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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05-31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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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31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언제까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척 할 것인가

본 문 :

레위기24:5-9

오승주 목사

 

. 요람을 찢고 나와야 할 때_골로새서3:15-17, 잠언3:13-15

 

신앙은 요람을 찢고 나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은 요람을 찢고 나올 때 성장하게 됩니다. 요람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상처일 수 있겠고 내 영적인 배경일 수 있겠고 입고 있는 나의 옷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외적인 상황들이 요람일 수 있습니다.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제 가정은 불신가정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에 예수님을 처음 믿은 것이 누나들이 광주로 저를 전학시켜서 부모님 밑에서 살지 않고 도시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불러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어머니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니 토요일마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갔습니다. 가서 일을 도와드렸습니다. 논도 갈고 비닐도 치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에 은혜를 받았는데 제 마음에 가슴이 벅찬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크셨습니다. 크신 하나님으로 내 인생에 다가왔습니다. 천국이 믿어지니 부모님을 예수님 믿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슨 갈등이 생겼냐면 주일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학교 끝나고 시골에 가서 일 도와드리는 것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토요일에 내려갔다가 주일 새벽에 올라오기도 하였습니다. 문제는 아버지가 계실 때인데 아버지는 폭언과 폭력이 심하셨습니다. 집에도 잘 안계시면서 아버지께 토요일에 가서 도와 드리고 주일에 교회를 갈 때 공부하러 간다고 하면 못마땅하셨습니다. 한 번은 광주에서 버스타고 시골에 내려가는데 제 마음이 너무 벅찼습니다. 한번은 내려가서 교회를 다닌다고 아버지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앞에 서면 무서워서 바르르 떨었습니다. 그 날은 아버지께 가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교회를 다닌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그 때가 저에게는 가정의 요람을 찢고 나오는 때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보다 하나님이 훨씬 더 크고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희 부모님을 구원하고 가정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배를 드려야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더 큰 것이 있었기 때문에 작은 요람을 찍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전라도 출신입니다. 저의 색깔, 사상, 저와 상관없이 생겨난 요람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유 없이 고 김대중 대통령을 투표하고 지지하고 민주당을 찍었습니다. 제가 어느 날 의문이 생겼습니다. 저는 전라도를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그 사람들의 특성, 그 속에서 자란 저의 색깔들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벗어나는데 헷갈린 것은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는 것도 있어서 헷갈렸지만 우리나라 역사, 정치에 관한 책들을 수십 권 책을 사서 읽고 좋은 친구들, 대구에 있는 친구, 서울에 있는 친구, 타 지역에 있는 친구들과 교류를 하고 교제를 하면서 장로님들의 도움도 받고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요람에서 벗어났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을 상징합니다. 제가 성경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렸습니다. 상처와 그릇된 배경이 아닌 깨끗하게 객관적으로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요람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이 상처는 평상시에는 숨겨져 있지만 무언가와 작용을 하면 이 상처는 작용을 해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것들이 우리를 갑옷처럼 옮아 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요람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어떤 영적인 배경일 수 있습니다. 벗어나지 못하면 아버지 밑에서 가정이라는 영적인 배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저는 평생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전달하는 목회자가 아닌 특별한 지역 색을 가진 편협 된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람을 찢고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고 가르쳐주셔서 이루는 일에 사용하시려 합니다. 신앙뿐 아니라 우리인생에게도 도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요람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무언가를 찢고 나왔을 때의 내 모습을 직면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신앙은 이 요람을 찢고 나올 때가 있어야 합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요람을 찢고 나올 때에 신앙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언제 요람을 찢고 나올 수 있을까요? 크신 하나님을 경험할 때입니다. 내가 지금 요람 안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더 크신 뜻이 있다는 것이 발견할 때입니다. 신앙의 위인들, 믿음의 선배들이 왜 죽음 앞에서, 수많은 핍박 앞에서 요람을 찢고 안정감을 뒤로 하고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었냐면 하나님의 뜻이 그들 가슴에 훨씬 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훨씬 더 컸던 것입니다. 저에게 천국은, 고등학교 때 만난 천국은 어마어마 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판단하였습니다. 내가 시골집에 가서 일을 도와드리지 못하면 당장은 실망하시겠지만 내가 예배드리는 것이 실망스럽겠지만 내가 예배를 드려서 내 삶이 변화되고 힘을 얻어야 우리 가족을 구원 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언가 큰 것을 보고 발견하면 우리는 요람을 찢고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용기 내보자 힘을 내보자 여기에서 벗어나보자 가 아닙니다. 신앙은 이 요람을 찢고 나올 때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요람에서 찢고 나와야 하나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_골로새서3:15-17’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 우리는 요람 찢고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_잠언3:13-15’

 

이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영적인 것을 아는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무엇으로만 알 수 있나요? 말씀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신앙은 요람을 깨고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하늘에서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면 절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할 때 우리의 삶이 보이고 우리의 요람들이 보이고 우리의 연약함이 보이고 우리의 교만함이 보이고 요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배경을 가지고 진설병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지난주에 말씀 나눈 빛이나 떡이나 다 예수님을 상징하긴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 진설병의 의미들

 

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떡 열두 개를 굽되 각 덩이를 십분의 이 에바로 하여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_레위기24:5-6’

 

어떤 상황이냐면 24시간 불을 밝히는 성소 안에서 순결한 떡 상이 있습니다. 떡을 올려놓을 떡 상이 여호와 앞에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떡 상이 순결하다고 하나님이 거룩한 떡 상이라고 정해놓으셨습니다. 여기에는 고운 가루를 빻아 그것을 불로 구운 진설이라는 떡을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올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을 아무나 먹으면 되나요? 큰일 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것을 먹어서 죽었습니다. 고운 가루를 불로 구워서 올려놓아야 합니다.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각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_레위기24:7’

 

정결한 유향을 두라는 것입니다. 유향은 향기를 내는 것입니다.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_레위기24:8’

 

안식일마다, 지금으로 말하면 주일마다 여호와께 예배하는 그 날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6일마다를 지금으로 해석하면 주일마다 이 떡을 체인지하는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떡을 진설해두고 안식일에 와서 이 떡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떡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올려놓은 떡은 어떻게 썼을까요?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_레위기24:9’

 

진설하는 이유에 대해서 8절에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2덩이를 하나님 앞에 거룩한 떡 상 위에 올려놓는 것이 무슨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냐 무슨 영원한 언약이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먼저 성막 안에 성소가 있었는데 성소 안에는 3가지가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분향단이 있었습니다. 분향단은 피를 뿌리는 곳 피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등잔대가 있습니다. 붉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떡 상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성소 자체를 예수님이라고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소 문 자체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을 만 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과해야 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번제단은 피 제사를 드리는 곳이고 번제단 옆에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몸을 씻는 것입니다. 물두멍을 통과해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은 무슨 실로 만들었냐면 청색 실, 자색 실, 홍색 실로 만들었습니다.. 청색 실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색이나 숫자는 많은 장치가 있는 것인데 청색 실은 생명을 상징하고 자색 실은 권위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통과하면 우리는 생명을 얻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위와 영광을 얻습니다. 홍색 실은 보혈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중에 하나가 떡 상입니다. 고운 가루로 12개를 구워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12개는 12지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해서 한 공동체로 사역하도록 두지 않고 한 공동체를 12지파로 나누셨습니다. 그 말은 조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양육하고 전달하고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각자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맡아야 할 땅, 정복해야 할 땅, 경작해야 할 땅을 분배하기 위해서 12지파로 나누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는 땅을 받지 못했습니다. 11지파로부터 식량을 얻고 도움을 받아 전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섬기는 것을 담당했습니다. 12지파는 각자 지파만의 땅을, 기업을 물러 받았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이 12지파입니다. 그런 의미를 어디다가 어떻게 적용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이 12지파는, 12개의 떡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합니다. 이것을 진설했다. 고운 가루로 빻아 불로 구워서 진설했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복음에 와서 예수님께서 이 떡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 언제까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척 할 것인가

신앙생활의 4가지 기준 : 영원, 도덕, 책임 그리고 사랑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_요한복음6:26-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_요한복음6: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_요한복음6:43’

 

우리가 왜 수군거리나요? 정확히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니까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수군거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_요한복음6:44’

 

다시 말해 예수님께 오면 살리신다고 합니다. 수군거리고 있으면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저 사람이 누구야? 저 사람한테 가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어? 저 사람에게 가면 우리가 부자가 될 수 있어? 저 사람에게 가면 우리가 축복받을 수 있어? 수군거리는 동안에 누구는 갈 수 있나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은 예수님께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간 사람은 산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_요한복음6:45,47-48’

 

이 떡,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디 위에다가 올려놓았냐면 하나님 앞에 순결한 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떡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떡이 아니고서는 여호와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다, 천국에 입성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저는 위험한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값싼 구원론인데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급할 때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길을 설명하고 예수님을 설명하기 좋은 책자입니다. 구원의 길 같은 것입니다. 놀이터 같은 곳에서 구원의 길을 말해주고 나를 따라하면 너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표현을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전도의 자료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때 그 사람이 과연 예수님을 알고 있을까? 그 분이, 그 아이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고 영접했을까요? 아닌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과연 그 사람은 구원받았을까요? 과연 그의 인생은 변화되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더욱 알려고 노력하고 믿음의 길을 가고 있을까요? 아닌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 이 떡을 순결한 상 위에 두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저와 여러분인데 우리가 이 순결한 상 위에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덕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떡을 먹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떡을 먹지 않고는 주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영원히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나요? 예수님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고 이것을 먹는다는 표현을 요한복음 6장에 무엇이라고 적혀있습니까?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그러면서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믿음, 믿는다, 구원 받는다 이 표현은 요한복음에 정확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먹어야 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야 하는데 이것이 아버지의 가르치심을 받는 것입니다. 듣고 배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나요? 신앙은 듣고 배움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얼마나 듣고 배우고 계시나요?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듣고 배우고 계십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가르치심 속에 있나요? 그리고 한국교회를 보세요. 그리고 우리의 삶을 보세요. 끔찍하죠? 엄청나게 끔찍합니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배우지 않습니다. 수군거립니다. 그러면 영생과 상관이 없습니다. 아버지 앞에 가야 아버지 순결한 떡 상 위에 우리의 인생이 올라가야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은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식 때 그냥 읽어드리는 성경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거하시니. 예수님이 우리와 동행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성경을 자세히 보았더니 그것이 무엇이냐면 성경입니다.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가르쳐주신 것을 이해하고 깨달을 때 가슴에 벅차고 크게 믿음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 인간 세상에서의 요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면 12덩이의 떡은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저와 여러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_레위기24:9’

 

이 진설병을 7일 동안 올려놓으면 딱딱해집니다. 이 떡에 첨가물을 넣지 않기에 상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딱딱해진 떡을 제사장 가문에게만 줍니다. 제사장 가문만 먹을 수 있습니다. 또 이 제사장의 가문도 이것을 집에 들고 가서 다른 사람과 나눠먹으면 죽습니다. 즉사합니다. 거룩한 곳에서만 먹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거룩한 곳은 성막 안에 성전 뜰이 있습니다. 이곳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주일날 안식일에 체인지하면 그 체인지 된 것을 그날 안식일 날에 거기서 먹는 것입니다. 오늘 날 저와 여러분은 만인 제사장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제사장입니다. 이 떡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이 떡을 먹는다는 표현은 예수님을 먹는다는 표현인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동행해야 우리도 산 떡이 되고 거룩한 생명의 떡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떡이 되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왜 교회는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하고 생명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까? 그래야 두 자녀를 죽이고 자기 목숨도 잃은 그런 사람들에게 떡을 나눠줄 수 있습니다. 네팔에 복음이 없어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 예수님을 전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교육 받는데 어떤 분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전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내 안에 예수님으로 기쁨이 넘치면 예수님이 충만하면 그 예수님을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옆에 고통스러운 부모님이 계셨는데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엄마가 평생을 고생만하셨는데 예수님을 믿었으면 좋겠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너무 좋으니까 어머니께 성경 읽고 듣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떡을 먹지 않으면 나눠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의 거룩한 떡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떡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자아, 자신이라는 단어로 치환된 것들이 쏟아집니다. 자신, 자아라는 표현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자신에게 우리가 함몰되어 그 요람에 갇혀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객관적 진리와 접촉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이 성경 속에 진리, 객관적인 진리, 누구나 들으면 살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놀라운 성경 속 구원의 진리를 인간만 접촉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하나님께 얻었습니다. 그런데 진리와 접촉할 시간도 없이 자기 자신에게 함몰되어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분위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국 하나님 앞에 섭니다. 자기 자신이 무슨 메달을 땄는지 자기 자신에게 함몰되어 삽니다. 그러나 인생이 끝마칠 때 우리에서 수확한 메달들, 업적들 다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 때 남겨질 유일한 한 가지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여기실 것인가? 입니다. 끝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승주를 어떻게 여기실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준,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잘 살았어, 나는 사역을 잘했어, 나는 전도를 많이 했어, 나는 이런 삶을 살았어라고 자화자찬하지만 우리의 관점은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여기시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4가지 기준이 있는데 첫 번째가 영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영원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내세가 있다는 사실도 성경과 설교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내세가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고 알게 되니 내 삶의 기준도 바뀌었습니다. 변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은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타락해가며 아파갑니다. 우리가 새롭게 될 수 있는 것은 내세를 깨닫는 것입니다. 영원과 접촉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세가 있을까요? 천국과 지옥이 진짜 있나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여 달을 걸었던 우주의 비행사가 있습니다. 그들이 달에 내려서 지구를 보니 싸우고 전쟁 일어나고 서로 죽이는 지구였는데 그 지구를 보니 두 가지 색깔만 보였다고 합니다. 파란색, 푸른색. 산과 바다밖에 안 보이더라고 합니다. 얼마나 경이롭겠습니까. 그리고 우주를 보니 우주가 너무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가 창세기1:1을 읽었다고 합니다. 이 우주를 조성하신 분이 하나님 밖에 없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도저히 이 우주를 조성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구에부터 가져간 자기 주머니에서 빵 한 조각, 포도주를 각자 꺼내서 성찬식을 했다고 합니다.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영원과 접촉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자주 있을수록 영원에 대해서 가까워집니다.

두 번째는 도덕입니다. 세상은 도덕에 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도덕은 무엇이나요? 선하다. 악하다하는 기준입니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이것이 도덕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개념이 웃깁니다. 다 수평적인 도덕의 개념이 세상의 도덕인데 이것이 어느 나라에서 좋은 것이지만 다른 문화로 가져가면 악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일본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천왕에게 열광했을 것입니다. 조선 땅도 만주 벌판도 우리나라가 되니 천왕 최고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말하는 도덕이 우리나라에는 최악입니다. 우리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겨주었습니다. 도덕이라는 것, 세상의 도덕법이라는 것은 여기에서는 맞을 수 있지만 다른 시대나 지역에 가면 틀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세상적인 도덕이 아니라 성경 속 도덕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속 도덕은 위와 아래의 개념입니다. 수직적인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정확히 알고 계셔야 합니다. 세상적인 도덕적 개념으로 악한 우리를 선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우리를 살리려 오셨습니다. 죽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세상의 도덕법을 가지고 교회들이 혼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책임입니다. 세상은 책임을 묻습니다. 남편이 잘못했잖아. 아내가 잘못했잖아. 아빠, 엄마가 잘못했잖아요. 아들, 딸 너희들이 잘못했잖아. 그가 잘못했잖아. 그들이 잘못했잖아.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문제의 핵심은 바로 내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울을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을 말씀에 비춰서 마음을 드려다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내 자신을 보길 원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보고 하나님의 역할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에서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기준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 병든 자와 버려진 자들에게 가셨습니다. 그들과 악수하고 먹고 자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대인들은 그들이 더럽다고 상종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셨습니다. 우리가 왜 네팔에 가야 하나요? 왜 병든 이웃들을 찾아가야 하나요?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런 자가 아니었는가요? 영적으로 그 사랑을 잊어버리고 교만하게 사는 어느 순간부터 십자가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그들에게 그 사랑이 흘러가야 하는데 고여 있고 소멸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이 마음에서 멀어져 가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도 멀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가깝게는 믿지 않는 가족들과 이웃들을 사랑해야 하며 멀리는 한 나라, 한 부족, 한 영혼을 사랑해야합니다. 그 마음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다 잃어버린 것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요람을 찢고 나올 수 있는 신앙의 객관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여기실 것인가? 우리가 진리를 맛보고 예수님이라는 떡을 먹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 세상의 생명의 떡을 살아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내 요람에 빠져 상처에 빠져 사상과 상황에 빠져서 세상의 도덕, 세상의 책임, 영원이 아닌 이 땅의 유한한 것들, 사랑이 아닌 다른 것들, 진리와 분노로 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크리스천이 되어버립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척하고 할 것인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이라는 떡을 늘 먹어야 합니다. 어떻게 먹나요?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마다 새 것으로 진설하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일이 있습니다. 예배에 나온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느끼실지 모르지만 제가 조금씩 바꿔가는 것이 무엇이냐면 저는 저희 주일 예배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바뀌었습니다. 다른 교회들하고 다릅니다. 그러나 더 달라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은 없지만 문화는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모이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성경 읽고 성경 가르치고 성경 해석해주고 일주일동안 읽었던 성경 궁금한 것 물어보고 답변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살았던 일주일간의 삶을 서로 은혜를 나눕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안식일입니다. 여러분, 교회 와서 주일에 우리는 뭐하고 있나요? 우리는 솔직히 일주일동안 사업하고 직장생활하고 집에서 밥하고 아이들 키우다보면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주일은 그런 시간이어야 합니다.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데 여러분, 교회에 1시간 일찍 오셔서 성경 읽으세요. 집에서 성경이 읽어지나요? 그래서 주일에 모든 성도들과 성경을 같이 읽고 모르면 장로님께, 교역자에게 물어보고 서로 나누고 내 안에 빛이 비추도록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었을 때에 요람을 깨고 나오는 은혜를 서로 나누게 되면 신앙의 깨달음이 깊어져 가고 예수님에 대한 앎이 깊어지게 됩니다. 이 백성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했다. 라는 말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지식적인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일이면 성경으로 우리를 충만히 먹고 보혈의 은혜를 마시고 예배드릴 때 뜨겁게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충만함으로 세상에 떡으로, 세상에 빛으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우리가 일주일을 살아가는 신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일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나요? 주일 하루라도 가족이 함께 성경 읽고 묵상하고 은혜를 나누고 일주일 동안 고단했던 삶을 말씀으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른척하고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언제 알 수 있나요? 예수님과 가까워질 때,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올 때, 빛이 밝히고 생명의 떡을 먹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사로 그리스도의 자녀로 동행하기 때문에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문의 / 윤덕현 전도사 010.9899.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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