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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06-28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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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8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본 문 :

레위기26:1-13

오승주 목사

 

.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레위기 26장은 하나님이 그동안 우리에게 주시는 율법, 계명, 약속들에 관한 상과 벌에 관한 내용입니다. 상에 대한 내용은 짧고 다음 주에 나누게 될 벌에 관한 내용은 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레위기를 살펴보면서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광야에서 훈련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는 여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것은 신앙입니다. 신앙은 잃어버렸던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원래 인간은 신앙체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로 창조가 되었는데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되고 하나님이 부재하게 되고 그래서 신앙을 잃어버린 상태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에게 신앙을 다시 회복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것은 외우시고 암기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신앙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중심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써도 되고, 우리 삶의 기둥 같은 역할, 축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중심에 신앙이 있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신앙이 삶의 중심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주일을 지키고 주일에 예배를 지키고 사는 것? 일주일에 교회를 하루 가는 것이 우리의 중심에 신앙이 있는 것인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규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주일을 잘 지키고 헌금도 잘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봤을 때 하나님이 꼭 그것만을 기쁘게 생각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일이 중요하지만 주일에 교회를 빼먹지 않고 간다는 것이 우리의 중심에 신앙이 있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앙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제가 아는 한 분이 작년 여름이 지나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 분을 만나 뵙게 되었는데 주일에 교회를 가지 못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분 이었습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고 주일에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찬양팀도 하였는데 어쩌다 보니 직업이 주일에 쉬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만나는 날이 월요일이었는데 주일에 교회를 가지 못하고 월요일에 정기적으로 쉰다고 했습니다. 왜 저를 부르셨냐고 했더니 자신의 신앙의 이야기, 신앙고백을 저에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주일에 교회를 가지 못하니까 처음에는 교회 가게 해주세요 기도하고 직업을 바꿔야 하나 자포자기하며 그냥 주일에 일하고 목사님 설교영상을 보고 쉬는 날에는 그냥 쉬면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듣다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일에 쉬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를 가서 봉사도 하고 은혜도 받고 교제도 하는데 본인은 월요일에 쉬는데 이 시간을 그냥 보내서는 안되겠다, 갱신해야겠다, 결단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쉬는 날이 월요일이니까 자신에게 월요일이 주일이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고 할게 없었는데 평상시에 가스펠편지를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 분에게 월요일이 주일이기에 어려운 후배들, 친구들을 불러서 밥을 먹이고 대화하는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문제, 어려움을 발견하게 되어 저를 불렀다고 합니다. 제가 한 달에 한 두 번씩 가는데 그렇게 만나서 예수님을 만나고 교회를 연결하게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분의 신앙이 굉장히 독특합니다. 제가 느낄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을 해보니 그분의 삶의 중심에 신앙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이 삶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도 살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직장을 가면 나머지의 날은 똑같이 살며 놀고 쉬곤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쉬는 날은 주일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하며 가끔 교회에 가서 봉사도 한다고 합니다. 저도 이 분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그분의 삶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구나. 사실 우리는 코로나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는 어려움의 반복입니다. 문제, 환경, 어떤 상황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는게 인생입니다. 이 문제 해결하면 저 문제가 나타납니다. 하나님 이번만 잘 넘어가고 이번만 응답해주시면 평생 주님께 헌신봉사를 하겠다고 하지만 또 새로운 문제가 나타납니다. 세상이 이런 곳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데 신앙이 우리의 중심에 있지 않으면 대부분 문제, 환경, 상황에 따라서 신앙도 흘러가버린다고 히브리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돛을 내리지 않는 배처럼 물길 따라 흘러가버립니다. 우리는 무엇을 싸워야 하냐면 신앙이 중심에 있도록 믿음의 도전을 해야 하고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악한 영들, 마귀와 싸우려고 하는데 우리가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나요? 악한 영들이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싸울 수 있나요? 사실은 신앙이 우리의 중심에 있으면 악한 영들은 우리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신앙이 우리의 중심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축복인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이 여기 있다든지, 저기 있다든지, 취미생활처럼 있다든지 그러면 늘 상황이나 환경에 휩쓸려서 살아가며 변화가 없는 신앙의 열매를 맛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죄에서 종노릇하는 우리를 건지셔서 더 이상 종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13절의 말씀처럼 죄의 멍에, 종의 멍에를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_레위기26:13’

더 이상 종처럼 살지 말고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지 말고 자유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이 아시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우리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 삶에 중심에 있는 것.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_신명기6:4-5’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주신 율법이 있습니다.

.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_레위기26:1

첫 번째 요구하신 것이 우상을 절대로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을 조각하고 석상을 만들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이 당시 돌로 만든 우상은 최고의 우상이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우상이 없습니다. 사이비 단체들도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청담동에 있는 점쟁이 집을 보게 되었는데 완전 최첨단이었습니다. 보통 점쟁이 집은 다양한 그림들이 붙여져 있는데 여기는 입구에서부터 정장 입은 아가씨들이 있으며 예약을 다 받고 점쟁이가 양복입고 아이패드를 들고 점을 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무언가를 만들어서 섬기는 것은 레위기 기록당시의 우상이지만 지금의 우리의 우상은 하나님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물질이나 명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물질이나 명예나 우리가 섬기는 그것들은 어디서 나오나요? 하나님이 부재한 곳에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삶에 하나님이 부재하시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인간은 자동적으로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우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만드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밖에 형상을 만들지만 왜 그 형상들이 강력하냐면 사람들의 마음 속,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이기에 별거 아닌 나무이지만 강력합니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나무로 만든 신들을 비웃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절대시하고 섬기기 때문에 강력합니다. , 명예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재한 곳에 무언가를 채우고 대신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니라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창조주이고 내가 너희를 구원한 하나님인데 우상을 만들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_레위기26:2

두 번째 주신 계명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안식일은 인간의 안식일이 아닌 하나님의 안식일입니다. 인간이 쉬려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왜 독사의 자식들아 난 너희들의 기도를 들은 적도 없고 너희들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하셨냐면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안식일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기획할 때 사람이 원하는 예배를 기획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성경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구원의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나를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높였을 때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축복하셔서 그것이 나를 위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일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만든 안식일은 진정한 안식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안식일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내 성소를 경외하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은 일주일에 하루입니다. 내 성소에서 경외하라는 것을 신약으로 번역을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강력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말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우상을 섬길 것을 아시고 또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놓쳤을 때 반드시 죄악에, 세상의 유혹에 침범을 당할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라는 율법, 규례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 삶에 놀라운 일들을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우리 삶에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생활을 하면 희열과 기쁨,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적들, 놀라운 일들이 우리 삶에 연속적으로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맛보지 못할까요? 신앙이 삶의 중심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라_레위기26:3-13

너희가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4절부터 13절까지 축복, 상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규례와 계명을 준행한다는 것이 율법 같고 구속된 것 같고 속박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상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상일까요? 땅이 소산물을 내고 나무가 열매를 맺게 되는 축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왜 축복인가요? 소산물을 내지 못하고 있는 땅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 보면 땅이 소산물을 내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며 심지어 물을 먹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물을 먹는데 물속에 좋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물을 먹고 죽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물을 먹지 않으면 목이 말라서 죽고, 마시며 오염 되서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NGO단체들이 물을 공급하고 지하수를 파고 많은 사역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저주받은 땅입니다. 땅이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인가요?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는 우상이 가득합니다. 땅이 소산물을 내고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심지어는 원수를 쫓아주고 안전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나무의 열매가 포도를 딸 때까지, 포도를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굶지 않고 살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번성하게 하시고 창대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약속입니다. 원래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원래 인간이 이 땅을 정복하고 번성하고 이 땅을 잘 다스리는 축복된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서 이 땅까지 재앙을 받고 오염이 되었습니다.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이것을 다시 회복시켜주시겠다고 하십니다. 10절을 보면 오래 묵은 곡식은 새 곡식으로 말미암아 치우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늘 새로운 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1절에서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싫어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죄인과 함께 하실 수 없으십니다. 벌을 받아야 하는데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성막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싫어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이 성막이 무엇인가요? 성막은 예수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한 가운데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의 삶 중심에 성막이 있나요? 예수님이 거하시나요? 예수님이 계시나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_레위기26:13’

26장의 축복을 받기 위한 조건은 규례와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규례와 계명을 지키는 것은 좀 그런가요? 한빈이가 5살이 되어 유치원을 다니는데 유치원에서 안 좋은 것을 배워옵니다. 제가 평상시에는 친구처럼 지내다가 한빈이에게 친구들을 못되게 하고 괴롭히는 것을 정말 싫어하며 그것을 알게 되면 몇 배로 혼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한빈이와 저와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한빈이가 무언가를 했을 때 반드시 상을 줍니다. 약속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아들이 바르게 서서 바른 사람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인물로 자라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위해선 교육하는 과정에 상과 벌이 있어야 합니다. 상과 벌을 규례와 계명을 통해서 줍니다. 인간답게 살도록 교육을 하는데 규례와 계명이 있어야 합니다. 교육이 없고 규례와 계명이 없으면 그냥 세상 문화에 휩쓸려서 이상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마음대로 살면 이상한 친구들을 만나고 이상한 짓을 배워오고 인생이 황폐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규율과 계명이 필요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멍에를 메고 계속 살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르게 서서 올바르게 걷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아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우리에게 규례와 계명을 주십니다. 그것이 우상을 섬기지 말아라, 안식일을 지켜라, 내 성소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규례와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축복하시고 너희를 짐승들에게서, 원수들에게서 안전히 지키시며 백 명으로 오만 명을 무찌를 수 있고 오 만 명이 백만 명을 무찌를 수 있게 힘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함께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시며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새 음식을 계속 공급해주기 때문에 굶지 않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규례와 계명에 관심이 없습니다. 주일에 교회 와서 설교를 듣고도 그냥 교회에 갔다 왔어로 끝나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성경읽기를 많이 강조하고 있기에 설교에 대해서 강조를 하지 않지만 사실 교회의 성도라면 설교를 듣고 이 말씀을 내 삶의 중심으로 끌고 와야 합니다. 그것이 묵상이고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중심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 이해도 되야 하고 깨달음도 있어야 하고 말씀이 묵상도 되어야합니다. 이 말씀이 내 중심에 있어야 일주일을 살면서 사건을 만나든 사람을 만나든 어떤 상황을 처리하든 말씀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주일에 교회를 갔다 오면 끝나게 됩니다. 이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삶의 중심에 오도록 하지 않습니다. 주일설교는 최소 주중에 1-2번은 들으셔야 합니다. 이해되고 깨달아질 때까지 들으셔야 합니다. 도구가 묵상이고 기도입니다. 왜 묵상을 하나요? 중심으로 가지고 오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지혜를 주세요, 이 말씀이 내 삶의 중심에 있도록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변화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규례와 계명이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새로워지고 변화 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맛보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규례와 계명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상을 섬기든 말든, 지키든 말든 관심이 없습니다. 신앙이 내 삶의 중심에 있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숙시켜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훈련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저 가나안 땅에 가서 농사를 짓고 성전도 짓고 도시도 만들고 잘 먹고 살도록 애굽에서 고생을 시키며 가르쳐가시면서 훈련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하시려고 하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나 다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 전도자, 지도자, 목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동물들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명이 무엇인가요? 그런데 사람들은 사명을 오해합니다. 어떻게 오해하냐면 내가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해주는 것, 교회의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했다면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해주는 건가요? 내가 시간도 남고 여유도 되고 실력도 되기에 해주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사명은 구원 받은 우리가 똑바로 서서 걷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일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성숙하게 하시고 우리가 똑바로 서서 걷도록 주시는 과정 인 것입니다. 이 사명은 정말 놀랍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가치를 판단하실 때 보는 것이 사명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가치를 판단하실 사명

하나님은 우리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상은 우리의 사명을 보십니다. 우리가 나중에 면류관을 받고 하늘로부터 상급을 받는 것, 다 사명으로 받습니다. 사명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평가하실 때 보시는 기준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치를 그것으로 판단합니다. 사명은 정말 중요합니다. 사명이 플랑카드를 걸어놓고 목사의 비전과 목적을 위해서 헌금하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교회가 흘러갔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사명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우리는 자꾸 외부의 것들과 싸우려고 합니다. 마귀, 귀신, 악한 영들과 싸우려고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단절하는 존재들과 싸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귀와 싸울 수 있나요? 이길 수 있나요? 유혹을 견딜 수 있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방법이 우리 삶의 중심에 신앙을 가지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마귀는 건들지 못합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방법은 우리의 속사람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문제, 환경, 상황을 가지고 싸우지만 사실은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이런 것을 마주하게 합니다. 내 속에 죄가 있으면 문제, 상황, 환경이 접촉이 있어납니다. 반대로 내 속에 신앙이 있고, 구원의 감사와 감격, 예수님고 동행하는 것이 내 속에 있으면 문제와 상황, 환경이 있어도 관심이 없어지고 지나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속사람, 신앙에 집중하라는 것 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_시편1:1-3’

오랜 세월이 지나고 다윗이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인구조사를 하고 강대한 나라도 만들고 성전을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인줄 알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보니까 아주 사소한 것에 무너졌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있고 자신도 모르게 죄인들의 길에 서 있고 자신도 모르게 오만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구조사를 하고 여인을 침범하고 악한 권모술수를 사용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다윗은 인생의 노년에 깨달았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이 값지게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내가 밖으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 속에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 거기서 나타나는 선한 영향력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큰 인물들은 교회를 세우기도 하고 대학교를 세우기도 하고 한 나라를 살리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이야기하는 사명은 많이 오해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전에 주신 규례와 규율들이 전부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것 다 사명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_요한복음1:14-16’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표현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이것이 중심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지 못할까요? 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보며 새사람으로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냐면 우리 가운데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적이 누구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주민들 죽이고 우상 섬기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놀랍게도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우상이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하는 것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 자신들의 욕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순간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게 되었고 죄인들의 길에 서게 되었고, 악인들의 꾀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사랑의 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율법이라고 하면서 하찮게 여깁니다. 이것은 마치 자녀들에게 교육 안 해도 된다, 너 알아서 살아라, 나쁜 친구들 만나라, 나쁜 것들 배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율법들을 한 가지로 통일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내 삶의 중심에 죄가 있으면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 속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거하시는 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교회와 가까이 살아서 자주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옆에 살면 신앙이 좋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어떤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냐, 그렇지 않느냐 이것이 우리가 싸워야 할 강력한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는 매일 마귀 물러가라, 집안에 역사하는 흑암이 물러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맞지만 또다시 찾아옵니다. 사람 정죄하고 더럽다하고 마귀 물러가라고 하지만 마귀가 물러가지 않습니다. 내 속에 죄가 가득하고 우상이 있고 다른 것이 있기에 계속 마귀가 찾아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속사람을 위한 싸움입니다. 내 중심에 온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얼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삶은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기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움의 연속을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놀라움을 매일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_요한복음15:10-19

하나님이 이 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켜서 우리 속에 베푸시는 놀라운 기적과 역사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벌어지는 응답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랑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우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세상 사람들을 정죄했던 마음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했던 사람이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에게 벌어질 기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 때는 이웃나라에게 제사장 나라가 되고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축복된 민족이 되었지만 우상을 섬겼을 때는 바벨론에 포로가 되고 피해를 끼치는 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계명을 다 통합하셔서 두 가지로 정리하셨습니다.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해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저주가 아닌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혼을 사랑해보지 않는 것은 가장 큰 저주입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불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보지 않고 이웃을 사랑해 본적이 없이 신앙생활을 마감한다는 것은 저주 아닌가요? 영혼을 사랑해보지 않고 인생이 끝나면 정말 슬플 것입니다. 사사기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중세시대의 교회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그것인데 그것을 위해서 신앙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을 도전해야 하고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신앙의 중심에 있으면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서론에 이야기를 드렸던 그 분처럼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영향을 끼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교회를 못가서 불평하고 짜증내고 교회를 가니 안가니 하는 동안에 그분은 삶의 중심에 신앙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제사장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똑바로 서서 걷기를 원하십니다. 똑바로 서서 걷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들도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간절히 간구하고 기도해서 우리가 그냥 신앙생활을 대충하다가, 우상 섬겼다가, 짜증냈다가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맛보게 하실 영광을 맛보길 원합니다. 우리가 똑바로 서서 걸을 때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어야지 우리 가정, 직장에서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새 사람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 선교는 내가 새사람으로 변화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경배할 때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을 주셨습니다. 열방에서 아들, 딸들이 오게 하셨습니다. 이웃나라들이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우리 속은 썩고 부패하고 온갖 악한 죄가 가득하고 이기심이 가득한데 전도를 외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을 꿈꿔야 합니다. 넘어지면 또 일어나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제사장 교회가 되고, 하나님 나라가 되고 우리가 있는 삶의 터전에서 저 분 정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같다라는 것을 꿈꾸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떤 노력이 아닙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상을 섬기지 않고,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율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이것을 기도제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가정과 후대들에게 제사장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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