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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8-11-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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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5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동행

본 문 :

창세기 5:1-24

오승주 목사

 

. 만남과 동행

 

신앙생활에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둘 다 간단하지 않지만, 만남과 동행 중 어느 쪽 우리에게 부담이 될까요? 물론 만남이 없이 동행이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보면 만남이 우선이고 중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남보다는 동행이 훨씬 더 까다롭고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만남은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강권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렇게 만난 하나님과 광야 같은 인생길을 날마다 동행하는 일은 우리의 자의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혼과 마찬가지가 아닌 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혼식보다 결혼생활이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서로 잘 맞지 않는 사람이 만나서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결혼으로 생긴 복잡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결혼은 했지만 남남으로 살아가는 부부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합니다. 만남은 있었지만 동행에는 실패한 비극적인 가정의 모습입니다.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값없이 받고 천국 소망을 붙잡은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신분과 권세가 바뀌었는데 그에 맞는 복과 풍성함을 누리지 못한 채 여전히 고아처럼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있었지만 그분과 삶의 여정을 동행하는 일에는 실패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감격의 하나님, 나의 구주 하나님과 인생길을 동행해야 합니다. 동행해야 간증도 있고 축복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에녹은 하나님과 완벽하게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무려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환경이 좋아서 동행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녹시대는 노아의 심판 직전의 시대입니다. 곧 심판의 때가 다가올 경건과 거리가 먼 악한 시대였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에녹의 삶을 묵상하면서 지금 이 시대가 말세라고 할 만큼 악하지만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겠구나 하는 믿음의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고 예배를 빠지지 않고 드리지만 하나님과 동행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진정한 의미를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 믿음의 삶은 곧 동행의 삶

 

하나님이 주신 복_창세기5:1-2,요한복음6:28-29,9:1,12:2-3,누가복음3:23-38,요한복음5:26,1:4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_요한복음6:28-29’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_창세기5:1-2’

 

하나님은 하나님의 라인을 시작하는 족보에 또다시 창세기 1장의 언어들을 등장시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 바라크, 생명이 끊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다 죽음으로 던져지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 공의입니다. 진리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복인 생명이 철회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어가십니다. 그러한 신실하심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창세기1장의 축복은 모든 인간에게 하신 것이 아니고 아담과 아벨과 셋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버린 저주받을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에 의해 택해지는 셋의 후손들의 족보를 시작하면서 창세기 1장의 축복이야기를 다시 반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께서 처음 계획하신 대로 어떠한 방해 속에서도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흘러가고야 만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의 선언은 창세기 9장에도, 12장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_창세기9: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_창세기12:2-3’

 

노아의 때나 아브라함의 때나 공히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부른 아브라함조차도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았을 정도이니까 그 세상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악한 세상은 하나님의 복과 전혀 상관이 없어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당신이 선택한 어떤 사람들에게 복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복 이야기는 다 죽어야 할 죄악된 세상 속에서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것처럼 선택 받은 어떤 무리를 향한 복의 회복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복의 출발은 항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보면 그 복은 항상 아버지로부터 장자에게 이어집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축복권을 장자가 물려받아 또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물려받고 살아갑니다. 구약의 장자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 선택을 받은 자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어디로 연결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3장의 족보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복의 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복 곧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_요한복음5:26’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_요한복음1:4’

 

창세기 1장의 복은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복을 장자를 통해 전달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영생의 전달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족보의 끝이 예수 그리스도이면 족보를 따라 올라가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족보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깨닫도록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이 뭐가 대단하다고 이렇게 자세히 기록해 놓았나 생각할지 모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그냥 관념적으로 던지시지 않고 성경을 통해 이렇게 선명하게 족보로 확인시켜주시는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족보를 통해 우리가 정확하게 이 족보 속에 있는지,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족보가 그냥 관념적인 언약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궁극적인 언약이 무엇입니까? 천지창조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닮은, 다른 말로 아버지의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는 자식들을 창조해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부자지간으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입니다. 그것이 언약이 담고 있는 궁극적인 내용입니다.

 

2. 동행의 조건_고린도후서6:16-18,욥기38:1-6,42:1-6,아모스3:3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_고린도후서6:16-18’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무엇인가를 해야 하나요? 아버지를 닮는 것입니다. 성경이 굳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것을 이렇게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밝히는 이유입니다. 아버지의 성품과 공유적 속성들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드러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닮아가며 살아내는 삶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닮아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하잖아요? 하나님과 동행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동행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힘써 하나님을 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닮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책을 보통 욥기라고 합니다. 그렇게 먼저 쓰여진 욥기에 무엇이 기록되었나요? 권선징악의 문제로 착하게 살면 상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잘잘못에 관해 상과 벌을 주는 그런 종교에 대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께 온전히 항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분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라는 메시지가 욥기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대에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선하게 살았던 욥에게 환난을 주십니다. 욥은 친구들과 대화에서 누가 나에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지적해 보아라이렇게 말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욥에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친 것입니다. 욥이 내가 도대체 뭘 얼마라 그렇게 잘못했는가? 라고 항변을 하자 하나님께서 38장부터 무려 3장에 걸쳐 당신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신 분인지를 욥에게 직접 설명해주십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을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_욥기38:1-7’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에 관해 욥에게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시자 욥이 결국 항복을 합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_욥기42:1-6’

 

이게 욥기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욥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는 단순히 권선징악의 문제로 상을 받고 벌을 받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그 아버지에게 항복하며 자발적인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착하게 살자를 모토로 성자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며 그 하나님이 우리의 진짜 아버지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의뢰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3. 왕의 길을 함께 걷는 동행_창세기5:24,히브리서11:5-6,유다서1:14-16,미가6:8,잠언3:3-4,호세아2:6-7,레위기11:45

 

우리는 가인의 살인, 라멕의 살인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그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이러한 죄를 범할 때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 아들대신 내가 대신 죽겠다고 나서실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 일어난 십자가 사건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마다 우리아버지는 우리의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계십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의미를 확인하고 나니까 하염없이 눈물이 나고 그렇게 우리 아버지가 누구이시며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깊이 알게 되면 될수록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고 내가 원하고 나에게 기쁨이 되는 일이 아닌 아버지가 기뻐하실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아버지를 닮는 삶을 살게 되고 그러한 삶을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_창세기5:24’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_히브리서11:5-6’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요? 왜 예수님입니까? 하나님은 초월자이십니다. 초월이라는 것은 제한된 이성과 시각으로는 절대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제한된 이성과 시각 안으로 들어오셔야 사람들이 비로소 인식이 될 수 있고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즉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과 속성과 위대하심을 설명해주고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된 성경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과 동행한 대표적인 인물인 에녹을 살펴봅니다. 에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는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_유다서1:14-15’

 

에녹은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선포하며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이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확신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가 그 시대에 벌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알 수 있었을 까요? 성경은 믿음으로 그가 그러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합니다. 어떤 계시로 하나님과 동행을 시작했을까요? 태어나면서 부터인가요? 에녹은 365세까지 살았는데,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 비로소 경건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므두셀라는 보낸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창을 던지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하나님이 므두셀라를 세상에 보내실 때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에 대한 경고를 에녹에게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므두셀라가 969세에 죽은 해가 바로 노아가 600세 되던 해입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에녹은 아들의 이름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경고에 경각심을 가지고 나 따로, 하나님 따로의 신앙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즉 거룩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심판이 므두셀라에게 임한다고 생각하니 절박한 심정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애쓰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전 65년은 다른 사람들처럼 제 멋대로 살았겠지요. 어쩌면 더 추하게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의미 없는 삶을 65년으로 끝을 냅니다. 그 결단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형편과 환경과 사건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면 간증도 없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저 신앙생활했다는 흔적으로 다 떨어진 성경과 찬송가가 남을 수는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삶을 축복하신 흔적은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_미가6:8’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사람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선을 위해 정의 곧 공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_잠언3:3-4’

 

그것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연약해서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이 원하는 길로 안내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길이 때때로 그렇게 막히는 것이고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 길은 우리의 동행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알아채고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_호세아2:6’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_레위기11:45’

 

동행은 하나님 곧 왕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내 길을 하나님이 함께 걸어 주세요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신앙생활에 대한 내용들을 알고 있어야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 동행을 위해_요일1:7,갈라디아서6:6-10

 

동행을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성경을 통해 알려고 할 때 성령께서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상호간의 뜻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마치 인간의 뜻도 헤아려주십시오 처럼 들리는 데 이것은 기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께 알려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에 꼭 필요한 두 가지입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_요한일서1:7’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말씀과 기도를 위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수도원이나 기도원에 올라가 자기들끼리 집단생활을 시도하는데 그것은 참 옳지 않습니다. 에녹이 살았던 시대는 노아의 홍수전이니 얼마나 타락한 시대인가요? 거기에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그 말은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서 동행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_갈라디아서6:6-10’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혼자 고아처럼 살다가 문제가 일어나면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외치는 기형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항상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과 동행을 사모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입니다. 그 삶은 꾸준히 한 발 한발 앞으로 전진 하는 것이지 건너뛰거나 지름길로 혼자 갈 수 있는 것 아닙니다.

플라스틱 신드롬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인스턴트 세상은 모든 것을 단기, 속성 완성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마저도 단기 속성으로 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도 40일 특별기도, 4주 특별 훈련 등의 단기 속성 기도를 하고 싶어 합니다. 한발 한발 걸어가는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이 어려워 무슨 신령한 은사를 받아 단기 속성으로 위대한 신앙인의 반열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한발 한발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인생 속에서 앞으로, 앞으로 꾸준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한발 한발 꾸준하게 열심히 동행하다보면 어느새 그 분과 함께 하늘에서 동행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자각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 땅에서 엄연히 살아 있던 에녹이 이 땅에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에녹이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한발 한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다 보니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에녹아 오늘은 우리 더 좋은 곳으로 가보자, 오늘은 준비 단단히 하고 오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평상시와 똑같이 동행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로 걸어 올라간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만 바라보세요. 다른 것 바라보다가 자꾸 그 분과의 동행을 놓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애인과 동행하면서 자꾸 다른 여자를 바라보면 그 사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 관계는 곧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와 동행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입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자식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을 하셔야 합니다.

 

주님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죄악가운데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 만남에서 그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을 살길 원합니다. 세상이 힘들고 어렵지만, 에녹처럼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통해 믿음의 결단을 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을 통해 한발 한발 꾸준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길 원합니다. 다른 것을 바라보다가 주님과의 동행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내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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