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예배

2019-08-25 주일예배

2019-08-25 주일예배.hwp
0.05MB

20190825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본 문 :

창세기 32:22-32

오승주 목사

 

. 주변인으로 살고 있는 야곱, 우리

 

제가 미국에 가면 미국 이민사회에 가서 주로 사역을 하는데 한국에서 이민가신 분들의 자녀들, 청소년들이나 대학생들을 만나서 사역을 합니다. 그 중에 어떤 친구가 저에게 'marginal man'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자기들은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슨 단어인지 찾아보니 경계인, 주변인라는 단어입니다. 이런 단어를 그 당시에 알게 되었는데 그런 단어의 입장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친구들은 집에 오면 한국문화입니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끓어먹는 한국 부모님, 미국 사회에 동화되지 못한, 한국에서 이민만 오셨지 영어한마디로 못한 부모님 밑에서 살아야 되고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 가면 미국의 생활에 동화되기 위해서 미국친구들처럼 행동하고. 그 사이에 경계선에서 머물러 있는 모습. 이것들이 상처가 되었나봅니다.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조선족도 그렇습니다. 뿌리는 한민족인데 중국에 있으면서 중국 사람도 아닌 것이 경계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탈북자를 한 분 만났는데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북한에서 넘어와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한국사회에 적응을 못하겠고 티를 내면 경계를 하니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못하겠다고 신앙 상담을 하였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고 경계인, 주변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분들을 보면서 야곱이 경계인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야곱의 모습이 영적인 경계인, 영적인 주변인으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복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뒤에서는 세상의 가치관을 쫒는 영적인 경계인으로 살고 있지 않는가. 주일날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만 보이지 않는 삶에서는 우상을 섬기는.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돌아가서는 점집에 가서 점을 치는 것이죠. 그런 영적인 주변인으로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지는 않는가. 제 모습을 보니 저도 한때 그런 적이 많았습니다.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살면서도 목회를 하면서도 이것이 가스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데 허울 좋은 말들, 복음을 위한 교회, 구원을 위한 교회를 만들어야해. 교회의 목회철학에 붙여놓고 뒤에 가서는 교회가 빨리 성장했으면 좋겠어. 사례비도 많이 받고 내가 안정적으로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핏 값으로 이 가스펠교회를 세웠던 본인의 뜻, 본인이 원하시는 뜻에 순종하기는 싫은 것입니다. 마치 목회자로써의 영적인 주변인으로서는 살고 있지 않는지. 야곱은 영적인 주변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것 같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사는 것 같지만 세상에는 세속적인 방법으로 이익을 위해서. 지난 주 설교가 이 내용이었습니다. 에서가 걸림돌이 되었는데 에서에게서 목숨의 위협을 탈피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뇌물을 먹여서 위기를 탈피하려고 인간적인 방법을 세워놓고 그래도 불안하니까 하나님께 기도까지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할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이 나를 여기에 보내지 않았습니까. 내 목숨 당신이 책임져주세요. 이제는 기도까지 했습니다. 영적인 보험까지 들었습니다. 인간적인 보험, 영적인 보험 사이에서 주변인, 경계인. 이중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 할 때 광야에서 어른의 세대들이 죽었습니다. 갈렙,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민족을 이루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기에 정복 전쟁을 하였습니다. 열 두 지파가 가나안땅을 분배해서 정착해서 살았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건축에 있어서 노동자로 살다가 광야에서는 유목민으로 살았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착해서 살면 제일먼저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농사를 짓는데 처음부터 성공할 수 있나요? 없습니다. 저의 넷째 매형께서 토마토 농사를 지으시는데 처음에는 맛이 없었는데 그 뒤로 노력을 하시고 토마토 잘하는데도 가보고 하더니 토마토가 맛있습니다. 농사도 첫 해부터 잘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정착해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원래 농사짓던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쌀농사, 밭농사는 어떻게 짓는지 물어보는데 가나안 사람들이 우리가 섬기는 풍요의 신, 바알 신이 이렇게 축복해주셨다. 내가 섬기는 드라빔이 우리를 풍요로 인도했다.’ 라고 했습니다. 평생 하나님만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으로 농사가 풍요롭게 되니까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 신을 섬겼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를 단 한 번도 안 드린 적이 없습니다. 앞에서는 예배드리고 제사 드리고 돌아서서 그 풍요로운 것을 얻으려고 바알 신을, 드라빔을 섬겼습니다. 철저한 이중생활을, 영적인 주변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릅니까? 우리처럼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영적인 주변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알지만 그리스도가 내게 주인으로, 주님으로 인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있지만 이 성경이 내게 와서 깨닫고 내 말씀으로 인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 몸에 맞게 내게 와서 먹고 소화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좋은 학문, 좋은 기술이라도 지식적으로 알고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내 것으로 습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주가 되지 않았습니까? 주가 되면 핍박을 받을 것 같고 내가 행한 타락의 삶을 살지 못할 것 같고. 예전에 제가 전도한 분이 교회를 진짜 가고 싶은데 교회가면 담배 끊어야 한다고 합니다. 평생 피어도 폐암만 걸리지 구원과 상관없습니다. 다들 그런 식입니다.

 

. 영적 주변인

 

1. 이중적인 모습의 신앙생활_창세기32:13-20,누가복음2:11,사도행전2:36,로마서10:9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_누가복음 2:11’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_사도행전2:36’

 

신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와 주 항상 두 단어를 같이 사용하였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_로마서10:9’

 

그리스도를 압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압니다. 그분을 주로 받아드릴 때 영적인 주변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이중적인 모습의 신앙생활을 하고 영적인 주변인으로 살다보면 내면에 무서운 고통이 찾아옵니다.

 

2. 야곱의 내면에 찾아온 무서운 고통_창세기32:22,32:24

 

오늘 야곱의 내면에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_창세기32:22’

 

밤에 일어나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일어난 이 단어에는 야곱이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기도도 하고 뇌물도 준비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것입니다 영적인 인생의 키를 내가 쥐고 있으니. 그러다 나중에는 처, 자식까지 보내고 혼자 강가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일어났습니다. 불안한 것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_창세기32:24’

 

야곱이 11명의 아들까지 보내고 홀로 남았더니. 홀로 남았다는 것은 고독을 상징합니다. 20년간 라헬과 레아를 위해서, 자기 처자식과 재산을 위해서 일을 했습니다. 그것을 다 보내고 혼자 남았습니다. 영적인 주변인으로 살면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점도 치고 이중생활도 하고 이것이 나중에 죽음 앞에서는 쓸모가 없게 됩니다. 얍복 나루에 혼자 남았습니다. 고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도 하고 뇌물도 주었는데 허무와 고독, 불안. 이것이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닌가요? 내가 20년 동안 모든 머리를 동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는데 왜 얍복 강가로 불안과 고독으로 나를 인도하시는가. 난 분명히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리스도를 알고 있고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교회에 갔는데 왜 고독이 찾아오고 불안이 찾아오는가. 하나님은 영적인 주변인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가 되지 않아서 고독이 찾아오고 불안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까. 왜 불안하고 고독하죠? 하나님이 내 주님이 되지 않아서.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 되면 하나님의 집도 사모하게 되고 위로도 받게 되고 찬송하고 기쁨이 있을 것인데 이것이 없고 내 인생의 키를 내가 쥐고 살기 때문에 교회는 다니지만 세상 적으로 사니까 영적인 주변인으로 살면서 오는, 내면에 찾아오는 무서운 고통. 역사적으로 가장 훌륭한 작가를 뽑자면 헤밍웨이라고 생각하는데 책을 읽으면 잔잔하고 뒤에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 세계적인 문학자가 기독교인이지만 자살을 했습니다. 얼마나 고독했는지 유언을 남겼는데 필라멘트가 끊겨진 전류가 흐르지 않는 전구와 같다. 내 인생은.’ 고독, 불안은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차라리 돈이 없거나 몸에 질병이 있으면 그런 어려움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고독이 찾아오면 못 견딥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 새 가족이 오시면 꼭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고독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저는 몇 번 겪어 보았습니다. 내가 의도치 않는 모함을 당하면 엄청 고독이 찾아옵니다. 그럴 때에는 하나님도 안 계신 것 같은 고독이 옵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새 가족 분들에게 그럴 때 저를 찾으시라고 권사님, 장로님께 찾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야곱은 이 고독, 이 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최선을 당해서 방법을 동원 했고 하나님께 기도도 했는데 왜 고독이 옵니까.

 

3. 주변인 야곱과 씨름하려고 찾아온 하나님_창세기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_창세기32:24’

 

이 본문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씨름하려고. 많은 목사님들은 이 본문을 잘못 설명합니다. 우리가 야곱처럼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씨름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물고 늘어져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설교합니다. 완전 잘못된 설교입니다. 이 본문은 야곱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홀로 있는 야곱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고독하고 불안할 때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집회 가서 간증을 들으면 슬플 때가 있습니다. 마치 신앙이 좋은 것처럼 내가 집중하고 훈련받고 기도했더니 내가 사역했더니 하나님이 이런 복을 주셨어요. 우리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고 경제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간증하는데 감사한데 슬픕니다. 진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간증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고자 했는데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자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저는 이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간증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의 고수입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했지만 내 삶이 여전히 가난하고 자녀의 문제가 있지만 이 삶을 고수 하겠습니다. 이 믿음의 삶을 걸어가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 주변인에서 벗어나도록 씨름하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시기를 늘 간절히 기도합니다. 목사가 교회를 목회하고 설교하는데 열심히 하지만 제 성격이나 실력이나 부족함이 메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제가 기도합니다. 제게 임해주시고 설교가운데 하나님이 임하여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불안과 고독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이 찾아와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 이름을 물어보시는 하나님_창세기32:25-32

 

이렇게 하나님이 넉 다운된 야곱에게 찾아와 3가지 조치를 하십니다. 첫째는 허벅지 관절을 치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씨름을 거셨습니다. 야곱은 지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누구에게도 지지하고 누구에게도 지려고 하지 않고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 한 번도 진적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에서에게 지지 않으려고 라반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씨름을 걸었을 때에도 악착같이 지지 않으려고 씨름했습니다. 하나님은 버팀목의 상징인 허벅지 관절을 내리치셨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의지하는 그 무엇입니다. 인생의 키를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내리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를 선택했는데 너에게 은혜를 주었는데 네가 의지할 분이 나 여호와 하나님이다. 나만 바라봤으면 좋겠어. 내가 너의 주가 되었으면 좋겠어.’ 이 메시지입니다. 야곱이 의지하는 그 무엇을 치셨습니다. 주저앉은 야곱에게 두 번째 조치를 하십니다. ‘하나님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어보십니다. 그냥 이름을 물어보신 걸까요? 제가 이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힘을 때 산에 기도하러 갔는데 제 기도스타일은 하나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저는 한번 기도를 시작하면 1-2시간 합니다. 하나님이 제 마음에 승주야, 너 누구니? 뭐하는 사람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 때 무릎을 쳤습니다. 엄청 힘들 때 하나님께 쏘아붙이고 눈물도 흘리고 했는데 하나님이 저의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너 누구니?’ 하나님이 저의 이름을 몰라서 물어보신 건가요? 제 정체성. 제 삶을 확인 하신 것입니다. ‘나 하나님께 구원받아서 복음 전하겠고 하나님께 서원한 주의 종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린 주의 종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천국을 흠모하고 사모하는 천성을 향해서 가는 순례자지. 왜 이 땅의 것 때문에 사람 때문에 힘들어할까?’ 야곱에게 이름을 물어 보셨습니다. 야곱의 삶, 본질을 고발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저 야곱입니다.’ 본문 정황상 힘이 빠져서 두려운 마음으로 야곱입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야곱이라는 단어의 뜻은 사기꾼, 속이는 자라는 뜻도 있지만 약탈자, 빼앗는 자, 쟁취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자기 모습을 야곱이 자각하는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것을 자각하도록 물어보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 조치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라. 이스라엘의 뜻은 다스리다. 싸우신다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민족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인생의 키를 네가 들고 싸우지 말고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가서 믿음으로 살도록 주신 이름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입니다. 얍복 강가는 야곱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주인이 나였던 야곱이 하나님을 주인을 고백하는 그런 신비로운 영적인 체험이 있는 장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지탱하고 있는 그 무엇이 다 하나님과 씨름하므로 끊어지고 삶의 본질을 꿰뚫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사는 것인지.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들을 보고 로마가 왜 핍박을 했죠? 힘도 없고 배경도 없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주가 누구십니까. 나의 주 하나님 되는 오늘 야곱이 그 경험을 한 날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_창세기32:21’

 

허벅다리는 절었지만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해가 돋았다는 의미는 드디어 주변인으로 살 때에는 어둠의 삶이었고 영적 경계인으로 살 때에는 암흑의 삶이었는데 고독과 불안이 있는 삶이었는데 내 인생에 해가 돋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_시편 118:5’

 

그 넓은 곳이 주의 장막 안에 구원의 기쁨과 감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해가 비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을 주인 삼으면 영적으로 넒은 곳에 살게 됩니다. 이것이 안식이고 평안입니다. 경계인으로 불안하게 점치고 불안한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하나님을 나의 주 하나님으로 모시는 얍복 강가의 신비로운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그런 한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시는 야곱으로 부를 것이 아니라 당신은 이스라엘입니다. 이고백이 삶에 있기를. 그래서 이중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경계인의 삶에서 벗어나 천국에 소속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로 살 수 있는, 이 땅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들을 물러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일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09-01 주일예배  (0) 2019.09.02
2019-08-25 주일예배(전체영상)  (0) 2019.08.25
2019-08-18 주일예배(전체영상)  (0) 2019.08.18
2019-08-18 주일예배  (0) 2019.08.18
2019-08-11 주일예배(전체영상)  (0) 2019.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