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예배

2020-05-10 주일예배

2020-05-10 주일예배.hwp
0.08MB

20200510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나 중심인가? 하나님 중심인가?

본 문 :

레위기23:26-32

오승주 목사

 

. 복음이 기쁘신가요?_시편90:6-13,이사야40:6-8

 

성경은 를 안 붙였는데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속죄일이라고 구분하기 위하여 대를 붙여서 대속죄일이라는 절기이고 사실 레위기 16장에 속죄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대 속죄일이 한 번 더 언급 되었는데 대 속죄일의 의미들, 그리고 오늘 날 우리가 어떻게 붙잡고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었으면 좋겠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큰 음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유익한 것을 하고 싶고 해로운 것을 하기 싫으면 잘 사는 것입니다. 유익한 것을 하고 싶고 해로운 것은 하기 싫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대다수 그 것이 어긋났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마음이 많냐면 유익한 것은 하기 싫어하고 해로운 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가깝게는 운동도 그럴 수 있고 음식도 그럴 수 있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멀리하고 싶고 세상을 멀리해야 하는데 세상을 가까이 하고 싶고. 기도하고 말씀 듣는 것이 유익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멀리하고 싶고 세상의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해로운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까이 하고 싶은 것.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죄에 노출이 됩니다. 언제요? 아담과 하와.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서 에덴동산이라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에덴동산은 어떤 곳인가요? 인간이 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옷을 입지 않아도 추위, 더위를 느끼지 않을 만큼 완벽한 온도 조절이 있는 곳이고 빈 몸으로 다녀도 몸에 상처가 나지 않는, 가시덤불이 없는 곳입니다. 시골에서 벌초만 해도 온 다리에 상처가 납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그런 곳입니다. 천국에 가면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가시덤불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걸쳐야 하는 것입니다. 죄에 노출된 우리가 해로운 것을 늘 하려고 하고 유익한 것은 밀어내고 하나님의 은혜는 밀어내고 해로운 것을 가까이 하려는 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기쁘신가요?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이 기쁘신가요? 라는 질문이 영적인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복음이 기쁘지 않다면 우리는 정말 해로운 것을 많이 가까이 하고 있지는 않나. 복음이 기쁘지 않다면 하나님과 동행하거나 하나님과 가까이 하거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어긋나 있지 않나. 복음이 기뻐야 하는데 복음이 즐겁고 신나야 하는데 신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이 기쁘거나 감격스럽거나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사역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슬픈 일인데 사람들을 만나면 복음이 대게 기쁘고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커서 신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제 모습을 보면 저도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을 위한 단체인데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물어뜯고 욕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가 느낄 때에 성령이 임하시면 초대교회를 보면 물건을 통용하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공산당처럼 물건을 나누자 이런 말이 아닙니다. 복음이 기뻐서 복음을 위해서 자유하게 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복음이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이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들을 만나면서 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복음이 기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이 기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복음을 자랑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런 눈으로 주변사람들을 쳐다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희미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_시편90:6-13’

 

꽃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인생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갈 때 저와 여러분은 괜찮지만 복음이 기쁘지 않는 사람들, 해로운 것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가 낱낱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주의 앞에 놓아진다는 것입니다. 끔찍하죠?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_이사야40:6-8’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해야만 영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복음이 늘 기쁠 수 있는데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복음이 기쁠 수 없습니다. 이런 서론의 내용들을 가지고 오늘 본론을 살펴볼 것입니다.

 

. 대 속죄일의 은혜

 

- 두 마리 염소_레위기16:8-10,20-22

 

레위기 16장에 대 속죄일에 제사장이 했던 행위를 기억하시죠? 대제사장이 염소 두 마리를 가지고 옵니다. 염소 두 마리뿐만 아니라 매끈한 돌 두 개도 가지고 옵니다. 매끈한 돌 하나를 들어서 여호와를 위하여라고 적습니다. 또 하나의 돌에는 아사셀을 위하여라고 적습니다. 아사셀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그리고 나서 여호와를 위하여적은 돌을 들고 염소 한 마리에게 1년에 한 번 드리는 대 속죄일이니까 백성들의 죄를 다 전가시킵니다. 그리고 염소를 죽여서 피를 뿌리고 속죄제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 아사셀을 위하여염소는 사람을 시켜서 광야로 끌고 가게 합니다. 진짜 오래 걷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 험한 곳, 낭떠러지가 있는 곳, 들짐승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염소를 풀어줍니다 염소가 험한 산길을 가고 들짐승이 있으니 잡아먹혔을 수도 있고 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졌을 수도 있겠고. 염소를 풀어서 놓아주는데 염소가 안 보이면 어떻게 했냐면 사람이 혼자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는 먼 길에 사람을 중간 중간에 세웁니다. 염소를 풀어준 사람이 염소가 안 보이면 염소가 안 보인다고 소식을 전합니다. 전하고 전하고 그 소리가 대 제사장의 귀에 들어가면 대 속죄일이 끝나는 것입니다. 너무 놀라운 것은 아사셀을 위하여염소의 사건이 신약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는데 광야에서 시작했습니다. 마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 누가, 요한은 기록하고 있지 있지만 예수님이 험한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서 40일을 금식하시고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습니다. 보라.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아라. 아사셀의 염소처럼. 그 염소가 우리의 죄를 지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갔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공생애 사역이 끝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너희의 죄가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레위기의 제사, 속죄일은 일 년의 죄밖에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매 년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영원한 속죄입니다. 하나님이 그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동에서 서. 동과 서는 끝과 끝입니다. 나중에 우리를 천국에서 맞이하실 때 우리의 죄를 모른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잊어버리시겠다고 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너 같은 게. 네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데. 하면서 정죄합니다. 속지 마세요. 하나님도 모르는 죄입니다. 하나님도 잊어버리시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끝내셨습니다. 죄가 크든 작든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작은 죄조차 해결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에서 끝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밖에 있는 사람들, 은혜 밖에 있는 사람들은 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좌 앞으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에 죄가 하나님 앞에 다 펼쳐지는 것입니다. 해결 받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의 죄는 하나님이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알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앞으로 매일 가는 것입니다. 죄를 알기 때문에 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대제사장이 해야 할 일이 끝난 것입니다. 대속죄일에 하는 것은 염소 두 마리를 가지고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태워 죽이고 하나는 광야에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1년의 죄를 끝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인류의 죄악, 저와 여러분의 죄 문제를 끝냈습니다.

 

- 스스로 괴롭게 하며_레위기23:29

 

그런데 중요한 것은 레위기 23:29너희는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우리의 죄 문제가 끝났는데 너희는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2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는 스스로 괴롭게 하라고 합니다. 안식일에 스스로 괴롭게 하라고 합니다. 제가 16장을 설교할 때에는 이것을 금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괴롭게 하다라는 말이 금식을 표현하는 말은 아닙니다. 스스로를 괴롭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해서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에 보니까 'You must deny yourself' 네 자신을 부인하라. 스스로 괴롭게 하다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네 자신을 부인하라. 영어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더 정확합니다. 스스로 괴롭게 하다라는 것은 옛날에 음욕이 생기면 칼로 찌르는 것을 수도원에서는 했었습니다. 중세 때 수도원에서는 경건주의가 활개를 칠 때에는 허벅지에 철조망을 달았습니다. 옷 사이로 끈으로 매어서 손으로 잡아당기면 철조망이 조여지는 것입니다. 가다가 예쁜 여자들를 쳐다보는데 그 때에 확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세 수도원에서 했습니다. ‘괴롭게 하다가 그런 괴롭게 하다가 아닙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너 자신을 부인하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대 속죄일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해결하셨는데 너희는하면서 명령하시고 이것을 대대로 규례로 시키라고 하신 말씀이 You must deny yourself 라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인간이 에덴동산에 쫓겨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도록 창조되었던 인간이 쫓겨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나 중심으로 살아서. 내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내 실력이 최고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자신을 부인하라. 네 중심으로 살지 말고 성경은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신,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이것을 회복시키시려는 것입니다. 네 중심으로 살아서는 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지옥 가는 문제 해결하지 못해. 이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되_레위기23:30

 

이날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는 자는 내가 그의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_레위기23:30’

 

대 속죄일, 안식일에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약에 일을 하면 백성에서 끊어지겠다고 합니다. 이 일은 원래는 저주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일이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것도 운동하면서 땀 흘리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노동을 하면서 땀 흘리면 피곤하고 힘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셨는데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남자에게는 노동하는 것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 일이 저주이고 재앙이냐.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인간이, 나 중심으로 사는 인간이 유일하게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일입니다. 그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금하신 이유입니다. 6일은 최선을 다해 일하고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 이 말은 너희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돈을 벌어서 우리의 자존감을 드러낼 수 있기에 전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까이 하고 의지하는 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일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능력이 생깁니다. 능력이 많아지면 부유해집니다. 부유하면 존재감이 강해집니다. 나 중심. 부자돼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메시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주셨음을 잊어버리게 되고 구원이 필요함을 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구약의 에서처럼 사울 왕처럼 되는 것입니다. 에서와 사울 왕의 공통점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안식일에 일했습니다. 하나님 필요 없다고. 자기의 권력을 과시하고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대로 예배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다윗보다 사울 왕이 훨씬 더 훌륭합니다. 야곱보다 에서가 훨씬 뛰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왜요? 자기를 의지하니까. 내 공로로, 내 노력으로 구원 받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아니면 영원히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이 일을 멈춰.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저주이고 재앙인데 인간이 일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신 것인데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에는, 대 속죄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교회, 세계 교회 분위기가 그런데 우리가 기분 좋은 신앙생활을 합니다. 많은 교역자들 중직자들이 모여서 무엇을 회의하고 연구하냐면 어떻게 하면 성도들을 기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기뻐해서 교회가 부흥할까. 이런 것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교회에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도 어느 순간 신앙생활을 하는데 내가 기분이 좋아야 해. 내가 신나야 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것을 규례로 지키라고 합니다. 대대로 지키라고 합니다. 너를 부정하고 일을 하지 않는 안식일을 대대로 지키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너희의 죄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매주 기억하고 안식일 때마다 기억하고 그 감사와 감격을 잊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기쁜 상태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중심인가. 하나님 중심인가. 철저히 죄는 나 중심으로 살게 만듭니다. 나의 자아. 내 것. 이렇게 살게 만듭니다. 우리가 한국교회를 볼 때, 제 모습을 볼 때에 제가 네팔을 자주 갑니다. 가난한 나라를 자주 갑니다. 네팔에 가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네팔에 가보면 아시겠지만 힌두교 나라고 불교가 시작된 나라입니다. 기독교가 1%입니다. 가난하고 병들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들어 본 적이 없는 복음의 불모지입니다. 제가 가서 무엇을 느꼈냐면 내가 이들에게 복음 전할 때가 너무 많구나. 이 복음을 말해야 할 곳이 너무 많구나. 하나님이 나를 이 복음 전하려고 부르셨구나. 가슴이 뜁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면 교회에 모여서 교회가 부흥하고 한국의 수준 높은 시스템이나 프로그램만 연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너무 많이 느낍니다.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발전된 상황 속에서 이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까먹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흘러갑니다.

 

. 나 중심인가? 하나님의 중심인가?

 

- 두 번째 나타나실 때를 바라며 사는 자.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_히브리서9:7-12,24-28‘

 

대속죄제는 일 년에 한 번씩 매번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번에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늘로 바로 가셨습니다. 그 말은 우리의 죄를 끝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끝내버리셨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_히브리서10:32-39’

 

우리가 십자가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가는데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믿음으로요. 다시 말해 우리가 싸울 것은 순수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 십자가의 보혈. 이것을 지키는 싸움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 이것이 우리의 자녀를 구원하고 이것이 이 땅을 구원하고 이것이 복음의 불모지를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이 하시는 구속사의 열쇠이기 때문에 이것을 지키는 싸움. 이것 때문에 담대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소유를 빼앗기기도 하지만 괜찮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알지 않느냐. 영구한 소유가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고 거기에 하늘의 상금이 있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저는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상금 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의의 면류관을 받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상금을 받고 싶습니다. 이것이 영혼 구원입니다. 그래서 네팔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러 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발전된 교회 시스템, 문화, 프로그램에 속지 않으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내가 복음으로 충만할 때, 내가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가 충만 할 때에 내 안에 있는 복음을 말하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내 안의 은혜가 충만하지 많으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은혜를 받고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와 가까이 하고 있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규례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일도 하지 말고 너를 부정하고 금식하면서 이 은혜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레위기 말씀이 율법인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아니고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살면서 이것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우리가 구원받을 길이 없고 이것이 아니면 우리 가족을 살릴 길이 없으니까 이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고 교회도 부흥하니 깜박 속습니다. 네팔 한번 가보세요. 복음이 없는 불모지에 가보세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눈물이 나올 것입니다.

 

- 다른 복음을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_갈라디아서1:6-10’

 

초대교회가 부흥했습니다. 교회 시스템도 생겼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이 무엇을 하기 시작했나요? 예수님이 누구신지 신학이 발전하고 철학이 발전하고 파기 시작했습니다. 전략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영지주의 이런 것들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맞느냐. 틀리냐. 원래는 이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원래는 성령충만 해서 복음 전하는데 희생하고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에 이익이 있을까 없을까 생각합니다. 복음을 전했을 때에 내 입장이 어떻게 될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데 관심 없고 내 입장이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내가 만일 사람들의 기쁨이 구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 복음을 믿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_이사야55:3-9’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 주시고 십자가의 복음을 먼저 깨닫게 하시고 언약을 주시고 은혜를 주셨는데 이 은혜를 주신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시겠다고 합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고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흥을 꿈꾸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나라를 우리에게 붙이시겠다고 합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붙이시겠다고 합니다. 5절에 그가, 그 나라가, 그 사람이 너를 영화롭게 하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내가 전한 복음으로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 이것이 천국에 가서 유일하게 상금을 받을 기회. 유일한 면류관의 이유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이렇게 살았는데 이런 모양으로 살았는데 이런 것을 하나님이 보시지 않습니다. 내가 증인이 되어서 열방에서 오는 나라들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런 증인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 하나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런 삶이 얼마나 힘든 줄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다.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다. 네가 주일에, 안식일에 일을 안 하고 네 자아를 부인하고 사는 것이 실패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너를 강하게 붙잡겠다. 내가 너를 불꽃같은 눈동자를 너를 지키겠다. 너를 보호하겠다. 너를 책임지겠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복음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요. 내가 복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신앙은 넘어짐과 일어섬의 반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수도 없이 넘어집니다.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데 넘어짐이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언제 일어설 수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장치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대 속죄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붙잡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실수하고 어렵고 힘들어도 교회에서 바닥에서 주님을 부르면 다 회복이 되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건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복음이 기쁨이 되니까 그 문제를 넉넉히 지나가게 됩니다. 주님 하면 끝납니다.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을 왜 주셨을까요? 우리가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를 소홀히 여기나요? 그런데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는 것을 소홀히 여기나요? 예수님 붙잡는 것을 소홀히 여기나요? 규례로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을 붙잡지 낳으면 백성에서 끊어버릴 것이다. 얼마나 사랑하시면, 얼마나 끔찍이 아끼시면. 십자가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어설 수 있는 장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붙잡으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간격이 처음에는 넓지만 점차 줄어듭니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믿음이 자랄수록 넘어지고 일어섬의 간격이 줄어듭니다. 이것이 진짜 힘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바리새인처럼 교만하게 남에게 보이려고 껍데기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힘 있는 신앙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다시 회복하고 또 일어나고 또 회복하고. 이것이 진짜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은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문의 / 윤덕현 전도사 010.9899.3951

 

'주일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05-24 주일예배  (0) 2020.05.24
2020-05-17 주일예배  (1) 2020.05.17
2020-05-03 주일예배  (0) 2020.05.03
2020-04-26 주일예배  (0) 2020.04.26
2020-04-19 주일예배  (0) 2020.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