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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9-11-10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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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0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야곱의 유언, 야곱의 신앙

본 문 :

창세기 49:1-33

오승주 목사

 

. 너희는 모여 들으라_창세기49:1-2,이사야61:1-11

- 모여야 하고 들어야 하는 이유

 

야곱이 12아들들을 불러서 유언하고 숨을 거두는 장면이고 창세기 50장에서는 요셉이 숨을 거두고 창세기는 마무리가 됩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_창세기49:1-2’

 

이것은 약간 야곱이 자기 12아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축복을 하는 개념보다는 고센 땅에 머물러서 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12아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계획은 지금 왜 12아들에게 중요한 유언을 하냐면 12아들들이 12지파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야곱의 유언은 아빠가 아들에게 주는 메시지라기보다는 하나님이 12지파에게 예언적인 성격을 가지고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4928절에 보니 각 사람의 분량대로라고 말합니다. 12아들들의 분량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분량대로 축복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이 읽었습니다. 야곱의 축복이라고 했는데 축복이 아닌 것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인데 앞으로는 너는 흩어질 것이요. 너는 망할 것이요. 종이 될 것이요.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자기 아들들에게 축복을 다 마치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수도 없이 읽었고 깨달음이나 은혜를 주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2아들에게 대해서 다 알고 있나요? 성경이 조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특별히 요셉은 굉장히 많은 장을 할애해서 조명하고, 유다의 잘못한 모습 큰 죄악을 한 장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겜에서 시므온과 레위가 칼로 죽이는 장면만 알지 나머지 아들들의 삶을 잘 모릅니다. 그러면다른 아들들의 삶은 없나요? 아들들은 다 사연이 있습니다. 성경이 조명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12지파가 구원받은 우리들을 상징하는데 우리도 사연이 있습니다. 사연이 모여서 인생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심방하고 사람들을 만나면 사연이라 하는 것은 굴곡진 인생, 고달픈 것들, 좋은 일, 안 좋은 일들. 이런 사연들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야곱의 아들들도 그 사연들이 다 있습니다. 여러분도 사연이 있잖아요.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니 나만 생각을 하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저는 목사라 모든 성도들을 만나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사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사연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을까. 나 같은 사람은 받을 수 없을 거야. 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_디모데후서2:20-21‘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금 그릇 같은, 은 그릇 같은 인생이라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질그릇, 나무그릇인데 이 그릇은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금 그릇이어서 쓰임 받는 것이 아니고, 은그릇이어서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이 쓰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49장을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여 들으라. 라고 시작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단어냐면 하나님이 사연 많은 굴곡진 인생 야곱의 아들들, 우리의 인생에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앞으로 불러 모으고 유언을 듣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 다 각자의 사연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일날 모여서 말씀을 듣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 모여서 말씀 듣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사연에 묻혀서 살다가 인생이 끝날 것입니다. 이런 사연 저런 사연에 묻혀서 살다가 인생이 끝이 납니다. 영원한 세계 있는데. 영원한 세계는 유한하지 않습니다. 무한합니다. 영원한 세계와 조우하고 영원한 세계에 입성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사는 사연 많은 인생 중에 유일한 기회가 있습니다. 죽고 나서는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그렇기에 세상의 성공유무나 소유개념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깨끗한 그릇입니다. 금 그릇, 은그릇이 아닙니다. 깨끗한 그릇입니다. 깨끗한 그릇이 무엇일까요?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_이사야61:5-7’

 

오늘 보니 하나님이 우리보고 세상의 여호와의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연 속에서 살다보니 여호와의 제사장 꿈도 안 꿉니다. 나 같은 인생이 하나님의 제사장? 하나님께 쓰임 받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이 언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냐면 하나님 앞에 모였을 때.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들었을 때. 이것이 우리는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는 잘하지만 듣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모이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 됩니다.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사연에 사로잡혀 살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신실하신 계획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저는 자존감이 낮다보니 사람들의 말이나 환경에서 오는 우울증이 많았습니다. 언제 치유가 되냐면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치유가 됩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대요.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당신의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저를 사랑하신대요. 이것이 제 마음에 영혼이 담기니까 제 자존감이 살아났습니다. 그 전에는 늘 비교하고 늘 눌리고 살았던 제가 하나님 앞에 가서 말씀을 들으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존재구나. 귀한 존재구나. 예수님이 핏 값으로 나를 사셨구나. 나는 중요한 사람이구나. 깨달아집니다. 그래야 사연 속에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_창세기41:41,46:29-30

- 12아들에 대한 유언과 축복은 12지파에 대한 예언입니다.

12지파의 고유한 사역들과 장자권

유다의 영적인 장자권 : 갈렙, 다윗,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다니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육신의 장자권은 요셉이 가져갔지만 영적인 장자권은 유다에게 있었습니다. 유다가 어떤 인물인가요?(창세기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이 성취된 유다지파

 

오늘 12아들에 대한 유언, 축복은 12지파에 대한 예언적인 성격 강합니다. 12지파를 향한 고유한 사역들을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애굽 땅에서 민족을 이루고 가나안에 들어가 땅을 분배하는 장면에서 12지파의 고유한 사역들이 있습니다. 오늘 예언하는 장면입니다. 예언을 보니 제가 야곱이라면 아들을 무조건 축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정말 팩트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_창세기49:3-4’

 

장자인 르우벤은 자기의 능력, 위풍, 권능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탁월하지 않게 된다고 저주했습니다.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을 침범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첩과 잠자리를 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르우벤에게 저주를 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를 묶어서 똑같은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_창세기49:5-6’

 

세겜에서의 사건입니다. 누이를 성희롱한 세겜 사람들을 거짓말로 속여 할례를 받게 하고 죽였는데 짐승까지 다 죽였습니다. 6절에 보니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실제 짐승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는 말도 될 수 있겠지만 그 당시 세겜 민족을 소라고 상징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주를 했습니다. 너희는 절대 모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의 집회가운데 내 영광이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_창세기49:7’

 

르우벤과 레위, 시므온이 아버지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르우벤은 실제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아주 무능한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원래 칼을 잘 쓰는 요즘을 말하면 기술자입니다. 기술자는 잘 안 망하는데 칼을 잘 쓰는 시므온이 잘 되어야 하는데 민수기, 신명기를 보면 가나안 땅에 가서 다른 지파는 숫자가 커지나 시므온의 숫자가 줄어듭니다. 그래서 나중에 시므온은 유다의 지파에 통폐합이 되어버립니다. 유다의 지파 밑에서 종노릇하고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지 축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레위도 똑같이 시므온과 묶어서 저주를 했습니다. 레위는 시므온보다 더 심하게 완전히 사라져 지파를 이룰 수 없으니 각 지파에 흩어졌습니다. 지파로서 역할이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저주받아 다른 지파로 흩어져 살던 레위지파가 얼마나 하나님을 섬겼는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섬겼는지 나중에 레위지파를 제사장 지파로 선정하셨습니다. 이 직분을 레위지파에게 주셨습니다. 레위나 시므온은 똑같지만 결말이 다릅니다. 레위지파는 제사장의 직분을 얻어 지파들을 섬기게 됩니다. 이 말씀이 저는 어려울 수 있는데 축복을 말해야 하는데 왜 저주를 말하고 있을까. 솔직히 우리도 이런 사연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의 사연대로라면 다 우리는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야곱의 12아들의 모습대로 살면 다 저주받아야 할 지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서 이런 사연들이 하나님에게 가는 길이 되고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닌가요? 지금 야곱은 이것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연약해. 너희들은 무능해질 거야. 너희들은 죄를 이기지 못하고 저주를 받을 거야. 이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그런 사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회복할 수 없어. 라고 메시지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런 삶을 살았으니까.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굴곡진 인생에서 주님을 만나고 자녀들에게 축복을 유언으로 남길 수 있는 자리까지 간 것은 그 자녀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야곱의 신앙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잘되기를 바랍니다. 내 자녀들 아무 문제없이 잘 커야하고 회사생활도 잘하고 모든 것이 잘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이것이 축복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인생이 굴곡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이 하나님을 기뻐하라 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하나님 그 분을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가장 큰 큰 영광을 받으신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만족하는 신앙은 내가 누추해지는 신앙입니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내가 잘 안 된다는 신앙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의존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은 육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육신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가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공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의존합니다. 제 인생 별거 아닌데 조금 잘 나가고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연약해. 너희들은 초라해져야해. 그래야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빛이 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 우리의 인생은 늘 부족합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마음의 부족함입니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 곳 안에 욕심이 자리 잡고 있는데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증거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공허하는 것. 성경에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죄를 낳을 것이요. 욕심이 그 자리에 있어서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들들을 축복했습니다. 르우벤아, 이제 멈춰. 위풍에 월등하고 권능에 탁월하지만 물에 끊음같이 이제 탁월하지 못할 것이야.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칼의 힘을 빌려서 세겜을 죽였으면서 회개하지 않고 칼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기술이고 장군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흩어질 것이야. 내 영광이 임하지 않을 것이야. 이 말은 너희가 흩어져서 나를 의존했으면 좋겠어. 그러나 시므온은 이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레위는 아버지의 유언을 무슨 말인지 알아먹었습니다. 다른 지파에 흩어져 살면서 얼마나 회개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살았는지 나중에는 제사장의 직분을 줄 때 레위지파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은 금 그릇이어서 축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질그릇이라도 나무그릇이어도 깨끗한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유다라는 인물을 봐야 합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_창세기49:8-10‘

 

야곱의 축복을 유다와 요셉만 받습니다. 12아들 중에서 가장 큰 죄를 지었던 유다. 그런데 유다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온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다는 장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중에 야곱이 장자권을 요셉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영적인 장자권을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유다의 실수는 다른 아들들보다 가장 큰 실수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회개합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그리고 유다가 변화되었습니다. 요셉에게 갔을 때 요셉이 아버지를 모시고 오지 않으면 곡물을 주지 않겠다고 했을 때에 유다가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성경을 읽어보시면 유다가 변화된 모습이 나옵니다. 갑자가 확 변화된 것은 아니지만 유다는 그의 고달픈 삶에서 어렴풋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인생을 보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요셉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죽이려고 하고 팔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보잘 것 없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구나. 우리를 통해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계시는 구나. 유다가 조금씩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유다는 별 볼일 없습니다. 요셉이 축복은 다 받았습니다. 요셉보고 무성한 가지라고 했습니다. 너는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가지에 푸른 열매처럼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야곱의 축복의 내용이 요셉에게 하는 축복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면 요셉의 가문이 더 잘되어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비교가 안 됩니다. 유다의 후손들을 열거해 볼까요? 갈렙, 다윗,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다니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유다같이 사연 많은 인생을 유다가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니 축복의 가문으로 바뀌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49장은 어마어마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가 르우벤 같은 인생이고 시므온 같은 인생이고 레위 같은 인생이지. 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한다. 기도 잘한다. 정말 실력 있다. 하니 예수님을 못 만납니다. 원래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노라. 그렇게 죽었던 사람에게 하나님이 제사장의 직분을 맡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으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한 야곱_창세기49:28,이사야51:1-6,62:6-9

-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늘로 먼저 눈을 드는 자들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_창세기49:28’

 

사람마다 분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태어났는데 제 인생의 몫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감당해야할 삶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묵상되었습니다. 르우벤 분량대로, 시므온 분량대로, 레위 분량대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량을 가지고 살았는데 다 저주받아야 합니까? 망해야 합니까? 금 그릇이 분량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 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은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질그릇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이 다 분량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살아야 합니다.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 그런데 우리가 깨끗해 질 수 있나요? 스스로 의로워 질 수 있나요? 예수님이 오셔야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그의 피로만 우리가 정결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에 어떻게 오실 수 있나요? 내 죄가 더 크오니 다윗은 시편에 고백합니다. 내 죄가 너무 크오니, 나는 주님이 아니면 하루도 살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119편을 보면 하루에 7번 찬양을 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흠모해야 사랑해야 7번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하루 종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서 7번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죠. 7번 찬양한 사람이 나의 죄가 헤아릴 수 없어서. 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7번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찬양하는 것이죠. 그런데 7번 찬양할거야 라는 시스템이 생기면, 규례가 생기면 이 7번이 종교가 되어버립니다. 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껍데기입니다. 오늘 성경 몇 장 잃어야지. 하루 3번 기도해야지.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했을 때에는 은혜이고 경건의 힘이 되지만 사랑함이 사라지고 종교로만 남아버리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됩니다. 7번 찬양하는 것을 신앙으로 가져가면 인생에 장애물이 됩니다. 7번 찬양해야 만족이 생기면 6번 찬양하게 되면 불안하게 됩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껍데기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7번 찬양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금 그릇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머무를 수 있는 깨끗한 그릇인지 있는지 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의존하고 있는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초라하게 살아야 합니다. 부족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에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초라함, 가난,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한 심령. 우리는 예수님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 맞지만 욕심이 우리를 이렇게 두지 않습니다. 조금만 익숙해지고 열매가 있고 응답이 있으면 변질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교단에서 응답받았다. 결론 났다.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젯밤에 어떤 분이 연락이 왔습니다.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나는 인도받고 너는 못 받고 있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훈련을 잘 받고 기도수첩도 사서하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인도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행위들이 정죄의 도구가 되면 그것은 평안이 안식이 아닙니다. 열매와 결과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사람이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흐름은 성경 속에 있습니다. 은혜 속에 있습니다. 껍데기로 사람을 평가하고 내 모습을 평가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있다면 괜찮습니다. 단지 하나 올바른지 그른지 확인하는 것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모이고 하나님 앞에서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사연에 묻혀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는 복된 인생으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갈 수 있는 것. 그래서 오늘 야곱이 아들들에게 해주는 조언은 엄청난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저희 교회 목회는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워지길 원합니다. 사역도 하고 심방도 하는 것이지 그 사역이 심방이 목적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이런 교회가 되어야지 이것은 없어졌습니다. 각자 다 시간표가 다릅니다. 어떤 성도님은 하나님을 만나는데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레위 같습니다. 어떤 가정은 유다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올바른 길을 가도록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구원에 쓰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일에 우리의 인생이 헌신하고 드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예수님으로만 우리의 인생이 깨끗해 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_이사야51:1-6‘

 

우리는 하루살이 같습니다. 하늘로 눈을 들어 그것으로 아래 땅을 살피라고 합니다. 하늘로 눈을 들어야 합니다. 구원이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에게 똑같은 출발선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흠모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공평, 공의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공평했습니다. 똑같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레위가 수모와 굴곡진 인생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고 흠모했을까요? 얼마나 제사장의 직분을 받을 만큼 준비를 했을까요? 내 구주의 예수를 더욱 사랑 이라고 고백을 했을까요? 우리의 인생은 예수님을 가까이할 때 저주에서 축복으로 점차 바꿔집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목사를 쳐다보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각 사람의 분량대로 받을 축복입니다. 보잘것없는 인생이지만 분량 안에서 깨끗하게 준비하여 쓰임 받는 것.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공의입니다. 야곱이 당신의 믿음을 이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실 전부 똑같은 축복이야기였습니다. 너는 망할 것이다. 너는 잘될 것이다. 다 인생입니다. 분량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야 해. 야곱도 내 자녀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자녀가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 가족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그 믿음을 유언으로 남겨줄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보잘 것 없는 그릇이지만 사연 속에서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된 그릇이 되기를 바랍니다.

 

문의 / 윤덕현 전도사 010.9899.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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