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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30 주일예배

2017-07-30 주일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2017-07-30 주일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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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30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나의 왕, 예수 그리스도

본 문 :

마가복음 1:1-11

오승주 목사

 

.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비밀_창세기1:1-2,마가복음1:9-11

 

어제 우리 교회 장지호청년의 결혼식에 축가로 축복해준 청년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가는 길에 보니 엄청난 인파가 휴가를 즐기러 부산에 가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저는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청소년수련회나 렘넌트대회를 하고 나면 여름이 훌쩍 지나가버립니다. 제 주변의 몇몇 분들은 저에게 그렇게 산다고 도움이 되냐는 식으로 말들을 많이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그럽니다. 이제 먹고 살만한데 그만 하면 안 되냐는 분들도 계십니다. 제가 이렇게 뛰는 이유는 수련회가 좋아서 뛰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어떤 때는 힘들어서 그만 할까 생각도 합니다. 그냥 렘넌트가 좋아서 뛰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단지 그뿐 만은 아닙니다. 20년 가까이 휴가 한번 못 갔지만 저는 여름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휴가를 가지 말라거나 수련회를 빼먹지 말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열심히 살아가나 길을 찾지 못하고, 답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왜 문제가 오는지, 왜 어려움이 오는지 모릅니다. ‘순간을 모면하고 가면 괜찮겠지하면서 그냥 살아갑니다. 여러분 우리를 누가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사단은 거룩한 욕심을 갖지 못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경험과 지식으로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믿음이 어디서 옵니까? 오늘 말씀에서 그 답을 주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_마가복음1:9-11’

 

마치 창세기 1장의 모습이 재현되는 모습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_창세기1:1-2’

마가복음에서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로 운행하셨다는 표현에서 운행하다는 뜻의 히브리어가 훨훨 난다는 뜻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이 혼돈과 공허 흑암위에 훨훨 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라고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의 창조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세 주체가 참여하였습니다. 이 세 주체는 예수님의 세례식에도 참여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아들은 세례를 받았고 성령은 비둘기처럼 훨훨 날아다녔습니다. 여기에서 마가는 의도적으로 태초의 창조과정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처음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였던 것처럼, 이 땅에 왕으로 오심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삼위일체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이 교리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 신이 조화롭게 일한다고 생각하는 삼신론이 아닙니다. 또한 한분의 하나님이 때에 따라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일위론도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신데,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는 삼위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셋이면서 하나이시고, 하나이면서 셋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에서 나오자마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의 말씀으로 입혀 주시고 덮어주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와 동시에 성령은 그를 능력으로 덮어주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상대방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상대방을 찬양하고 높입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찬양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 하나님은 행복하십니다.

그러나 만약에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간다면 어떨까요? 자기중심적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뿐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중심적으로만 돌아가야 한다면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무대도 마찬가지이고,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도 파탄날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없이 사랑해주셨습니다. 다른 짐승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부족한 면이 많은 사람인가요. 그래서 목회를 하든 인간관계를 하든 뭐든 상처도 많이 받고, 어려움을 겪으면 당황도 많이 합니다. 예전에는 생각되어지는 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냥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되나요? 살수야 있지요.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재앙이 끊이지 않습니다.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평안도 없고, 감사와 찬송도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공급이 끊긴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살아버리는 삶, 마음이 가는대로 살아버리는 삶, 생각하는 대로 살아버리는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때라야 제자리를 찾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을 설교하는 동안 그 비밀이 우리 모두에게 회복되길 기도합니다.

 

. 나의 왕, 예수 그리스도

 

1. 대단했던 세례요한_마가복음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_마가복음1:5’

 

세례요한은 대단한 선지자였습니다. 구약에 대단한 선지자들이 많았지만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이 땅의 모든 선지자중에 으뜸이라 하셨습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갔습니다. 유대의 핵심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보내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가? 당신이 엘리야인가? 그렇게 대단한 세례요한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마치 촛불과 같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면 작은 촛불 하나에도 사람들이 모여들게 됩니다. 그리고 희망이 됩니다. 세례요한도 그런 촛불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단지 그것 때문에 으뜸이라고 하셨을까요?

 

2. 세례요한의 삶_마가복음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_마가복음1:6’

 

세례요한이 태어난 때는 시기적으로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입니다. 세례요한이 태어난 6개월 후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촛불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세례요한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잃은 복잡한 정치 상황도, 백성들의 고달픔도, 그리고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도, 심지어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이 작아지는 것도, 이 모든 현실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그는 광야로 갔습니다. 세상이 주는 복잡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세례요한의 삶이 얼마나 단순해졌는지 모릅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집니다. 복잡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프기도 하고 경제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인간관계가 복잡하기도 합니다. 일이 잘 되냐 그렇지 않냐 등등 수많은 상황들이 우리 인생에 펼쳐져 있습니다. 만일 우리 인생의 끝이 이 땅이라면 저는 정말 슬플 것 같습니다. 목 놓아 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복잡한 것들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제 삶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광야로 갔던 세례요한처럼 말입니다.

 

3. 세례 요한의 고백_마가복음1:7-8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_마가복음1:7-8’

 

세례요한의 고백을 보십시오. 사람은 자기 입술로 어떤 고백을 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저 긍정적인 말만 해도 어려움, 위기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데 세례요한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그 시대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문헌을 참고해보면 신발 끈을 풀어주고 발을 씻어주는 종이 따로 있었는데 종 중에서도 가장 낮고 천한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나라에서 스승과 제자사이에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스승의 신발 끈을 풀어주는 것이라 합니다. 그만큼 천한 자리입니다. 세례요한은 그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면 낮아지게 됩니다. 천국을 맛보면 이 세상의 것들이 가치 없게 됩니다. 유대지도자들이 그에게 와서 수많은 질문을 할 때 에도 그는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은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적을 경험한 자들이 아닌가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이상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오래 아는 사람들일수록 더 교만해지고, 더 높아지려하는 것은 왜 일까요? 축복을 받아 축복을 베푸는 자리에 있음에도 더 욕심을 부리고 더 소유하려는 것은 왜 일까요?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가까이 하면 할수록 더 낮아져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요? 세례요한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더욱 자랑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요? 예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의 세계에 입성할 수 있음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 그 비밀로 살았던 사람들_마가복음1:1-4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_마가복음1:1-4’

 

불신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요? 그들의 삶을 보세요. 혹시 그들의 삶이 부러우세요? 세상의 소리에 싸여, 죄에 싸여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살고 있는데도 부러우세요. 지옥을 향해 가는데도 부러우세요.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도 모르고 그저 먹는 것, 그저 소유하는 것, 그저 성공하는 것이 행복인줄 알고 살잖아요. 그러니 혼란이 계속 됩니다. 집착하기도 하고, 분열하기도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나라 커피 사업의 시작이었던 분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스타벅스를 처음 가지고 들어온 사람이고, 여러분이 너무 잘 아는 대단한 체인점들을 만들었는데 엄청나게 성공했다 하여 확장을 무리하게 하다 부도를 내고 결국 쓸쓸하게 자살을 해버렸습니다.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복음을 받고 구원받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니 구원은 받을지 모르지만 능력 있는 삶은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과 함께 살고 계십니까? 함께 살고는 계시는데 예수님이 우리 신발 끈이나 묶어주는 그런 존재는 아닌가요? 어떻게 하찮은 인간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세례요한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삶은 성삼위 하나님의 세계가 개입된 삶입니다. 그러니 세상도 필요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수많은 문제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면 고칠 수 있나요? 해결될 수 있나요? 저는 예전에 가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애쓰면 애쓸수록 사람이 더 이상해졌습니다. 가정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애썼습니다. 해결이 되나요?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지치고 낙심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게 된 이후로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서는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호흡으로 창조된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치유가 무엇인가요? 병고침 입니까? 아니지요. 문제가 해결된 것인가요? 아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입니다. 사탄이 주인 된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모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전히 불신자 같나요? 내 마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보시길 바랍니다. 그 일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 예배가 우리 삶에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영혼도 마음도 삶도 치유가 일어납니다. 우리 인생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더 나아가 세례요한처럼 사람들을 치유해주기 시작합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소개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존재이십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 나는 정말 별 볼일 없는 존재야.’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기 시작하면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정말 가난하고 능력이 없는 가정에 태어났어. 그래서 소망이 없어.’ 맞습니다. 그러나 성삼위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시면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정말 하는 것 마다 안 되나?’ 당연하지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보시길 바랍니다. 달라질 것입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가 되었나요?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내 삶은 여전히 불신자 같으며, 여전히 생명이 없고, 여전히 능력이 없을까요? 세상의 유혹과 죄악에 이렇게도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여전히 내 중심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노릇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길 원합니다.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을 높이고 왕으로 모시며 살길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자랑하며 살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예배가 내 삶에 회복되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능력 있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