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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9-09-01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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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1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엘엘로헤 이스라엘

본 문 :

창세기 33:1-20

오승주 목사

 

. 경외하는 마음을 주어_예레미야32:39-40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_예레미야32:39-40’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실 틈이 없었습니다. 복을 주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경외하는 마음이 신앙생활에 진 것입니다. 구원에 진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을 안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강타한 값싼 구원론, 요즘은 세속적인 복음주의라고 하는데 복음이면 다 된다고 하는 세속적인 복음주의 같은 것들이 한국에 많이 있습니다. 진짜 구원을 받았다면 정말 하나님의 복음을 받고 변화되었다면 그 증거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의 증거라는 것이 예레미야에 나와 있습니다. 가벼운 신앙생활, 가벼운 설교를 경계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요즘 MBC 에서 하는 PD 수첩에서 김기동 목사에 대해서 나왔습니다. 전통교단은 아니고 사이비이단인데 베레아라고 하는 귀신론을 가지고 교회가 성장을 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말씀운동을 할 때 학교 앞에 성락교회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장소를 빌려달라고 갔더니 그 곳이 김기동목사님이 하시는 교회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원한이 있는 영혼이 떠돌다가 사람에게 붙었는데 그것이 질병인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질병은 죽은 영혼이 붙은 것이 귀신론입니다. 병이 귀신이니 병 고치는 사역을 합니다. 제가 전도사일 때 그 분의 영향을 우리 교단이 받았다고 해서 설교를 들어봤는데 다 은혜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단이고 사이비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크냐면 강북에 있는데 주일 평균 예배가 수만 명이니까 교회가 엄청 큰데 PD 수첩에 횡령, 성추문으로 나왔습니다. 제가 보면서 남 이야기가 같지 않았습니다. 저는 40대 중반에 접어든 목사지만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했을 때 충분히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20대에 뜨거웠을 때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인생을 드리겠다고 기도 할 때가 있었는데 목사가 되고 현재에 접어들어서 그런 뜨거운 기도를 하지 않는. 옛날에는 제가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믿었기 때문에 1시간씩 2시간씩 3시간씩 기도했는데 요즘은 기도하다가도 누구 만나러 가야할 것 같고 일 처리해야할 거 같고.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50-60대가 되어서도 교회바닥에 엎드려 기도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 가야할 영광을 가로챘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영화가 인간에게 왔습니다. 이것이 죄인데 죄와 탐욕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은혜가 사라집니다. 은혜가 하찮고 가볍게 여기고 은혜의 삶이 멀어지므로 감정이 메말라지고 죄의 노예가 됩니다. 성공을 한 목회자들도 은혜를 잃어 버리면 저럴 수 있구나. 저렇게 횡령을 하고 교회 돈을 자기 돈처럼 쓰고 타락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죄가 그렇게 무섭습니다. 죄는 다 성공한 뒤에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죄가 마음에 들어오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를 만큼 죄에 대해서 우리는 무방비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몇 십 년 했는데. 내가 목회를 얼마나 잘했는데. 기도를 많이 하고 헌신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죄에 속절없이 왜 당하나요? 은혜가 없으니까.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은혜밖에 없습니다. 은혜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에 다 있습니다. 돈도 있고 뛰어난 사람들도 많고 전략가들도 많고 어떤 교회들은 전략부서를 두어서 교회를 운영하기도 하고 인재들이 교회에 대해서 의논도 하고 좋은 시스템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죄가 관영하게 되었을까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다투고 정죄하고. 은혜가 없으니까. 서 김기동 목사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몇 만 명 되는 교회의 목사님이신데 은퇴하시고 주일학교 교사를 자원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교단에서도 어떤 목사님 은퇴하시고 그 다음 주에 바로 성가대를 쓰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매일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학교 때에는 뜨겁게 기도했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왜 그렇게 기도를 못하는 건가요? 그건 신앙이 성숙한 것도 맞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생활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죄가 스며들게 됩니다.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굉장히 많이 싸워야 하고 확인하고 지켜야 합니다.

 

. 여전한 야곱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_창세기33:1-11

 

야곱이 지난주에 엄청난 체험을 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오늘 1절에 보니 눈을 들었습니다.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주일날 포럼하고 은혜가 충만한데 그 다음날에 회사에 과장님을 보면 그래도 인 것입니다. 지금 그런 식입니다. 은혜 받고 갔는데 집에 갔더니 그대로입니다. 환경도 상황도 그대로입니다. 제가 수련회를 갔는데 34일을 기도했습니다. 아버지를 변화시켜주시고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에 임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는데 집에 가니 그대로였습니다. 야곱이 이런 상황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곱이 눈을 들어봤는데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데리고 왔습니다. 야곱이 어젯밤에 하나님을 만난 것이 까먹고 다시 자기 방식을 고수합니다. 그 전에는 다 보내고 뒤로 갔습니다. 이제는 자기 아내와 아이들 앞에 갑니다. 그리고 야곱이 에서를 보고 일곱 번 땅에 엎드렸습니다. 일곱 번 땅에 엎드린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당시 가나안 땅의 문화입니다. 부족들끼리 싸워서 질 것 같으면 항복의 의미로 일곱 번 땅에 엎드립니다. 야곱이 얼마나 똑똑한지 가나안 땅에 살아보지 않았던 야곱이 항복의 방법으로 일곱 번 땅에 엎드렸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사람 관계가 어렵습니다. 미국에 목회하시는 새들백교회 담임이신 릭 워렌 목사님께서 인간이 빠져나오기 어려운 올무가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돈, 동업,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가장 어려운 올무가 동업이라고 합니다. 시작은 쉬어도 정리하기가 어려운 것이 동업입니다. 그리고 헤어지기가 어려운 것도 있지만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부부도 같이 살지만 그래도 맨 날 싸웁니다. 에서와 야곱의 관계가 쉽지 않고 녹녹치 않습니다. 야곱은 밤새 기도했지만 일곱 번 절하고 할 도리를 했는데 놀랍게도 에서가 와서 어긋맞추어 안았습니다. 입 맞추기 위해서. 이것은 화해의 의미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에서의 입장에서 인간적인 모습만 생각해 보면 20년 만에 야곱을 만나면 죽이려고 했는데 엎드리면서 걸어오는 야곱을 보니 절뚝거리면서 오는 것입니다. 장애인이 되었네. 절뚝거리면서 밤에는 얍복 강가에서 밤새 하나님과 씨름했기에 행색은 거지같고 남루하게 입고 엎드리며 오는데 에서의 마음이 인간적인 연민이 생기지 않았을까. 사실은 에서가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사실 에서는 자기가 왜 마음이 동생을 보면서 눈물이 나오는지. 에서가 먼저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에서가 이 사람들이 누구냐. 이 많은 재산은 무엇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2. 우리가 떠나자_창세기32:12-17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_창세기33:12’

 

야곱이 에서의 마음이 변했을까봐 이 모든 것을 다 받으시옵소서. 라고 하고 에서도 필요 없다고 하며 마지못해서 받는 장면입니다. 그러면서 에서가 일어나 떠나자. 같이 동행하자고 합니다. 에서가 사는 곳까지 같이 가자. 이런 선한 의미일수도 있지만 본문의 해석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때 야곱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에서와 동행하게 됩니다. 에서의 고향에서 살아야 합니다. 에서의 고향은 세일 입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갑자기 야곱에게 큰 근심거리인 에서가 밤에 잠을 못 잘 만큼 큰 근심거리가 해결되었습니다. 이 때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이 때 영적으로 예민해야 합니다. 에서가 같이 동행하자고 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보니 재산도 많으니까. 그런데 야곱은 에서와 같이 가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에서가 같이 가면 야곱의 인생은 연약이 끝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행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을 구분하셨습니다. 로마서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람과 에서는 같이 가면 안 되겠죠. 가는 길이 다릅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 야곱은 거절을 합니다. 이것이 신앙에 필요한 것입니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불신자들과 좋은 관계가 되었다고 함께 가자고 할 때 분별력이 있어야 하고 거절할 수 있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 야곱이 지난밤에 하나님을 체험하고 분별력이 생겼습니다. 처자식이 걷지 못하고 새끼 딸린 양과 소가 있으니 나중에 세일에 가서 인사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 세일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그 곳에서 숙곳 이라는 곳에 갑니다.

 

3. 엘엘로헤 이스라엘_창세기33:18-20,창세기35:1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_창세기33:17’

 

우릿간과 집을 짓는다는 말은 살겠다는 말입니다. 유목민들이 집을 지었습니다.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바로 옆에 가나안에 유흥도시였던 세속도시였던 세겜 성읍 바로 앞이 숙곳입니다. 나중에는 숙곳에서 세겜에 이사를 가서 정착을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자기의 재산을 위해서. 그리고서 하나님께서 밧닷아람에서부터 가나안에 나를 평안히 인도했으니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자. 그리고 엘엘로헤 이스라엘 이라고 합니다. 엘은 하나님. 엘로헤은 나의 하나님 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이름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맞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 굉장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입니다. 세겜에서 오래 살려고 은 백 크시타를 주고 땅을 샀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벧엘에서 야곱이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면 인도하시면 축복하시고 나에게 재산을 주고 다시 벧엘에 돌아와 성전을 짓고 십의 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벧엘에 갈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깨달았지만 세상 앞에 장막을 치고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야곱이 이런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니다. 세상을 향해 장막을 치고 세상을 향해서 제단을 쌓고 나의 하나님. 나를 위해서 나의 재산을 위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야곱과 약속한 것은 벧엘입니다. 나중에 창세기 35장에 가면 야곱이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징계를 받고 엘벧엘이라고 고백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벧엘의 하나님. 진짜 고백이 나옵니다. 징계를 통해서.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정확한 것입니다. 신앙은 정확해야 합니다. 벧엘 근처에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벧엘 옆에, 앞에, 뒤에 사는 것을 원치 않으세요. 그런데 우리는 이정도면 됐지. 이 정도 하나님께 헌신하면 됐지. 내 기준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정확합니다. 이 정도면 됐지. 내 계산으로. 에서 문제도 해결됐고 요단 강도 건너왔고 세겜이 좋네. 하고 세겜 성읍에서 엘엘로헤 하나님 라고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교만으로 제단을 쌓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벧엘의 신앙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할 목표가 있고 그리스도인으로 도달해야할 지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거룩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 적당히 해. 그러면 교회에 사람이 안 모여.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야. 그래서 천국 근처에만 가는 것입니다. 천국에 입성하지 못하고. 근처에는 다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야곱을 하나님이 가만히 두실까요? 34절에 큰 사건을 겪습니다. 엄청난 징계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원하시는 것은 벧엘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에게 벧엘은 무엇입니까. 진지하게 진심으로 질문해보세요. 은혜의 삶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인으로 고백하는 약속의 삶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근처에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신앙을 왜 정확하게 하지 않습니까. 다른 것은 다 정확하게 하면서 신앙만 대충합니다. 영적인 것만 대충합니다. 다른 것은 똑바로 자녀들에게 교육하면서 성경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괜찮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주는 생각인지 모르고. 사단의 역사인지 모르고. 그럼에도 야곱과 에서의 차이는 큽니다. 야곱이 세겜에서 집도 짓고 정착해서 사는데 하나님이 야곱에게 징계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쩌면 에서와 야곱은 똑같은 사람인데 에서는 징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실 에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 야곱과 에서의 차이_로마서9:13,12:1-2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_로마서9:13’

 

미움이라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무관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저주고 재앙입니다. 빌딩이 만 채여도 죽어도 지옥가면 무슨 소용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도 받고 책망도 받는 것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하나님 자녀가 아닙니다. 에서와 야곱의 차이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야곱이 마음대로 살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징계하셨습니다. 내가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했는데 왜 그러십니까. 내가 원하는 약속의 장소에 있지 않잖아 라고 또 징계하셨습니다. 만약 야곱이 에서를 따라갔으면 난리 났을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안 따라갔지만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자화상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말씀을 클리어하게 서론, 본론, 결론으로 들을 말씀이 아니라 야곱과 함께 여정을 걸으면 점검해야 합니다. 다행히 야곱이 징계를 받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에서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야곱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징계를 받으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고 책망할 때 회개하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참된 신자의 증거입니다.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인이 하나님으로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이 장계를 내리셨을 때 책망했을 때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빛으로 나아갔습니다. 회심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회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회심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안 하나요?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하기 때문에. 이런 마음의 상태가 왜 그대로 가냐면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다. 은혜를 어떻게 받나요? 기도를 통해서 받습니다. 지식적으로 말씀을 들었지만 마음을 바꾸는 과정은 은혜가 마음에 들어오게 하는 과정은 기도를 통해서. 기도가 없으면 완악한 마음, 완고한 마음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은혜를 받는 기도생활이 줄어가고 중단되었습니다. 왜 목사들이 60-70대에 가서 변질되고 타락할까.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회개하는 시간이 없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은혜가 없으면 완고한 마음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기도실에 들어갔을 때에는 화가 나고 짜증이 나지만 기도실에 기도하고 나오면 은혜로 마음이 바꿔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지성소와 은혜의 공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야곱에게 다행히 이곳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쉽게 받으면 되지. 기도하면 되지. 가 아닙니다. 저는 지금 저의 교단의 신학교나 신학에 관해 관심이 많습니다.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신학생 한 명은 나중에 교회의 위험요소입니다. 목사가 타락하고 목사가 이상한 설교를 하면 답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신학교 때에는 힘들고 어려워도 제대로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인격을 수양하고 그런 신학공부를 하도록 교회가 서포트하고 신학생들에게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자기의 모습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어떻게 주의 종으로 살지. 대충 키운 성도. 대충 신앙생활 하세요. 이렇게 키운 성도 한 명이 나중에 어떤 나비효과를 낼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쉬운 것입니까? 어려운 것입니까? 적어도 이 말씀 야곱이 세겜에 사는 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배도 잘 드리고 문제도 해결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땅도 사고 제단도 세우고. 그런데 하나님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거기 벧엘 아니야.’ 지금 한국교회가 이렇습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했네. 이 정도 했으면 됐지.’ 하나님은 아니야. 거기 벧엘 아니야. 너와 내가 약속한 곳이 아니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곳은 세겜이 아니고 벧엘이야.’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있습니까? 제가 벧엘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늘 회개하고 말씀으로 삶을 돌이켜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면 하나님이 벧엘로 나를인도하시겠구나. 내가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 은혜를 받고 있기에 하나님이 징계하고 책망할 때 내가 회개 할 수 있겠구나. 이것이 축복이구나. 여러분 우리의 삶에 이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미가서에 보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든다고 되어 있습니다. , 창은 사람을 죽이는 것인데 이것을 꺾고 깨서 보습, 낫을 농기구를 만든다고 합니다. 미가서 핵심 내용은 은혜를 받으면 내 마음에 칼과 창 같은 것이 보습이 되고 낫이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됩니다. 보잘 것 없는 인생이 은혜를 받으면 그 인생이 하나님의 나라에 쓰임 받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할 싸움은 은혜입니다. 교회들이 돈이 너무 많아서 싸우는 것입니다. 인재가 너무 많아서 싸우는 것입니다. 교회가 너무 시스템이 발달해서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들이 은혜를 가렸습니다. 잘못하면 저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세속 복음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복음이면 다 된다고 합니다. 과정도 필요 없고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맵입니다. 지도입니다. 제가 강원도를 가는데 속초를 가기 위해서 지도를 찾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안 가. 지도만 들고 있어. 가야 하는데 안 가. 운전도 해야 하고 덥고 귀찮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세속 복음주의자들이 복음만 계속 듣고 내 삶은 안 변합니다. 안 싸웁니다. 믿음의 길을. 선명한데 안 가는 것입니다. 아는데 안 갑니다. 왜요? 세겜 성읍이 좋기 때문입니다. 왜 거룩한 삶을 동경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가 되는 벧엘로 가지 않으려 합니까. 왜 인생에 벧엘이 사라졌습니까. 왜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을 꿈꾸지 않으십니까. 왜 벧엘이 사라졌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엘엘로헤 이스라엘 나의 하나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가스펠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 되고. 진짜 부흥은 말씀을 받아서 회개하고 우리 남편과 아내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자식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고. 이것이 진짜 부흥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부흥. 내가 정말 회개하고 자복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진짜 부흥 중에 부흥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이 부흥 속에 있는 사람들의 교제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아무 쓸모없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부흥이라는 것과 거리가 먼 교회가 됩니다. 벧엘은 은혜의 장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치시고 단련 시켜서 벧엘로 인도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한지 아시지만 왜 믿음의 사람으로, 왜 기도의 사람으로, 왜 은혜의 사람으로,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인생을 드리는 참된 신앙인으로 만들려고 하느냐. 이것이 아니면 병든 이 땅 치유할 수 없습니다. 이 것 아니면 우리 가정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병든 이 땅 후대들을 누가 살릴 수 있을까요? 내가 안 변하는데. 내가 세겜 땅에서 그대로 사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전달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시 벧엘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다고 멈추면 안 됩니다. 문제가 해결됐다고 안주하면 안 됩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같이 가자고 동행하자고 합니다. 세일로 가면 큰일 나고 세겜에 머물러서 그나마 야곱에게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고 우리는 매일 벧엘을 향해서 가야합니다. 여러분에게 매일 하나님의 집이 회복되기를. 인생의 전체를 보았을 때 벧엘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교회일 수 있겠고 어떤 부흥의 역사, 부흥의 때일 수도 있겠고, 개인에게는 가정복음화가 될 수도 있겠지만 여튼 우리의 매일의 삶에 벧엘이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_로마서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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