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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08-09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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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8월 09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본 문 :

이사야 2:1-22

 

 오승주 목사

 

Ⅰ. 성경 :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코로나가 여전히 변하지 않고 똑같은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 때문에 전국에 피해가 많이 있습니다. 코로나보다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넷째 누나도 장성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데 물이 마루까지 찼다고 합니다. 많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많이 기도해주시고 수해가 끝나고 나면 마음을 담아서 수해현장을 도울 수 있는지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연재해 앞에 인간은 엄청 연약합니다. 이때 우리의 심령은 가난해집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은으로 만든 우상 금으로 만든 우상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왜냐면 아무것도 쓸모가 없습니다. 금은보화가 쓸모가 없고 생명이 위태로울 때는 그동안 경배하던 것들이 쓸모가 없어집니다. 이때 인간의 죄성, 한없는 연약함 들을 발견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위해서 성경에 보니까 신앙 훈련을 시키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훈련을 시키시는데 어떤 훈련이냐면 신앙훈련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만든 훈련 또는 선교단체에서 만든 돈을 내고 가는 훈련도 그런 것을 보고 만든 것이지만 그런 훈련이 아닙니다. 우리가 집회나 훈련 받으러 가서 받는 제자훈련, 전도훈련도 있지만 사실 우리 인생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는 여정 속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훈련을 시키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쓴 ‘그리스도인의 제자훈련’이라는 책을 보면 다섯가지 정도 훈련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생을 통해서 경험한 것은 세 가지 정도가 있는데  지금도 그런 훈련 속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첫째는 신앙생활을 제일 먼저 시작할 때 받는 훈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는 훈련입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구나,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인도하셨구나, 하나님이 나를 만나시려고,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깨닫고 구원 받게 하시려고 나를 인도하셨구나 하고 깨닫는 은혜입니다. 이것을 언제 깨달을 수 있나요? 복음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때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 죄악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렵다, 힘들다, 고난이다, 심지어는 사업이 망했다, 내 몸이 병이 걸렸다 또 어떤 어려움 속에서 예수를 많이 믿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진짜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받고 나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였구나, 나를 죄에서 건지시려고, 죄악에서 나를 건지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려고 나를 인도하시는 거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교회를 가고 고등학교, 대학교 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신학교 가서 철야예배를 하고 새벽예배를 하는데 삶이 녹녹치는 않습니다.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하루는 어머니랑 통화를 하는데 멀리 계시는 어머니께서 펑펑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잘 울지 않으시고 강하시고 의지도 있고 힘 있고 밝으신 분이었습니다. 우시는 이유는 아버지가 엄마가 일했던 돈을 들고 가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저에게 돈을 보내줄 돈이 없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도 어머니랑 같이 울었습니다. 저는 앞날이 깜깜했습니다. 밥도 사먹어야 하고 기숙사비도 내야하고 학비도 내야하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살아야하나 라는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그런 깝깝한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기도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고 나와도 아무것도 상황은 나아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구원해주심이 너무 기뻤습니다. 예수님 만난 것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는 어머니께서 신앙생활을 막 시작하셔서 신앙이 좋을 때가 아니어서 일요일에도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러 가셨습니다. 일요일에 일하러 가지 마시고 예배드리러 가시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같이 울고 어머니에게 신앙 이야기를 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셨다고 느껴지는 훈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광야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그 다음 하신 훈련이 광야훈련이었습니다. 다윗도 그렇고 믿음의 사람들이 반드시 꼭 거쳐 가는 훈련이 광야훈련이었습니다. 광야라는 곳은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광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고난과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우리를 먹여주셨지만 진짜 광야 때 하나님이 특징적으로 한 가지 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를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광야 훈련의 특징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13년 동안 광야에서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가장 의지하고 선명하게 자기 인생에 드러났던 것이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고 모세오경을 주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믿어도 우리의 삶은 녹녹치 않습니다. 보통 목사님들이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행복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는 불신자도 될 수 있고 예수 믿어도 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이 예수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우리 삶에 갑자기 가정문제가 풀리고 고부간의 갈등, 부부사이의 갈등이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어서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가 변화 되서 풀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교회 간다고 그런 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광야 같습니다. 오히려 더 고난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겁니다. 예수 믿고 우리가 그냥 원래 죄인 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기에 광야라는 곳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내 모습이 어떤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악하고 미련하게 살아왔는지, 혹은 이전에 애굽의 노예로 살 때 어떤 상태로 내 마음과 영혼이 있었는지, 어떤 습성과 체질을 가지고 사는지 광야에서 낱낱이 다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하시고 고치시고 낫게 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해서 살 때 우리가 다시 원래의 삶,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할 수 길이 말씀에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구약 역사 가운데 바벨론 포로에 갔을 때도 말씀을 확인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광야를 살고 계신다면 말씀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는 세상 유혹에 관한 훈련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위험훈련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세상이 주는 유혹들을 광야를 지나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세상이 주는 유혹들을 몰라서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는데 광야를 지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니 그런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유혹이 보이게 됩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난리이고 홍수 때문에 난리입니다. 이제 태풍도 온다고 합니다. 사실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홍수는 눈에 보이기라도 하고 피할 수라도 있습니다. 코로나는 눈에 보이기라도 해서 우리가 조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들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어리석냐면 그것에 대해서는 경계심이 없습니다. 코로나, 홍수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엄청 경계하고 삽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들은 경계심이 다 허물어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 영적인 세계를 하찮게 하는 죄입니다. 죄의 공격들, 믿음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들, 은혜를 소멸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음지에 있는 쾌락들, 음란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지금도 문화, 산업이 되어 우리를 공격하고 있고 우리의 자녀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클럽에 재벌2세들이 언제든지 가면 마약을 구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우리나라는 마약 청정지대였습니다. 마약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아무데나 가면 마약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빅뱅의 승리 사건 때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 알게 되었습니다. 더럽고 추접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 하고 센스있고 아름답게 사는 것 같지만 뒤에서는 전부 마약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걱정하는 이유는 유럽과 미국을 보면서 예상을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마약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어떤 사상들입니다. 영국의 청소년 교육 자료를 만드는데 꼭 법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장면이 여자들끼리 키스하고 남자들끼리 키스하는 장면이 사랑이라는 것을 표현할 때 꼭 넣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랑을 표현할 때 남녀간의 사랑을 표현해주면 되는데 동성간의 사랑을 꼭 넣어줘야 하는 것이 법이 되었습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포괄적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고 어른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지지합니다. 이런 것이 통과되면 문화가 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됩니다. 그거 법이잖아, 괜찮은 거래. 죄가 국가에서 인정해준다고 하면 죄가 아닌가요? 성경이 죄라고 말하는데 법이 죄가 아니라고 말하면 죄가 아닌가요? 이런 것들이 잠식합니다. 코로나, 홍수로 많은 인원이 죽어서 안타깝지만 죄송하지만 우리나라는 전 세계 자살 1위 국가입니다. 하루에 평균 35명이 자살로 죽습니다. 하루에 35명이나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나 해보셨나요? 그것에 대해 경계심이 있나요? 우리 아이들이 마음을 다 뺏기고 영혼, 정신을 잠식당했습니다. 말세가 되면 살기는 더 좋아집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환경.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황폐해집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위험훈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을 잠식하는 유혹에 대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이 엄청 부담되시죠? 거룩은 우리가 두 손을 들고 주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우리가 두 손을 들고 주님을 찬송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 쉬운 것입니다.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이고 우리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 입니다. 연약해지고 가난해진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할 수 없으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도덕적인 기준, 어떤 단체들이 만들어낸 경건의 기준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하늘 보좌를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을 바라보면 유혹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과 마음을 잠식하는 어둠의 세력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명예, 권력, 재물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에 빠지면 영원한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엄청난 유혹입니다. 사실 광야생활, 노예생활을 할 때 보다 더 큰 유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 때였습니다. 어마어마한 유혹들이 위험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런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것을 느낄 때마다 교회에 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아버지 이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주님  도와주세요. 제 자존심 내세우지 않고 도움을 구합니다. 그래도 목산데 라는 제 생각과 의지로 싸워봤는데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목사 타이틀 쓸모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우리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엎드립니다.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훈련을 통해서 갈 길을 밝히 보여주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갈 길을 밝히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어떤 길로 가야 생명의 길인지, 은혜의 길인지 성경만이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가지고 채우고 하지만 그 끝에는 공허함과 허무함 밖에 없습니다. 다 사라집니다. 인생을 그렇게 의지했는데 코끝의 호흡이 사라지면 다 무용지물입니다. 우리가 장례식 치를 때 뭐 하나라도 가지고 가는게 있나요? 관에 금은보화를 넣어주면 그것을 들고 갈 수 있나요? 거기에 빠져서 살면 높임 받으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Ⅱ.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 산 꼭대기 성전의 의미_이사야2:2-3

 - 군대와 전쟁을 멈추시는 하나님_이사야2:4

 - 유다가 이교를 닮아가는 이유와 미래_이사야2:5-11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_이사야2:2-3‘

 

고대 근동지방의 산이라는 의미는 신령한, 신선한 곳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지금도 산은 그런 의미가 많이 있습니다.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내가 왜 인생에서 이렇게 싸웠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북한산에 올라가면 서울이 한 눈에 보이는데 버스가 정말 작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거기만 올라가도 내가 왜 어제 우리 와이프에게 그런 소리를 했지, 내가 왜 그렇게 싸웠지, 별거 아닌 것 가지고 내 마음에 갈등이 많았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은 우리에게 그런 힘을 줍니다. 높은 곳에 가서 우리 인생을 보면 진짜 별거 없습니다. 산이라는 곳은 그런 매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뿐만아니라 영적인 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실력 있는 점쟁이들은 전부 산에 있습니다. 제가 군생활을 계룡대에서 근무했는데 계룡산이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무당들의 산이라고 합니다. 밤에 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산이 엄청 밝았습니다. 기를 받는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남에 가도 그런 곳이 있습니다. 점쟁이들이 산에 천막을 치고 촛불 키고 있습니다. 전국에 유명한 무당들이 다 모입니다. 그 당시에도 산은 신들과 접촉하는 곳이었습니다. 제사 지낼 때 전부 산에서 지냈습니다. 특히 성경은 계속해서 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시내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놔두고 혼자서 올라간 곳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에서 산이 왜 중요하냐고 기록되어 있냐면 장차 여호와의 성전이 산에 지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솔로몬 성전도, 예루살렘 성전도 전부 산에 지어졌습니다. 사실 솔로몬 성전이 엄청 거대하고 화려할 것 같지만 사실 작습니다. 하나님이 지으라고 한 대로 지었는데 굉장히 작습니다. 산 자체는 성경에 지배적인 권위를 나타냅니다. 여호와의 성전이 높은 곳에 지어질 것이라고 계속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산에 지어야 하죠? 산은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기에 산 위에 교회를 짓지 않아도 됩니다. 의미적으로 가장 높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높다 해도 우상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아무리 높다 해도 하나님 보다 높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을 굽어 살펴보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벌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그 하나님께서 산꼭대기에 지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인생에게 길이 되고 생명이 되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 앞에 가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고, 그 길로 우리가 행하리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리라,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여호와의 전으로 가자. 이 고백이 우리의 인생살이 중에 가장 지혜로운 고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 가장 높은 곳에 계셔야 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가면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율법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전으로 가자 이것입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_이사야2:4

 

왜 여호와의 산에 가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로 가야 하냐면, 왜 여호와의 전에 가서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야 하냐면 하나님은 군대와 전쟁을 멈추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남유다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을 만들고 있고 창을 만들고 있습니다.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서 강력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전쟁을 준비합니다. 왜 사람들이 싸우고 갈등하고 죽이고 살인하고 남 이야기하고 비난하고 원수를 만드나요? 짐승들도 똑같습니다. 왜 사자가 사슴을 죽이고 먹을까요? 배고파서일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는 끝없는 욕심을 만듭니다. 높아지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고 오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전쟁을 치루는 것입니다. 내가 너보다 강해, 내가 너보다 세다. 지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빠지면 답이 없습니다. 계속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전쟁광들은 전쟁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내 가족이 다 죽고 내 삶이 피폐해지는데도 계속 전쟁을 합니다. 왜요? 교만, 오만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는 갈등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배에 가면, 하나님의 전에 가면, 임재가 있는 예배에 가면, 은혜를 받으면 신기하게 평안이 옵니다. 여호와의 산에 가면,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가면 신기하게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내 죄가 보이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렇게 밉고 짜증나고 화나던 것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면, 기도하고 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은혜를 받고 나면 눈 녹듯이 다 녹았습니다. 그거 아니면 절대 안 될 거 같아서 사람들이 살인도 저지르고 범죄도 하고 남을 죽이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런데 은혜 앞으로 가면, 십자가 보혈 앞으로 가면 그것이 깨달아집니다. 눈 녹듯이 녹습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품속으로 가면 그렇습니다. 이 예배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가요. 은혜를 받으면 전쟁을 하려고 만든 칼과 창들이 농사 짓는 도구가 됩니다. 보습으로 바꾸고 낫으로 바꾸게 됩니다. 살리는 도구입니다. 똑같은 칼이지만 강도가 들고 있으면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의사가 들고 있으면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공동체에 속해있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은 남을 죽이는 강도가 들고 있는 칼이 될 수도 있고 의사 손에 들려있는 남을 살리는 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은혜의 공동체 안에 있으면 우리의 모든 성품들, 기질들이 사람을 살리는 농기구가 됩니다. 

 

남유다가 하나님의 전에 갔을까요?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으로 가자, 여호와의 산으로 오르자고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왜 가지 않았냐면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_이사야2:5-10’

 

놀랍습니다. 다윗의 혈통인 남유다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이유는 동방 풍속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동방 풍속은 앗수르 왕국의 풍속이 그 당시 남유다에 휩쓸려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블레셋 사람들처럼 점을 쳤다고 합니다. 그 당시 블레셋의 점쟁이들은 엄청 유명한 점쟁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블레셋의 점쟁이들은 악신에게 미래를 물어봤다고 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는데 의문점이 있습니다. 왜 골리앗이 쳐들어가지 않고 계속 소리만 지르고 있을까? 다 점쟁이의 말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언제 쳐들어가야 할지 언제 멈추어야 할지를 다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도 우리나라 국회의원들, 재벌들 전부 점쟁이들을 데리고 있습니다. 두렵고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큰 회사를 운영하려면 점쟁이 없이는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들도 똑같습니다. 홍수가 터지면 정책을 어떻게 펴야 하는지 모릅니다. 국가의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도 똑같이 회의해서 최선의 것을 찾아가는 것뿐입니다. 불안하니 굿을 하고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악령의 힘을 통해서 사람과 환경을 조종하고 미래를 알고자 하는 그 점술이 이 당시에 블레셋에 엄청 유행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실망하고 가장 분노하시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점쟁이를, 앗수르의 풍속을 받아들이고, 점을 치는 풍속을 받아들이고 우상을 섬기는 풍속을 받아들였습니다. 남유다의 미래는 하나님이 아시는데, 남유다의 미래는 오실 메시야이고 오실 그리스도인데, 언약의 계보, 다윗에게 약속하시고 야곱에게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이스라엘의 미래인데 그 말씀을 다 잊어버리고 멸망할 나라 앗수르, 바벨론의 우상을 섬기는 남유다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슬퍼하십니다. 왜 우상을 섬기나요? 사람들의 심리는 내가 우상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왜 절을 하고 그들에게 미래를 물어보나요? 내가 우상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를 낮고 천하게 만드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면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은 낮고 천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두려워서 보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위틈에 숨고 진토에 숨게 됩니다. 구원의 날에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Ⅲ.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_이사야2:12-22

  • 세상의 당연한 유혹과 시험
  • 신앙: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_이사야2:11
  •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여호와의 날)_로마서3:9-26,15:12-16, 고린도전서1:18-25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_이사야2:20-22‘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실 때, 말세 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그 영광을 보지 못하고 낮고 천하게 되며 멀리서 지켜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아이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예수님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그러면 지옥은 어떻게 가나요? 한참 생각하다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가요. 명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만히 있으면 죄악 속으로 끌려갑니다. 내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내 감정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은 나를 의지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대로 가만히 두면 우리는 쾌락을 향해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뭐라고 이야기하나요? 깨어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너희 몸을 산제사로 예배하라고 합니다.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읽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은혜 받으려고 애쓰셔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면, 가만히 있으면 끌려갑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가정문제, 부모 자녀간의 갈등, 더 어려운 것은 내 영혼, 마음, 정신을 잠식하는 악한 영들의 공격, 우리 인생을 우상, 쾌락에 빠져 살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멀어지게 만드는 것들. 그래서 우리 인생을 하나님 보실 때 낮고 천한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들. 그것이 세상의 당연한 유혹과 시험입니다. 우리는 그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왜 예수 믿었는데 암 걸려서 죽습니까, 왜 교통사고가 납니까, 왜 시험에 떨어집니까? 반대로 질문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 믿고 암에 걸려 죽은 것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구원 받은 것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완전히 타락한 것입니다. 이 땅은 죄악 된 땅이기 때문에 우리의 상황과 환경은 그대로 똑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데 왜 암에 걸립니까? 암에 걸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암에 걸릴 수 있고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고 시험에 떨어질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닌가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그분을 경배하고 경외하고 두 손 들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여호와의 빛에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 빛이 보이나요? 느껴지나요? 믿음의 눈을 들면 보입니다. 지금도 내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사망과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신 예수그리스도. 이사야가 가르치는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가 빛 가운데로 가도록, 예수님께 가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에서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날, 여호와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여호와의 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날, 그 구원이 우리에게 깨달아지는 날, 그리고 종말론적으로는 예수님이 말세 때 다시 재림주로 오시는 날 두 가지를 동시에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_로마서3:10-18‘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_로마서15:12-13’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_로마서15:16‘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_고린도전서1:18-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_로마서16:25-27‘

 

예수님 믿는 것 자체가 응답이고 은혜이고 축복인 것을 모르면 우리는 천박하게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왜 천박해졌나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천박해졌나요? 자기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인생을 의지한다는 것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것들을 의지한다는 것인데 우상을 섬기고 죄악을 따라서 산다는 것인데 그럼 우리는 천박해집니다. 목사도 그렇게 살면 천박해집니다. 아무 능력 없고 아무 은혜가 없고 힘 없는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성한 날이며 십자가에서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내어주신 날이고 그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 날입니다. 그 은혜가 임하면 사자와 사슴이 같이 놀고 전쟁과 갈등이 사라지고 우리가 누군가를 죽이려고 만들던 칼과 창들이 보습과 낫이 됩니다. 우리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남을 죽이려는 인생이 , 싸우고 갈등하던 인생이 남을 살리고 농사를 짓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호와의 날이 무엇인가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설교를 잘해서 임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장로님들, 권사님들 예배를 위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우리 아이들이 어디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이곳이 은혜의 생명수가, 십자가의 보혈이 흘러나오는 복음의 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세상에 살다가 갈 길을 잃어버리면 이곳에 와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갈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다가 위로를 받아야 하고 힘을 얻어야 하는데 세상에는 힘 얻을 곳이 없습니다.이곳에 와서 예배드리다가 힘을 얻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죄를 짓다가 회개할 길이 없어서 인생을 포기하고 막 사는 세상인데 이곳에 와서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되는 것. 그 예배, 여호와의 산. 그게 가스펠교회 공동체도 예배지만 여러분의 인생에도 여호와의 산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훈련을 하시고 광야 훈련을 하시고 그 광야에서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인생에도 여호와의 산이 있기를, 여러분의 인생에도 항상 그곳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여호와의 전이 있기를. 항상 그곳에 가면 내가 다시 새로워질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여호와의 산이 여러분의 인생에도 있기를 정말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방인들에게, 우리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천하고 낮은 존재가 아니라 존귀하고 하늘의 별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저 높이 들린 존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교만하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로, 우리를 이 땅에 존귀하고 귀하게 불러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순교하신 선교사님들을 보고 우리는 귀하다고 합니다. 그분들을 천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런 분들. 수 많은 선교사들 우리가 천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의 인생은 천하게 살았습니다. 감옥에 살았고 핍박 받고 살았고 고난 속에 살았지만 우리가 그들의 인생을 천하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존귀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귀하고 복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값지고 귀하고 축복되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요?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예배. 코로나니까 집에서 예배 드려도 괜찮습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만날 수 있는 예배, 은혜 받을 수 있는 예배, 하나님 앞에 내가 가서 거기서 죄를 회개하고 두 손을 들고 우리 주님 밖에 없습니다라고 찬양할 수 있는 예배가 여러분들에게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문의 / 윤덕현 전도사 010.9899.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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