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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8-11-18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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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8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우리가 살아야 할 믿음의 삶

본 문 :

창세기 4:16-26

오승주 목사

 

. 믿음은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

믿음은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 머리가 그렇게 좋지는 못합니다. 저하고 일해본 분들(제일 가깝게 교역자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 맨날 혼납니다. 그렇게 머리는 나쁘지만 인지하고 있는 것은 있습니다. 바로 내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제 은주권사님 인스타에 보니 그것이 메타인지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반성과 자기 성찰이 없는 사람은 절대 발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일기를 씁니다. 제 핸드폰과 노트에는 늘 메모가 가득합니다. 스케줄도 매주, 매일 짜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그렇게 잘 못 살지만 노력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독서를 통해 채웁니다. 저는 제 동료목사님들이 다른 교단을 욕하는 것을 들어봤어도 배우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교단의 리더들의 설교와 책을 놓쳐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도 될까 말까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의 기본적인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때를 몇 번이나 경험하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졸업하기 전에 반 전체 친구들에게 복음은 전해보자 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편지 쓰고 또 성실하게 살며 준비했습니다. 신학교 때는 부족한 저의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성경읽기와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도생활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계산을 합니다. ‘이걸 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저는 그런 계산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성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다보면 그 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정복음화도 그랬고, 부교역자생활도 그랬습니다. 주일날 밤에는 항상 교사들과 미션홈 모임을 했습니다. 매주 학생들의 상황을 함께 파악하고, 어떻게 도와줄까 의논하였습니다. 그거 하나 했는데 많은 친구들이 신앙을 회복하고 좋은 팀도 생겼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가장 먼저 내용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릇도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우리는 나누고 베푸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선교를 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이 선교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축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진 것이 많다고 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없는 사람들이 작은 것을 모아 큰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비브릿지입니다. 매달 후원하는 만원짜리가 몇 명의 식사를 제공하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벌써 수십명의 아이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네팔에 한글학교사역을 통해 복음을 전할 것이며, 네우라니마을의 학교도 지원할 것입니다. 매달 후원하는 만원은 우리가 마시는 커피값도 되지 않지만 마음이 없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 가인의 삶인가 아벨의 삶인가

 

에녹성을 쌓은 가인과 가인의 계보_창세기4:16-24

 

가인의 족보는 창세기 4장 오늘 본문에 단 한번 등장하고 끝이 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가인의 라인, 즉 힘의 원리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오직 아벨의 라인, 즉 여인의 후손의 라인과만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곳에 가인의 자손들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죄인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게 되는지를 하나님의 교회에게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이들은 문명을 만듭니다. 가인이 놋땅에 거합니다. 놋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유리하다. 방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저주하시면서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 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놋 땅에 거주합니다. 정착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대로 해석해서 자기가 편한 쪽으로 적용을 시킨다는 뜻도 담고 있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죄인들은 아무리 성을 쌓고 정착을 한 다해도 그 삶 자체가 유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이 땅에서 많은 땅을 소유하고 많은 돈을 벌고 많은 명성을 누린다 할지라도 그 삶은 목표 없이, 근거 없이 떠도는 유랑의 삶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삶을 유랑의 삶, 공허한 삶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그런데 저주받은 죄인들의 삶이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승승장구의 모습으로 보여 진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인은 놋 땅에다가 성을 쌓습니다. 여기서 이라고 번역이 된 이르라는 단어는 성읍, 도시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도피성으로 피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려야 했던 고의적 살인자 가인은 도피성이 아닌 에녹성을 쌓습니다. NIV성경을 보면 성을 쌓았다라는 어구가 ‘building a city’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도시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키비스’‘키빌리타스라는 단어에서 파생이 된 단어입니다.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 영어 단어가 ‘civilization’입니다. 그러니까 문명이라는 단어의 어근은 도시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지금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은 이미 그 때부터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문화가 그 때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문명이나 문화는 엄밀히 말하면 그 뿌리가 같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신적 가치 추구의 결과가 만들어 낸 것을 문화라고 하고,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가치 추구가 만들어 낸 것을 문명이라고 합니다. 결국 문명과 문화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죄인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즐겁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 대용품으로 만들어 낸 인간의 죄 성을 품고 있는 것들입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담도 하나님 앞에서 숨었던 것이고 가인도 하나님 앞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저주받은 자신들의 모습을 성으로, 문명으로 감추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을 보이며 나는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죄인들의 속성인 것입니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_창세기4:18’

가인의 아들 에녹이 이랏을 낳았습니다. 이랏은 도망자란 뜻입니다. 그 이랏이 므후야엘을 낳았습니다. 므후야엘은 하나님이 치셨다. 하나님이 징계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습니다. 므드사엘은 므드스올스올의 아들, 지옥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19절부터는 그러한 지옥의 자식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려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_창세기4:19-22’

라멕이라는 자는 아주 포악하고 안하무인인 자였습니다. 이름의 뜻도 강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강한 자의 자리를 점유하는 것이지 절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한 자의 자리에 올라서지 못합니다. 그 라멕이 두 아내를 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면서 정해 놓으신 일부일처제가 깨지는 장면입니다.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 세상의 것들로 자신들을 보호하려 하고, 자신들을 즐겁게 하려 하기 때문에 다다익선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다다익선의 삶, 즉 힘을 추구하는 자들의 말로는 항상 처참하게 끝이 납니다. 라멕의 첫째 부인의 이름은 아다입니다. 아다는 ,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인의 이름은 씰라입니다. 씰라는 그늘입니다. 빛이었던 삶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얻어내어 축적한 것은 그 삶에 그늘을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라멕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의 아들 중 야발이라는 사람은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가인의 후손에게서 낙농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생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발가인이라는 아들은 구리와 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기계와 무기가 가인의 자손에게서부터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두발가인의 누이의 이름이 나아마입니다. 왜 그 누이의 이름만이 그 곳에 기록이 되어 있을까요? 나아마라는 이름의 뜻은 사랑스러움,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의 자손은 예쁘기까지 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가인의 자손들은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정말 그 힘들을 얻어서 떵떵거리면서 자신을 증명하며 이 땅을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리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_창세기4:23-24’

어떤 사람과 다툼을 벌이다 자기가 상처를 입게 되자 그를 죽여 버렸다는 것을 아내들에게 자랑합니다. 심지어 그 상대방이 소년이기도 했습니다. 이게 가인의 라인에 선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말로든 행동으로든 가차 없이 죽여 버리는 것이 오늘 날 세상의 삶의 법칙 아닙니까? 아무리 훌륭한 문명을 이루고 문화를 발전시켜가며, 춤추고 노래하고 하프를 켜고 퉁소를 불며, 기계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정복하고, 육축으로 부자가 되면 무엇 합니까? 그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데 쓰는 것이 바로 죄인들의 삶입니다. 그리고 회개가 없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는데도 하나님이 그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칠 배라고 하셨다. 나는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인 것이므로 나에게 복수하는 자는 벌이 칠 십 칠 배다라고 이 뻔뻔스러운 살인자가 노래를 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게 바로 세상인 것입니다. 성경이 굳이 이렇게 가인의 자손들의 족보를 몇 개나마 기록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들 이 삶이 정말 좋아 보이니?’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2.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 , 에노스의 계보

_창세기4:25-26

 

아벨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은혜를 입은 하늘의 왕 노릇을 할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는 하늘의 왕 노릇을 하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라는 가장 좋은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장 좋은 제물이라는 것은 자기 존재의 확장을 말합니다. 그 말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제사장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으로 하늘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선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선지는 먼저 알다는 의미잖아요. 아벨은 형이 자신을 때려죽일 때에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벨이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세상과 타협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는 형에게 형 내가 잘못했어, 형이 말하는 것처럼 이제 형이 요구하는 삶을 살게, 다시는 형을 질투 나게 하지 않을게라고 타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그냥 가인에게 맞아 죽어 버렸습니다. 그게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다른 모든 문제에 있어서는 양보하고 져주고 인내해주지만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증거함에 있어서는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삶이 바로 제사장이요 선지자의 삶인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고 간 것입니다. 그게 아벨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삶이 단순히 아벨의 삶에 국한 된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2:9에 성도들이 바로 하늘의 왕 노릇 할 사람들이고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선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옳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아벨의 삶이 우리의 삶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의 원리를 이 땅에서 삶으로 몸으로 구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선지자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죽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십자가의 삶을 가리켜 제사장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벨에서부터 우리에게 요구되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금방 이런 질문이 드시지요? 아니 예수를 믿는다는 게 그렇게 손해만 보다가 가는 삶이란 말인가요? 우리가 이 시점에서 손익 계산서를 정확하게 맞추어보고 넘어가야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아벨이 이 땅에서 세상 사람인 가인에게 맞아죽음으로써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지요? 하나님 나라 백성인 아벨이 하나님 나라에 꼭 가져가야 할 어떤 것을 잃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벨은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땅에서의 것들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첫 번째로 맞아 죽은 아벨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잃어버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가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처음으로 맞아 죽었더니 첫 번째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아벨의 삶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맞아죽는 것은 무언가를 잃는 손해를 보는 삶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상급인 영생을 얻는 수지맞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고 올바른 신앙 양심으로 살면서 이렇게 손해를 보아야 하나?’입니다. 그렇지요? 용서해주고, 사랑해주고, 인내해주는 삶을 손해 보는 삶이라고들 생각합니다. 그건 아직까지도 이 땅의 것들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다 두고 갈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은 하나님 나라에 하나도 못 가져갑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땅에 쌓아 둘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늘에 보화를 쌓으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_마태복음6:19-21’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땅 것을 많이 드려서 하늘에서도 많이 누리고 살겠다는 기복신앙인가요? 하늘나라에 가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자로 살기 위해 이 땅에서 애를 쓰는 사람이 정말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겠습니까? 만일 하늘나라에도 빈부귀천의 차이가 있다면 그 곳이 무슨 천국입니까? 그렇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늘의 보물은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성도가 이 땅에서 진정한 하늘의 보물로 다듬어져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도가 이 땅에서 보물로 다듬어져 갈 수 있지요? 자기에게 주어진 이 땅의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청지기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털어 가난하고 억압받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보석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아벨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이 땅에서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웨스트민스터수도원에 있는 크리스토퍼 채프먼의 묘비에는 이러한 유명한 그의 유언이 쓰여 있습니다.

 

내가 죽음 앞에 서 보니 내가 평생토록 다른 이들에게 준 것은 내가 모두 갖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다 그들의 삶 속에 나의 것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이들에게 모두 베풀지 못하고 여전히 나에게 남겨두고 가는 것들은 나의 죽음 앞에서 내가 모두 잃어버린 것들이 되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면서 내 소유로 남겨둔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도 쓸모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것은 다 잃어버린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워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섬기는 선지자의 삶, 제사장의 삶, 다른 말로 가인들에게 맞아죽는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수지맞는 삶이고 그 것이야 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인 것입니다.

 

3. 우리가 살아야할 믿음의 삶_삼상13:20,31:2930,8:12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조금 의아한 부분이 나오지요? 가인의 족보 끝에 갑자기 셋과 에노스라는 여인의 후손의 라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5장부터 다시 아담의 족보가 등장하는데 거기에 다시 셋과 에노스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지금 이 부분에서 셋과 에노스를 등장시킨 것은 단순한 족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여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_창세기4:25-26’

무죄한 자의 죽음으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의 라인, 하나님의 씨, 즉 부활한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셋입니다. 에노스는 사람을 뜻하는 이쉬와 같은 어근이고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인의 후손의 라인, 셋의 자손은 가인의 자손들이 강한 자로 이 땅에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고 문명을 만들며 살인자의 삶을 살고 있을 때 사람, 티끌로 이 땅을 살더라는 것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내려갔었는데_사무엘상13:20’

가인의 자손인 블레셋은 문명을 일구며 강한 자로 군림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삽이나 도끼나 괭이나 갈퀴의 날을 갈기 위해 블레셋에 가서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이게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들이 사람, 티끌인 것을 인정하고 이 땅에서 선지자의 삶, 제사장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사는 이들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노스라는 이름 뒤에 그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라는 구절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강한 자가 되어 이 땅에서 군림하는 자들은 절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도 세상을 주물럭거릴 수 있는데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까? 복 받은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불러야만 하는 환경과 상황과 사건 속으로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성도의 환난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하나님의 복인 것입니다. 성경의 이 명쾌한 대조를 보십시오.

누가 예수를 믿으면 세상 사람들 등 짝 위에 올라서서 자기를 증명하고 자신을 자랑할 수 있다고 합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심지어 원수를 위해 나의 속 옷 뿐만 아니라 겉옷까지도 벗어주는, 자기를 비우는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기를 비워 가는 삶이 바로 하늘의 보석을 보석답게 닦아내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십자가를 지고 죽어주는 삶이 손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비워주고, 용서해 주고, 참아주고, 사랑해주는 삶을 살며 이 땅에서 자신을 조금씩 죽여 갈 때, 하늘의 보물인 우리 성도가 점차 빛을 발하며 진정한 보석으로서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행복한 삶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가인처럼 라멕처럼 하나님과 내 이웃들에게 분노할 수 있습니까? 나보다 나은 사람들을 질투할 수 있습니까? 낮아지는 게 복인데 나보다 나은 사람을 왜 질투합니까? 그리고 왜 그 질투를 분노로 발산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에게 쏟아 부어질 하나님의 분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신 부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는다고,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그 사람을 분노로 때려죽일 수 없습니다. 분노와 질투는 죄로 인해 사람들에게 닥치게 된 사망의 증상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반드시 그 죽음의 증상을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약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 내적 치유 열풍이 아주 오래도록 불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의 삶 속에서 분노를 유발시키는 상처라는 것이 발견이 되면 먼저 그들은 그 상처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추적해 올라갑니다. 그 사람의 상처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어떤 인물이나 어떤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 사건이나 그 인물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 치유 집회에 가보면 전부 자기 부모나 형제나 친척이 자기에게 어떤 잘못을 했었는지 기억을 해내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가면 반드시 나의 과거에 있었던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나 인물들을 떠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잘못을 그 인물이나 사건에게 책임전가를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전가의 방법이 낳은 이단이 바로 귀신론을 주장하는 베뢰아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질병이나 사건들을 전부 귀신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들에게는 감기도 귀신이고 심지어 치질 같은 것도 귀신의 짓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그 모든 죽음의 증상들의 원인은 과거의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그 사망의 증상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은 그 에덴동산의 불순종이지 우리 인생 속에서의 어떠한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 모든 증상들은 우리의 부모나 귀신들이 준 것이 아니라 아담의 자손인 우리의 것입니다. 왜 나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를 시킵니까?

내적 치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오류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론입니다. 여러분 정말 저주가 족보를 타고 흐릅니까? 그들이 근거 구절로 삼고 있는 구절 중의 대표적인 구절이 출애굽기 십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삼사 대 까지 갚으신다고 하셨고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절을 아직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합니다. 노아의 후손에서는 셈만이 선택을 받지요? 왜 셈의 후손 중에서는 아브라함만이 선택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이스마엘과 에서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어떻게 된 거지요?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면서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저주가 정말 자손 삼사 대에까지 미칩니까?

그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_예레미야31:29-30’

하나님은 분명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아들들의 이가 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무슨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습니까?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이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기의 죄를 조상이나 귀신에게 전가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쓰인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기법일 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부모에게서 난 자식은 절대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면 여기 계신 믿지 않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저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_로마서8:1-2’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전체 성도는 모든 저주에서 다 풀려난 사람들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그러면 우리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상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늘 부모에게 학대를 당해서 심한 거절 감에 시달리며 살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늘 무시당하는 삶을 살아오는 바람에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보이면 격렬하게 분노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복음을 전해 듣고 감격 속에서 구원을 확인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자기에게 일어난 더럽고 추악한 사건들을 반추해서 그것을 상처로 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만들어 낸 세상의 열매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것인지를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더럽고 추악한 세상 속에서 그들과 방불한 삶을 살았을 터인데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은혜로 구원해 주셔서 이렇게 선한 삶이 무엇이고 악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에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신을 비워 원수를 살리는 자가 되었음에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도둑놈 집에 도둑놈이 간혹 나오는 것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 때문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에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_로마서11:25-36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_로마서11:29-36’

더 이상 상처, 분노에 사로잡혀 살지 말고 더 이상 세상의 논리로 고통당하지 말고 이제 자유 하십시오. 우리는 분노와 질투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에노스 즉 사람으로, 흙으로, 아벨로 이 땅을 사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게 당해주고 그럼에도 용서해주며 심지어 사랑까지 해 주면서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처라 부르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제사장의 삶이며 선지자의 삶이며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 있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다면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믿음의 열매는 항상 긍휼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상처와 분노 질투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처럼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긍휼이어야 합니다. 긍휼은 죄사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구원이며 천국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목적이고, 우리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제목이기도 하며, 세상을 향해 아벨처럼 사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처럼 선지자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긍휼로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 때를 바라보며 준비하며 사는 것이 곧 믿음의 삶입니다.

 

주님 가인의 자손들처럼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이 땅에서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긍휼이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결과가 무엇인지 하나님은 말씀해주십니다. 복음을 받은 우리는 아벨처럼, 에노스처럼 살아야 함을 고백합니다.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티끌임을 고백하며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이 필요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고백합니다. 그 삶이 결코 손해보는 삶이 아니요 천국에 입성했을 때 가장 빛나는 보석의 인생임을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 땅에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살아갈 때 긍휼의 열매를 맺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구원의 열매가 있는 축복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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