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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9-12-1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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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5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화목제:하나님과 화목하라!

본 문 :

레위기3:1-17

오승주 목사

 

 

. 화목제에 관하여.

 

화목제(제바흐 쉐라밈):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갈망하다, 평화와 안식을 위한 제사

 

화목제에 대해서는 레위기 711절에서부터도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서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화목제는 히브리어로 제바흐 쉐라밈이라고 하는데 쉐라밈이라고 하는 말은 샬롬의 어원이 됩니다. 샬롬은 평안하뇨? 당신 평강하냐? 라는 말입니다. 샬롬과 가장 비슷한 말을 쓰는 인사말을 쓰는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는 것이다. 요즘은 그냥 안녕하세요 이러지만 옛날에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그 나라의 인사법만 봐도 그 나라의 역사를 알수 있다. 얼마나 침략이 많고 전쟁이 많고 밤에 많은 사람이 죽었으면 이렇게 인사를 했을까? 비슷한 역사가 이스라엘이다. 지금도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와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지금도 총, 칼로 싸우고 있다. 샬롬이라는 인사를 많이 하는데 샬롬은 역사속에서 나오는 슬픔있는 인사말이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도 밤새 큰 어려움이 없었는지에 대한 인사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화목제는 평화와 안식을 위한 제사인데, 화목제를 주로 언제 드렸냐면 속건제, 속죄제, 번제는 다 죄사함을 위한 제사이다. 번제, 속건제, 속죄제를 드리고 나서 드린 제사가 화목제이다. 다시 말해서 화목제는 죄 사함의 제사를 통해 회개한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널리 알리는 제사가 화목제이다. 나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야, 나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야, 나 이제 구원받았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이 화목제이다. 우리는 제사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데 이 제사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과거에 집에서 드렸던 제사가 생각나기도 한다. 제사를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배로 바꿔서 들으면 된다. 제사는 곧 예배이다. 제사를 통해서 예배를 배우고 있다. 레위기서를 4번째 강해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연락을 받은 적이 처음이었다. 레위기 강해 자체를 많이 하지 않기도 하다. 레위기에 대해서 신선하다, 이런 뜻이 있었냐고 하면서 설교원고를 받을 수 있냐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분들은 레위기에 대해서 굳이 율법을 설교할 필요가 있냐, 복음이면 됬지 예수님이면 됬지라고 하는 분들도 계시더라. 굳이 그렇게 자세하게 제사를 설명할 필요가 있냐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세히 배워야 한다. 자세히 배우지 않고 허투루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것은 전문성이 아니다. 꼼꼼하게 하는 사람이 기회도 많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66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자세히 보고 자세히 배우고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이 정해주신대로 예배를 드려야 받으신다고 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나?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인지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예배인지 예배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드려야 한다. 우리는 그냥 다 괜찮다, 하나님이 받으시겠지라고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알다시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 최근에 삶이 예배라는 것이 정말 많이 나오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예배를 회복하라는 메시지를 정말 많이 한다. 삶이 예배라는 표현은 주로 세속주의신학, 자유주의신학에서 던지는 메시지이다. 삶이 예배라는 메시지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주는 위험성에 대해서 설명을 할 것이다. 삶이 예배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삶이 예배다라고 하니까 주일 성수가 약해지고 사라졌다. 심지어 삶이 예배라고 되니까 우리가 하루에 시간을 할애해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하는 시간도 희미해졌다.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예배이다. 공부하는 것도 예배이고 밥먹는 것도 예배이고 직장 생활하는 것도 예배이다. 이게 맞지만 삶이 예배라는 라벨을 붙여놓고 우리는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았어, 그런식으로 위안을 삼으며 정작 예배하지 않는 세대가 와버렸다. 한국 교회가 왜 이렇게 됬을까? 목사로서 고민을 많이 한다. 이 시대의 흐름,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고 공부한다. 지금 이런 멘트들이 우리의 원래 본질들을 너무 많이 무너뜨리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따로 만들지 않고 삶의 모든 순간에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주로 이렇게 말하는 분들은 세속적이다. 세상일을 할 준비는 굉장히 잘 갖춰졌을지 몰라도 주일을 지키는 것을 시도하면 큰 영적인 무기력이 금방 드러난다. 단지 주일뿐만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서 홀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는 것을 해보셨나요? 우리의 삶에서 묵상을 하고 기도하는 것이 귀찮게 느껴진다면 이미 세속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일, 안식일을 지키라는 성경구절이 구약성경에만 159절이 등장한다. 그 중에 레위기에만 20구절이 등장한다. 이것을 한가지로 정리하면 주일을 거룩히 지키면 복을 주겠다, 지키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 것이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지 않으면 저주가 있는데 저는 저주가 이 시대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힘을 잃고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약해진 이 시대가 저주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한 분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잃어버린 시대이다. 그러면서 많은 세상의 것들도 잃어버린다. 진짜 축복들도 다 놓친다. 운동을 하다보면 체력이 있는데 사람마다 체력이 다르다. 저는 계속해서 운동을 해서 체력이 좋을 것이라고 튼튼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처남이 한강을 좀 뛰자고 이야기를 했다. 한시간정도야 껌이지라고 생각하고 뛰었는데 5분을 뛰었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저를 쳐다보는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저는 이 체력이 주일예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기초체력을 운동을 통해서 갖추지 않으면 결정적일 때 무너지게 된다. 뮤지컬배우가 작품 하나를 하게되면 사람들은 타고났다, 노래잘한다, 연기 잘한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작품에 서기를 준비하면서 작품을 진행할 때 계속 반복해서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야 무대에서 한편의 드라마를 실수 없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데 힘들게 느껴지는 증거는 영적인 체력이 허약하며 바닥이라는 증거이다. 대학생들, 청년들 모두 영적인 체력이 바닥에 있다. 아마도 이것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속된 마음이 근본적인 원인 일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마음은 신자들의 마음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귀찮고 성가시다면 영적인 체력이 바닥난 것이다. 소요리문답에서 주일에 관해서 이렇게 요약해서 정리하고 있다.

 

안식일에는 온종일 거룩한 안식을 취하면서 불가피한 일이나 긍휼을 베푸는 일을 제외하고는 다른 날에 합법적으로 용인되는 세속적인 직업 활동과 오락까지도 모두 중단하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시간을 온전히 바쳐 거룩히 지켜야 한다

 

이것은 단지 예배 빼먹지 말아라, 예배를 잘드리라는 메시지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다. 잘 아는 청년이 SNS에서 리더, 제자라는 많은 것을 붙여놓은 친구였다. 그리고 그 친구가 연애를 하는데 남자친구도 비슷한 친구였다. 제가 왜 충격이 됐냐면 SNS에서 해외여행을 간 것을 보았다. 결혼 전에 해외여행을 가는 것도 충격인데, 그것을 공개하게 되면 그 아이들에게 배우는 아이들에게 영향이 그게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일을 당연히 포함해서 가는 것이 진짜 충격이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시나요? 죄는 스며들어 파고든다. 지난주에 여가부에서 성평등에 대한 책자를 몇몇 학교를 시범학교로 지정하여 배부했다. 성평등은 좋은 말인데 이 이면에는 성평등이 아니다. 남성은 남성의 성이 있고 여성은 여성의 성이 있다. 서로 평등한게 아니라 똑같은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르다. 이 말은 결국 나중에 레즈비언도 동성애도 평등하다는 것이다.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저는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말하면 잡혀간다. 동성애가 죄가 아닌가? 동성애는 죄이다. 이러한 것들이 저맟 자녀들에게 스며 들어서 예배는 삶이다 라는 것이 스며들면 어떻게 될까? 평생 부모님과 관계도 없이 부모님 사랑해, 좋아해 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인사도 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진짜 효도이다.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삶의 거룩한 축이 거룩한 주일이어야 하는 이유를 성경은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무너지니 기초체력이 떨어져 허약해진다. 죄가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다. 죄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는데 거부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 이것은 죄 인줄 분별하지 못하고 다 괜찮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러분이 상상해보아라.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고 천국 가는 정당성이 사라진다면 그 기회가 사라진다면, 교회가 다 무너지고 복음 전하는 목회자들이 사라진다면 다 지옥에 가게 된다. 지옥은 잠깐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가는 것이다. 끝나는 것이다. 예배 하나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게 된다. 우리는 주일, 예배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세속주의 신학은 예배를 똑바로 드리자고 이야기를 하면 율법주의라고 프레임을 건다. 성경에 나와 있는데 이게 왜 율법인가? 온전히 안식을 지키라고 나와있는데? 그러면 십계명도 지키면 안 되겠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의 뜻, 죄를 분별할 것인가? 그러니 삶이 예배라는 슬로건은 정작 주일을 지키는 것 하나님과 건강한 교제를 하는 것이 점차 멀어지고 있다. 단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답고 교회가 전도하고 선교하는 힘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무너지면 우리의 모든 삶이 무너지게 되어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고 화목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 하나님과 화목하라.

 

- ,,염소와 같이 큰 짐승을 드리는 제사(왜 비둘기가 빠졌나?)

 

오늘 3장을 읽어보면 똑같은 것이 반복이 된다. 반복이 소와 양과 염소이다. 희한하게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암컷도 허용하셨다. 대신 흠이 없어야 됨을 말씀하셨다. 다른 번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비둘기가 빠져있다. 왜 빠졌나? 너무 간단하다. 화목제는 이웃과 음식을 나눠먹는 제사인데, 비둘기는 못 나눠 먹는 것이다. 어렸을 때 참새 잡아서 먹으려고 하는데 한입이었다. 비둘기가 하나님이 안받으시는 것 그런 것 아니다. 화목제사의 특징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다. 소와 양과 염소를 제사하면서고기의 3가지 몫을 7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제일 먼저 제사를 드리고 첫 번째의 몫은 하나님께 있다.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_레위기3:3-4’

 

-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 장에 붙은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어 화제로 드린다.

 

그냥 받으시지 다 떼라고 하신다. 다 떼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설명할까? 상상해보라. 동물을 잡았는데 내장에 붙은 기름을 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 끄집어 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내장에 붙은 기름만 요구하셨다. 얼마나 섬세하게 잘라내야 하나? 내장을 받지 않으시고 기름만 받으신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조금만 잘못 드려도 받지 않으셨다. 내장에 붙은 콩팥에 붙은 기름은 짐승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 이렇게 번거롭게 번거로운 과정을 통해서 제사를 꼼꼼하게 잘 준비하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신다. 중심을 원하시는 하나님. 중심은 우리의 속 진짜, 진심을 이야기한다. 제물은 다 예수님을 상징한다. 예수님을 향한 진심, 예수님을 향한 진짜를 이야기한다. 예수님을 얼마나 자세히 알아야 하고 예수님을 알면 오는 감동, 기쁨,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껍데기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다 아신다. 성령은 속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 속에 가장 깊이 있는 것을 드리는 것이다. 결국은 나를 드리는 것이다. 이 제사의 특징은 구원 받은 것에 감사해서 나를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_레위기3:16-17’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한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다.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중심이 누구의 것인가?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의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 한분이다. 기름을 사람에게 주고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사람에게 주는 것은 죄이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사람에게 돌리면 그 사람도 죽지만 나도 죽는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감사의 대상은 홀로 하나님 한 분이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두 번째 몫은 제사장의 몫이다. 7장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가장 복잡한 기름을 다 드리고 나서 그 다음에게 아론의 제사장에서 드려야 할 몫이다.

 

- 중요한 것: 하나님께 일부를 드리고, 제사장과 공동체 지체와 나누어 먹는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은 영원한 소득이니라_레위기7:34-35’

 

당연히 제사장에게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일부분을 드리는 것이 맞다. 이 예식을 집행하는 제사장은 자기의 생계가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니까 실로 좋은 것으로 보상해준다는 의미도 있다. 목사가 왜 피곤하고 우울증이 많이 걸리고 고단한지 아시나요? 여러분이 상담하러 올 때 주로 안 좋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오신다. 좋은 일 생기면 연락도 없다. 이러한 의미도 있지만 제사장은 목사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제사장이 목사라는 해석부터가 잘못된 해석이다. 구약에서 상징하는 제사장은 예수님이다. 지금은 대제사장이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천주교가 틀린 것이다. 교황이 제사장과 똑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지금의 대제사장은 예수님 한분이다.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 목사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목사의 근거를 찾을 길이 없으니까 제사장의 직무를 성직자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서 하는 것뿐이다. 정말 감동이 되는 해석이 되는 것이 뭐냐면 흔든 가슴과 든 뒷자리, 두 뺨을 제사장에게 주라고 이야기를 한다. 흔든 가슴은 앞가슴을 이야기한다. 앞가슴을 드리는 것은 이사야 40:11에 기록하고 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_이사야40:11‘

 

예수님이 우리를 품에 안으시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암컷은 우리를 상징한다. 우리가 앞가슴을 제사장에게 드리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며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를 끌어안으시는 것을 상징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릴 때 늘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든 뒷다리는 히브리서 원어로 오른쪽 어깨라고 해석을 해야 한다. 뒷다리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사야9:6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_이사야9:6’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정사를 메어 주셨다. 우리의 모든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책임지심을 상징적으로 이야기 한다. 두 뺨은 이사야50:6에서 기록하고 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_이사야50:6’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수욕과 수모를 피하지 않고 다 받으셨다. 왜 제사장에게 짐승의 얼굴 고기를 줬을까? 우리의 모든 수모를 예수님께서 직접 감당하셨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한쪽 뺨을 맞을 때 다른 쪽 뺨까지 내어주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사장에게 드리는 고기 부위에 대한 설명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제사장에게 고기 부위를 드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했다. 하나님의 품, 그 어깨, 그 얼굴을 생각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_레위기7:15-18’

 

마지막으로 화목제물의 고기는 그 날에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자원하는 것이나 서원하는 것은 이튿날까지 두게 하셨는데 셋째 날까지는 두지 못하게 하셨다. 셋째 날까지 두면 그 제물의 제사는 다 헛되다고 말씀을 하고 계신다. 일단 큰 고기를 잡아서 기름을 떼서 하나님께 드려봤자 조금밖에 안 된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주고 남아도 많은 양의 고기가 남는다. 그런데 그 고기들을 하루만에 다 먹으라고 이야기를 한다. 혼자 먹을 수 있나? 그런데 그 날에 다 먹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무용지물이 된다고 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 불러야한다. 가족들, 종들을 다 불러서 나눠 먹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제사는 구원 받고 감사해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다. 고기를 나눠먹으러 사람을 불렀으면 이야기를 한다. 이 당시에 짐승 한 마리만 있어도 집이 부자가 된다. 이 시대 고기를 먹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엄청나게 귀한 날이다. 그런데 고기를 먹으면서 아무 말도 안할까? 무엇을 이야기할까? 내가 제사를 지냈는데 너무 감사하다, 예수님께서 내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는데 너무 감사하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됬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부모님과 고기를 먹으러 가보시면 싫은 말 나오지 않고 좋은 말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이며 뜻이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서 화목제물을 나눠 먹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잔치이다. 영적인 잔치를 의미한다. 지금도 고기를 나눠먹어야 하나? 예수그리스도가 고기이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를 나누고 교제를 하며 하나님의 언약이 자연스레 자녀들에게 전달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교회 갔다 왔냐? 헌금했냐? 예배 잘 드렸냐? 묻고 끝이다. 우리 아이가 정말 은혜를 받고 있는지 하나님을 사모하고 있는지 관심이 없고 모른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하지 않는 시대이다. 우리가 좋은 게 좋다고 다 덮고 가면 나중에는 예수 믿는 시대가 사라지게 된다.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되는 시대가 온다. 또 하나는 이틀이 다 지나면 셋째 날 절대 먹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지혜도 있을 것인데 예수님께서 삼일에 부활하실 것을 상징하고 있다. 제사에 정말 많은 것을 집어 넣으셨다. 온 식구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고 그 죽음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음을 가르치고 나누고 우리의 인생에 부활을 깨닫도록 알게 하신 것이다. 목사에게 좋은 살 가져다주자 라는 설교는 정말 잘못된 설교이다. 희생제물은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여러 가지 행위들을 통해서 오실 메시야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하고 깨닫도록 돕는 하나님의 정하신 것들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는 교회로 이해가 되어야 한다.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이웃들에게 나눠야 함으로 이해해야 한다. 저는 전도를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전도한다. 사실 성경은 내 입술로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전도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이 나와 있다. 지금 우리가 지금 전도를 하고 있나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내 안에 예수님을 자랑할 만큼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끄럽고 분위기상 말 못하겠고 솔직히 그렇지 않나? 우리는 병든 시대와 병든 삶을 살고 있다. 예수님을 자랑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교제, 화목하는 시간이 사라져버렸다. 그렇기에 옛날에 하나님을 만났다고 옛날에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한다. 은혜는 오늘 받는 것이다. 매일 받는 것이다. 소제를 통해서.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_신명기12:5-7’

 

화목제목을 설명하고 있다.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에 영적인 잔치가 있게 하신다.

 

.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삶에 이웃들이 와서 함께 나누는 잔치가 있는가? 이번주에 기도하는데 우리의 교회에 많은 성도님들, 새가족들이 오시는데 교회 와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은혜 못받고 예수그리스도로 시원한 은혜,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맛보지 못하면 저 목회를 못합니다. 제가 무슨 배경이 있습니까? 하나님 우리 교회가 구원의 은혜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구원의 감사가 있어서 우리의 부모를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이웃들을 위해서 진짜 뜨겁게 간절히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하나님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저 목회 못합니다. 이곳에 와서 화목제물이 풍성해져서 내가 믿는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전하는 삶으로 변하지 않으면, 거룩과 성화의 삶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이 목회가 얼마나 힘들까요. 우리의 삶에 가정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축복해주셨어라는 나누는 은혜의 삶, 긍휼의 삶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_시편56:12-13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고백제, 자원제, 서원제

 

감사제는 화목제와 같은 것이다. 화목제는 고백제, 자원제라고 하기도 한다. 자원제, 낙헌제는 억지로 감사하는 것, 환경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내 깊은 곳에서 죄 사함을 받아서 나오는 감사로 드리는 화목제이다. 자원해서 드리지 않는 것은 감사가 아니다. 3주전에 1부 예배 성가대 신청을 받았는데 새가족 한 분이 신청했다. 저한테 이런 마음이 들었다. 한 분이면 성가대 안하면 되는 거지 집사님들에게 전화해서 왜 성가대 신청 안했냐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은혜를 받은 분이 은혜를 나누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감사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화목제라고 한다. 화목제물인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존재인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그 화목은 누구와 나눠야 하나? 이웃과 나누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새 계명을 주셨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만 사랑한다. 잔치만 베풀고 있다. 구원의 열정, 감사, 구령의 열정은 다 잊어버리고 다 빼앗기고 있다.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 본질 다 빼앗기고 비슷하게 겉모양만 형태를 맞춰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기름을 먹지 말고 피를 먹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것은 내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신다.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_레위기7:19’

 

하나님과 화목한 그리스도인이 이웃과 화목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불사르라고 이야기를 하신다. 부정한 물건은 죄, 우리를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속건제, 속죄제를 드리지 아니하면 화목제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내 가장 중요한 중심을 드릴 수 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 이웃들에게 화목제물을 나눠줄 수 있다. 하나님이 내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다, 하나님이 인류역사의 창조주이시다. 이 믿음이 있어야 나를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나는 죽어서 반드시 천국 간다는 확신이 있어야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나라는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주님의 것입니다, 내 인생 주님께 드립니다 라고 서원을 하고 내 인생에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면 왜 다 가져가냐고 하나님께 짜증을 낸다. 그것은 드린 것이 아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확신이 있다. 화목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잔치이다. 영적인 잔치. 날마다 하나님께 내 중심을 드리고 교회를 위해서 대제사장을 바라보며 그것을 이웃과 풍성히 은혜를 나누는 잔치가 회복되길 축복합니다.

 

문의 / 윤덕현 전도사 010.9899.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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