회개를 하지 못하는 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자아 본성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부 싸움 후에, 교인들과 다툰 후에, 길거리에서 교통사고 후에 제 잘못입니다.’ 고백하는 것이 쉬웠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_요한일서1:4’

 

회개는 기쁨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기쁨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방법입니다. 빛 가운데로 나가는 방법입니다.

 

. 진정한 안식_요한복음4:23-24, 시편143:8,11-12

 

회개는 단순히 죄를 자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위함입니다. 빛으로 나아가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 대해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죄입니다. 열심히 살아도, 멋진 결과를 만들어내도 그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큰 죄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 행색을 하는 것, 쉽사리 말하고 행동하는 것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더 크게, 더 좋게, 더 우월하게 보이려는 욕망에 사로잡혀버립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왜 피곤한지, 왜 짜증이 나는지, 왜 감사가 없는지 모르게 됩니다.

사마리아에서 만난 여인이 그랬습니다. 사마리아여인은 예수님을 보고 퉁명스럽게 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또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마리아에 사는 것도 억울한데 늘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그러려니 하고 숨겨왔던 마음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켜버립니다. 그 여인은 그 순간 엄청 창피했겠고, 숨고 싶었는지 모르나 그 여인에게 얼마만큼 축복의 시간이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이 들려서 여러분 마음이 예수님에게 들킨다면 축복입니다. 어떤 분들은 수십 년 예배를 드려도 마음의 변화가 없다고 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말씀이 안 들리고 마음의 들킴이 없다면 평생 껍데기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런 분들은 문제가 오면 원망하고, 좀 잘되면 감사하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지만,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드디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시간이 걸렸지만 드디어 말씀을 받아드렸습니다. 그가 당장 마을로 뛰어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났다고, 우리가 그토록 기다린 메시야를 만났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 수군거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대화도 하지 않았지요. 그들을 피해 우물가에도 혼자 온 여인입니다. 드디어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됩니다. 이 변화는 도덕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완전하게 부활하신 주님이 영원히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상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살아가는 가치관도 바뀌고, 삶의 목표와 방식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도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_요한복음4:23-24’

 

이것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진리이십니다. 영과 진리가 빛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영혼이 그 빛으로 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점차 진실해지고, 정직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이 무엇으로 상처받고 있는지, 어떤 쓰레기들로 쌓여 가는지 모른 채 세상의 소용돌이에 말려 살아갑니다. 그곳에서 겉치장하기 바쁘고, 비교하며 살기 바쁘고, 세상을 좇아 살기 바빠 내 영혼을 돌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하루는 영혼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그 안식일마저 우리는 일을 합니다. 빛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이 좋지 않습니다. 점차 진실해지고 정직해져야 하는데 영혼이 점차 병들어 갑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끝내려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의 병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참 자유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교회를 다닙니다. 아니 아예 사마리아 여인처럼 포기하고 운명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_시편143:8’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울과 다윗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셔서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시고 아말렉을 쳐서 멸절하실 것을 명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고, 욕심 때문에 아각 왕을 사로잡고 기름지고 좋은 짐승들을 끌고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 왕을 꾸짖게 했습니다. 사울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사울 왕은 회개하지 않고 변명하였습니다. 두 번이나 기회를 주었는데 두 번 다 변명하고 심지어는 백성의 탓으로 돌리고 또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사울 왕을 하나님은 버리셨습니다. 다윗은 사울보다 더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고 부하를 죽인 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때, 다윗은 사울과 달리 그 자리에서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공개적으로 자기의 잘못을 통회 자복하는 시를 지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죽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와 허물을 감추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이고 기쁨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_시편143:11-12’

 

여러분에게 진정한 안식이 있길 원합니다. 회개는 그 안식으로 가는 축복입니다.

 

주님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기에 오늘도 어둠에 거하지 않고 생명의 빛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길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님께 자백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내 영혼이 강건하여 세상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도록,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혼이 되도록 내 삶에 참된 안식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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