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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2 주일예배

2017-11-12 주일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2017-11-12 주일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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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2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좁은 길, 영광의 길

본 문 :

마가복음 6:1-12

오승주 목사

.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_마가복음6:1,마가복음3:20-22,33-35

 

지금 마가복음을 설교하면서 점차 무엇이 발견되고 있는지 기억하고 계셔야 합니다. 그걸 메모하고 옆에 있는 지체들과 포럼하면서 나누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가 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특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_마가복음6:1’

 

예수님께서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입니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헤롯왕의 유아학살을 피해 나사렛으로 가서 30년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마가도 예수님의 고향을 나사렛이라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을 떠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_마가복음3:20-22’

 

예수님께서 고향을 처음 방문했을 때 너무 모욕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일을 하셨음에도 고향 사람들은 귀신의 역사라고 폄하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말리려고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_마가복음3:33-35’

 

. 고향에서의 사역

 

1. 고향 사람들이 놀란 이유_마가복음6:2-3

 

예수님은 중요한 사역들을 하시는 도중에 고향을 다시 방문합니다. 사실 고향을 방문할 이유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이전 마을 가버나훔에서는 엄청난 인기가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가버나훔에서 30분 거리의 고향에서 그렇게 모욕을 당하시고, 더 이상 육신의 가족들을 가까이 하지 않겠다고 하셨음에도 오늘 다시 방문하십니다. 그 사이에 풍랑도 잠잠하게 하셨고, 귀신들린 자도 고치셨고, 혈루증 여인도, 죽은 소녀도 살리셨기 때문에 자신이 있으셨을까요? 다시 가면 나를 환영해주지 않을까 기대하셨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고향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_마가복음6:2-3’

 

예수님을 이전 보다 더욱 더 모욕합니다.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유대사람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도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야 결례가 아닙니다. 어머니의 이름을 앞에 쓴다는 것은 요즘 말로 말하면, 과부의 아들이라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유대사회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금기와 같은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폄하하는 표현들입니다. 그의 형제들은 우리와 지금도 함께 하지 아니하냐. 옛날에 그 아이 아니야? 저 친구 귀신들린 거 아니야? 이 표현을 다시 생각해보면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그 가정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섭게도 불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요? 신앙 안에 불신앙. 나는 목사니까 매주 성경보고 설교한다고 해서 내가 성도들보다 예수님을 더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가만 보면 여기 계신 순수한 청년들, 권사님들 보다 예수님을 더 알지 못하는 상황일 수도 있겠습니다. 정확하게 예수님을 알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으로 알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2. 배척당하신 모습을 보이신 이유_마가복음6:4-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할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_마가복음6:4-9’

 

이런 고향에 예수님께서 두 번째 방문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 방문하실 때는 제자들을 제대로 세우기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자들을 세워서 함께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오시면서 굳이 자신을 불신앙하고 모욕을 줄 것을 알고도 왜 고향에 다시 오셨을까요? 무엇인가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알려줄 것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결국 고향에서는 소수만 고치셨고 아무런 권능도 행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가라고 하시지요. 여기서 우리는 정말 중요한 메시지를 붙잡아야 합니다.

노마드(nomad)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유목민이란 뜻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질 들뢰즈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사용했습니다. 천개의 고원이라는 책에 보면 노마드에 대한 내용들이 나오는데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나가며 창조적으로 사는 인간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 노마드가 매우 멋진 사상이고 이상적이지만 현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기 싫어서 떠나지만 다시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을 구축하고 거기에서도 또 누군가는 희생하며 소외된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칼막스 같은 철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이 얼마나 이상적인가요. 그러나 김정은을 보시면 알다시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노마드의 삶은 예수님을 만나 영원에 접속된 사람들만이 가능합니다. 노마드는 순례자의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돌고 돕니다. 해 아래 새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복고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중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것들이 아닙니다. 바로 나를 떠나라고 하십니다. 나를 떠날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버릴 때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과 거리가 너무 먼 것 같습니다. 보기에도 너무 부끄러운 교회 세습 문제라든지, 권력 다툼이라든지, 목적을 위한 신앙이라든지 모든 것이 복음과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우리가 정말 천국을 사모하고 있는가? 정말 예배를 사모하고 있는가?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이 나를 모욕하는 것을 보거라. 잘 보거라. 너희들이 정말 복음을 전하는 순례자의 삶을 살 때 이럴 것이다. 나를 믿고 따르면 된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3. 파송: 좁은 길_마가복음6:10-13,시편126:5-6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_마가복음6:10-13’

 

신앙생활의 시작은 파송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확신과 감격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세상으로 가라하셨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좁은 길인지 오늘 보여주셨습니다. 얼마나 좁은 길인가요? 이 말씀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얼마나 단련하셨는지 아시지요? 마지막 단련이 무엇이었습니까? 100세에 낳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삭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가 아버지가 자기를 죽일 줄을 알면서도 순종합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그걸 알면서도 단지 아버지 피할 수 있거든 피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죽였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소망까지 다 버렸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동시대에 의로웠던 욥을 믿음의 조상 삼으신 것이 아니고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 믿음이 부족해서 실수 투성이었던 사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삼으신 것입니다. 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생도 아브라함과 같은 인생이 아닌가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실수투성인가요.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를 살리는 그리스도의 일을 맡기려 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복음메시지를 하고 영접시키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확신인가요? 고향 마을에서 마저도 모욕을 당해도 이 백성들에게 반드시 전해야 할 것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것이 진짜 씨앗이고 그것만이 영원한 열매를 맺는 다는 확신입니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확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을 보십시오. 교회가 엄청나게 부흥했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떠나게 만드는 부정, 부패, 세습, 권력욕심등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_시편126:5-6’

 

. 영광의 길_호세아14:9,호세아6:1-3,히브리서12:12-13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_호세아14:9’

 

이 길은 좁은 길이지만 영광의 길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는 그런 길입니다. 저는 요즘 마가복음을 보면서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흔드시는 이유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잘나서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흔들어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도 흔들고, 마을도 흔들고,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통해 우리 인생을 흔드십니다. 그래서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원하던 세상이 어떤 곳인지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십시다. 지금 우리 시대의 우상 아니 인류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돈일 수도 있습니다.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 아닌가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예배를 포기하고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하는가요. 교회마다 고3아이들이 예배를 안 드려도 된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3아이들은 하나님의 백성 아닌가요? 그런 친구들의 인생이 정말 대단한 인생이 되는가요? 그렇다 칩시다. 하나님께 파송 받은 멋진 인생이 될 수 있나요? 한 영혼이라도 살리는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대단히 착각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마치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고향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_호세아6:1-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일을 맡기려 하십니다. 이것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삶 말입니다. 이런 삶은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한 삶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함께 시작한 것이 나눔 바자회입니다. 청년들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물건 좀 내고 좀 더 비싸게 사줘서 수익금으로 불쌍한 사람 좀 돕자. 그런 건가요? 그런데 그날 선교헌신예배도 드리고 또 이번 주에는 특별 새벽기도도 합니다. 왜요? 엄청 중요한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이 완전하게 바뀌어야 합니다. 그저 우리의 것들이 우리의 노력으로 주어진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외된 저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을, 이 은혜를 전하기 위해 쓰여 지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도 새벽빛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오병이어,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지금도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_히브리서12:12-13’

 

그것 때문에 피곤한 손도, 연약한 무릎도 일으켜 세우라고 하십니다. 저는 다리라도 어그러지지 않게 고침을 받으라 하십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세상에 살면 이렇게 지치고 힘들다는 뜻입니다. 외롭습니다. 고달픕니다. 그런 일들이 늘 생겨납니다. 그런데 거기에 주저앉지 말고 우리를 이 세상에 파송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들, 딸들이 소외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가정이 선교지가 아닌가요. 혹시 내 마음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고향에 함께 가서 어떤 모욕을 받으시는지 왜 우리에게 보여주셨지요?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믿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