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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1-08-01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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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8월 01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2부예배)
제 목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본 문 이사야 43:1-13

 

 오승주 목사

 

Ⅰ. 그러나(but now)_이사야43:1, 1:14-20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_이사야43:1

 

오늘 이사야 43장 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에서 지금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게 말씀 중간에 들어가 있어서 내가 지금 말한다 이런 의미가 있지만 사실 이것은 개역개정이 조금 번역을 잘못 기록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공동번역이나 다른 번역에는 그러나 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가 이제 이같이 말하노라 라는 앞에 그러나를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은 앞에 그러나를 지금 속에 묶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이 그러나는 영어로 but now. 영어성경에는 but now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맞는 것입니다. 그 말은 지금 42장에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전쟁의 위력으로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셔 가지고 불타게 하신다는 말씀을 반전, 그 말씀을 뒤집어서 그러나 but now 이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43장이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42장과 43장은 연결이 되는 성경인데 반전의 설교입니다. 그런데 성경번역이 조금만 잘못되도 갑자기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렇게 되어버리면 갑자기 하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시지라고 생각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이런 성경번역은 문맥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나, but now, 그러나 지금. 이게 굉장히 중요한 단어라는 것을 기억시고 오늘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42장, 43장 오늘 본문을 해석하기 전에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사야 1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사야 1장이 이사야 전체를 설명하는 것인데 이사야 1장에 말씀들이 오늘 성경을 해석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키가 됩니다.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_이사야1:14-20

 

14절. 월삭과 정한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물을 가져다 바치는 유월절 같은 제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무거운 짐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것을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5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을 펴서 기도합니다. 왜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왜 예배, 제사를 받지 않으시냐면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이가 피가 뭐라는 것을 바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6절. 손의 피는 악한 행실입니다. 악한 행함입니다. 그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거 때문에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18절. 여기서 but now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뭘 변론하자고 이야기하십니까?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무슨 말이냐면 지금 내용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 모세오경을 주셨습니다. 모세오경을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뭐라고 이해했냐면 그냥 월삭과 절기를 하나님이 좋아하신다. 그 예배형태, 제사의 형태, 각을 뜨고 소를 잡고 피를 흘려서 드리는 그 제물을 하나님이 좋아하신다고 거기까지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전혀 좋아하시지 않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그 율법을 주신 진짜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고 무식하고 무지하게 그 율법행위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나에게 마음은 주지 않고 이 성전 뜰만 밟고 가는구나 너희의 제사가 진짜 역겹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을 무거운 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율법을 왜 만들어놓으셨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왜 우리에게 주셨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냐?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의지할 수 있으니까. 내게 조금이라도 교만이 있고 오만이 있고 스스로 할 수 있다라는 내 공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말씀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계시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왜 지키지도 않았냐면 오늘 하나님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야 너희가 이 율법을 제대로 지켰다면 고아를 돌봤을 것이고 과부를 돌봤을 것이고 가난한 자를 구제했을 것인데 너희가 육신적으로 해석도 제대로 하지 않았어, 너희가 이 율법을 제대로 해석했다면 학대 받는 자를 돕고 선행을 배우고 정의를 구하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변호할 텐데 그것도 하지 않잖아. 너희는 그냥 내 앞에 와서 제물만 놔두고 가잖아. 손 들고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구하고 그냥 가잖아. 이 율법을 육신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만 해도 고아와 과부를 돌봐야 되는데 그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율법의 진정한 의미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행악했는지. 얼마나 많이 악한 일을 했는지. 그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해요? but now. 변론하자, 따져보자, 대화해보자, 토론해보자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너희 죄가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처럼 희게 될 것이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즐겁게 순종하면 땅의 소산을 먹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앞에 있는 모세오경의 율법을 제대로 깨닫고 이행했을 때 주시는 은혜입니다. 구원이라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하얗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기 위해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리에 항상 있는데 우리가 인간이 행악하고 악한 일을 저질러서 심판 받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을 알 수 있어요?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but now. 그러나. 지금 돌이켜서 제대로 된 율법을 깨달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으로 돌이킬 때 너희가 이 사랑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간인 저도 제가 살면서 사람들과 나쁜 관계를 맺는 성격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그런 성품이 되지 않습니다. 제 마음 속에 저한테 큰 잘못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밉고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 사람이 저한테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잘못을 했습니다. 관계가 끊어져 있는데 저도 사람이니까 밉고 그 당시에는 화도 나고 저 인간 다시는 안 봐, 절대 용서 안 할 거야라는 마음이 있는데 세월이 지나고 은혜를 받다 보면 저도 죄인이고 나도 부족한 사람이니까 용서해줘야겠다는 이런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제가 먼저 가서 내가 너 용서해줄게라고 말은 못하겠습니다. 인간이니까. 그런데 무슨 마음이 드냐면 저 친구가 저 사람이 저 분이 나한테 와서 그때 일을 사과하고 미안하다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면 용서해줘야지 이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것입니다. 저는 인간이니까 내가 너를 용서해줄게 라는 메시지를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네가 나한테 와서 용서를 구하면 진심으로 회개하면 내가 너를 용서해줄게. 주홍 같이 붉은 죄 희게 해줄게.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기회인 것입니다.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성경이. 신앙생활하면서 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냐면 이 율법에 대한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키는데 뭐가 되어버렸냐면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더 지키고, 더 지키고. 그래서 율법주의자가 남을 정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 율법도 못 지킨 것들. 아, 헌금도 제대로 안 하는 것들. 여러분 이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리새인이 된 것입니다. 바리새파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있을까요? 있죠. 제가 걱정하는 것은 저희 교회 성도님들이 지금은 성경도 못 읽으시고 벅차해서 겸손하시지만 한 10년쯤 지나서 10독정도 하시고 나시면 어휴 성경도 못 읽은 것들, 성경도 안 읽은 것들 이럴까봐 걱정이 됩니다. 그거는 잘못 된 것입니다. 성경을 10독정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하나님 앞에 주님 밖에 없구나 그게 정상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었을 때 정상적인 신앙은 진짜 하나님밖에 없구나. 하나님 사랑이 진짜구나. 진짜 감사하고 그래서 옆에 있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어보세요, 너무 좋아요 라고 간증하는 삶이지 율법주의자가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교만하고 그래서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우리도 잘못하다가 그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것은 그러나, but now가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아니면 신앙생활을 내 자존심으로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다, 사회에서 지위를 가진 사람이다, 뭐 사장이다, 회장이다. 혹은 제일 위험한 사람이 목사들입니다. 자존심. 여러분 목사들이 범하는 우가 뭐에요? 자기가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때 그것을 포장하고 거짓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성경해석 자체를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해석해서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짓말 한 것을 덮고 덮고 덮다보면 이 성경을 잘못된 해석을 하기 시작합니다. 거짓 정보를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거짓 선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내 자존심이라는 것을 내려놓지 않고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진실하게 신앙생활하지 않으면 십자가 앞에 하나님 은혜 앞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또 밖에 수많은 자존심을 가지고 생활하는 분들이 버티고 버텨서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 마음이 완전히 완강히 거부하는 그런 신앙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Ⅱ. 두려워하지 말라

 

-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_이사야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_이사야43:1

 

이스라엘에게 메시지를 주시면서 하나님은 항상 야곱을 꺼내셨습니다. 왜 아브라함을 꺼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꺼내지 않았을까요?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개명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민족성은 야곱에게서 시작이 됩니다. 이해가 되시죠?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야곱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는 항상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렇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유대민족의 이름은 야곱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을 창조하셨고, 이스라엘을 지으셨다 이 말은 야곱이라는 인물을 창조도 하셨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새로 주시고 새롭게 우리를 지으셨다, 구속하셨다 이런 의미로 반복의 의미를 사용해서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시나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찬양도 많고 이 말씀도 우리가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으로 많이 암송하고 가지고 가요. 그런데 이 말씀의 핵심은 구속이라는 단어입니다. 구속이라는 단어는 가알이라는 히브리어입니다. 가알.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가알이라는 히브리어는 그 당시 고대근동지방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종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집에 돈 주고 종이 있었습니다. 내 것, 내 물건 취급하는. 여러분 노예제도가 없어진지 불과 100-200년 밖에 되지 않은 거 아십니까? 인류 상 지금도 어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끔찍했습니다. 옛날 미국에 남북전쟁이 일어나는 핵심 이유가 뭐냐면 노예제도 폐지였고. 영국이라든지 유럽에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핵심항목이 노예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 수 없지 않냐. 그런데 제가 그 자료를 보니까 진짜 끔찍했습니다. 아프리카에 침략해서 노예가 될 만한 사람들을 배에 실어서 미국 대륙 땅에 가서 파는 것입니다. 노예무역상이 있었습니다. 그 배를 보니까 사람을 많이 실어야 되니까 사람이 딱 누우면 코가 닿을 만큼 칸막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옆에 붙어 있는데 이렇게 붙이면 상체가 크기 때문에 많이 못 실으니까 뒤집어서 실은 것입니다. 그래서 꽉 채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죠? 그 당시에 배가 아프리카에서 미국까지 가는데 몇 달이 걸리겠어요? 배 실력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한 달 만에 갈 곳이 그 당시에 몇 달이 걸쳐서 간 것입니다. 그래서 도착해서 보면 어떻게 되어 있어요? 절반이 썩어있고 죽어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얼마나 악하냐면 그것을 못 버틴 노예는 팔 가치,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진짜 잔인합니다. 겨우 배 위에 호스로 물을 뿌려주는 정도입니다. 왜? 그것을 꺼내서 음식을 먹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배설물이 나오기 때문에 아예 음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끔찍한 일을 벌였습니다. 미국은 그것 때문에 싸운 것입니다. 남북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여러분 노예제도가 없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흑인들이 열 받을 만 합니다. 그런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가알이라는 단어가 어떤 단어냐면 노예로 노예시장에 얽매여 있는 사람을 어떤 선한 주인이 그에 해당하는 댓가를 지불하고 산 후 그를 자유롭게 해방시켜준다는 의미의 단어가 가알입니다. 구속이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단어를 구속이라는 단어를 쓰시고 구속사라는 가알이라는 단어를 쓰시는지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보세요. 그냥 노예를 구속해서 자유롭게 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사업가입니다. 제가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 노예가 시장에서 판매가 되고 있는데 악한 사람에게 끌려가서 평생 노예로 사는 것이 너무 안 됐어. 그래서 제가 그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서 야 이제 너 마음대로 살아 하고 그냥 두나요? 아닙니다. 그냥 두면 이 사람은 또 노예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가르치고 학교도 보내고 몸도 씻겨서 옷을 입히고 그게 좋은 사람입니다. 이 노예를 더 이상 노예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신앙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셔서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영접해서 천국 가니까 마음대로 살라고 그렇게 하시분이 아닙니다. 그건 좋은 신이 아닙니다. 더 이상 노예의 삶을 살지 않도록 우리를 교육시키시고 바꾸시는 것이 진짜 참 신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셔서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너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창조했으니까 내 마음대로 이제 너는 더 이상 죄인 아니야, 너 그냥 봐줄게 이게 아닙니다. 그건 공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통해서 죄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속량하셨다.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 말에서 구속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완성이 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로 새 인생 살고 변화되고 거룩해서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 구속이라는 단어가 완성이 되는 단어입니다. 인류역사로 보면 창조, 타락, 구속,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까지.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구속은 완전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것까지 승리해서 천국에 입성할 때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까지가 구속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단어가 그 단어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이것은 오늘 본문의 8-13절까지 증인의 삶,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삶과 연관지어서 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를 돈 주고 사실 때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돈이 남아 도니까 대충 야 너 내가 살게, 너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아 이러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이제 내 것인데, 내 것인데 선한 하나님이시니까 선한 신이니까 너 이제 더 이상 노예로 살지 말아. 공부 좀 해, 대학 좀 가, 이제 네가 네 인생을 좀 살아. 지금 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 하셔서 목적 없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시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존재로, 찬송을 위해서 존귀한 자로 살도록 우리를 창조 목적처럼 다시 존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고 아름답게 살도록 그렇게 천국에 입성하고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네비우스가 만든 선교전략처럼. 제가 왜 네비우스 선교전략이 귀하다고 하냐. 너희 나라에 내가 복음도 전해주고 학교도 지어주고 내가 너희가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도 지어주고 병원도 지어주고. 여러분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부흥했냐면 초창기 미국의 남침례교회에서 우리를 후원해서 똑똑한 친구들 미국으로 전부 유학 보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공부 가르치고. 왜? 한국에는 신학교가 없으니까. 그래서 목사가 되게 하고 박사가 되게 하고 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뛰어난 친구들을 다 미국으로 유학 보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게 이승만 대통령이고 그게 우리나라 초창기 부흥가, 목회자들입니다. 그런 목회자들이 자기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했습니다. 여러분 그게 네비우스 정책입니다. 너희 나라는 너희가 살려야 돼. 그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하게 승리해서 구원의 완성까지 가도록. 그래서 구원은 영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주님의 사랑 안에서 변화되는 것이라는 것. 여러분 이것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 물과 불 가운데서 함께 할 것이라_이사야43:2-4, 에스라6:13-22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_이사야43:2-4

 

2-3절. 이게 무슨 말인가요? 여기서 물과 불은 뭔가요? 가르쳐드렸어요. 기억하고 계셔야 합니다. 물과 불이 상징하는 것은 환난을 상징합니다. 기독교인에게 환난을 상징하는 것이 물과 불입니다. 여러분 물 무서운 거 아시죠? 저는 어렸을 때 저희 집 앞 저수지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물속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발을 디뎠는데 발이 닿지 않는 것입니다. 확 들어가는데 진짜 무서웠습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니까 그 순간에 어떻게 해야 될 줄 몰랐습니다. 제 친구들이 제 손을 잡아줬습니다. 안 그랬으면 저는 거기서 죽었을 것입니다. 별로 깊지도 않았는데 어렸을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저는 그 뒤로 물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수영을 할 줄 모릅니다. 물이 무섭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혼여행 갔을 때 물안경 쓰고 스노쿨링 하는 거 와이프 혼자 했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못 하겠더라고요. 그 깊은 바다에 나 혼자 놔둔다고? 저는 못 했습니다. 그 정도로 물이 무섭습니다. 불은 더 무섭습니다. 화재를 경험한 사람은 트라우마가 심합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물과 불을 무엇으로 상징하고 있냐면 환난으로. 그리스도인이 겪어야 될 환난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물로 불로 우리가 지나가야 되는데 그때 하나님이 지키시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구속 받은 사람을. 구속 받은 사람을. 노예에서 해방이 되었는데 앞으로 공부도 해야 되고 대학도 가야되고 자기 인생 살려면 얼마나 갑갑해요. 여러분 평생 노예로 살다가 남 심부름 하면서 일만 하면서 살다가 종으로 살다가 이제 자유인이 되어서 공부도 하고 경쟁사회에서 살아가야 되는데 힘들잖아요? 그렇지만 그것을 보호하고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서포트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신학적인 난제를 짚고 가야 합니다. 그게 뭐냐면 값싼 구원론입니다. 제가 흔히 이야기하는 번영신학, 값싼 구원론. 한국교회, 한국 신학교에 팽배하게 자리 잡고 있는 값싼 구원론. 값싼 구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뭐냐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난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에 휴거에 대해서 설명할 때 휴거 뒤 환난이라고 주장합니다. 휴거 전 환난이 아니라 휴거 뒤 환난이라고 무리하게 주장합니다. 마태복음 24장이나 다니엘서에도 나와 있지 않는 내용을 자기들 스스로 해석합니다.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냐면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인데 구원 받은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환난을 겪게 하시지 않을 거야 라는 그냥 자기 식으로 해석을 해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해 놓는 것입니다. 엉터리 해석입니다. 휴거 뒤 환난이 말이 됩니까? 엉터리 해석입니다. 그 말은 어디서 나왔냐? 값싼 구원론이라는 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목회자들이 응답, 축복, 예수님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거야, 우리 인생에 환난은 없을 거야, 우리 인생에 고난은 없을 거야. 이런 엉터리 설교들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는 알고 하나는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진짜 의미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환난은 기쁨이고 영광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이 믿음을 지키 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살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받는 핍박이 하나님께 의의 면류관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그것 때문에 영광을 받는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스데반의 환난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바울이 감옥 속에서 기뻐하고 찬송 불렀던 것을 무엇으로 해석하실 것입니까? 값싼 구원론자들은 성경을 해석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성경에 믿어야 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엉터리 신학들이 한국교회 안에 목회자들을 통해서 성도들을 유혹하고 마치 이세벨처럼 거짓선동을 하고 거짓정보를 제공해서 성도들이 마치 교회 가면 축복 받는다, 응답 받는다. 축복과 응답을 받긴 받습니다. 의미가 다르다니까요. 우리가 바라봐야 될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환난 자체가 없다는 값싼 구원론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삶을 다 망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 망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올림픽 준비하는 선수에게 금메달을 따기 위해 준비하는 선수에게 대충해, 술도 먹고 한 잔씩 하고 운동 힘든데 뭐 하러 힘든 거 그렇게 해, 남들 쉴 때 쉬고 좀 놀자 이렇게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값싼 구원론자들이. 그거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올림픽 메달 못 따죠? 우리가 면류관을 받지 못합니다. 천국에 입성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불로 가지만 물이 침몰하지 못하고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한다. 어떻게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거기서 물과 불에 함몰되지 않으려면 3절이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_이사야43:3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 뭐냐?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크신 하나님이 내게 깨달아져서 세상의 물과 불, 이 물과 불은 환난, 핍박만 있는 거예요? 유혹도 있습니다. 달콤한 유혹도 물과 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 가는 것, 모든 것들이 물과 불이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길 수 있고 거기에 함몰되지 않아야 되냐면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고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자라는  믿음입니다. 그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구나, 하나님이 나의 거룩한 분이구나,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구나. 하나님 밖에 없구나. 그 믿음이 물과 불 가운데 우리를 지나갈 수 있게 합니다. 제가 저희 집에서 막내입니다. 8남매의 막내였습니다. 저희 누나들, 형이나 부모님이 겪는 어려움에 비하면 제가 덜 겪었을 것입니다. 막내니까 사랑도 받았고 예쁨도 받았고. 그렇지만 제 입장에서 받은 고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저희 집이 어렸을 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제 인생에 아무런 소망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소망이 없었습니다.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엄마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밤새 일하시고 아버지는 늘 술 드시러 가셨습니다. 형과 누나들은 그런 집을 다 피해서 도시로 다 가버렸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혼자 집에 살았는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집에 혼자 있었는데 늘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에게 공부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맨날 개하고 놀고 엄마 일 돕는다고 밭에서 일하고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것을 불쌍히 여긴 우리 누나들이 저를 광주로 전학을 시켰습니다. 엄마 아빠 밑에 있으면 올바로 못 클 것 같으니까.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내려갔더니 어디서 고물 트랙터를 하나 사놓았습니다. 농사 지으라는 것입니다. 주말마다 내려와서 농사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교회를 다닐 때니까 미치고 환장하겠죠? 금요일에 내려가서 토요일에 하루 종일 트랙터로 밭 갈아주고 주일 새벽에 교회를 가려고 광주로 올라갔습니다. 제가 광주로 올라갈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뭔 짓입니까 고등학생이. 토요일에 밭 갈고 주일 아침에 교회 가려고 가는데 얼마나 욕하고 뭐라 하던지. 농사 지어놓으면 또 그 돈 가지고 술 마시러 갑니다. 여러분 농사 지어서 희망이라는 것이 있어야 되잖아요. 저희 아버지는 손에 돈이 있으면 안 되는 분입니다. 늘 돈이 있으면 술 마시러 가셨기 때문에. 그러니까 여러분 그런 환경에 살고 있는데. 우리가 그렇잖아요. 가문의 굴레에서 빠져 살 뻔 했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자꾸 아버지, 어머니를 닮아가지고 실패한 아버지 어머니의 삶이 있잖아요? 가난, 음란, 낙심, 포기, 불평, 원망 이런 것들.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무식하게 살지 않으려고 해도 할 수 있는 환경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은혜입니다. 제가 진짜 하나님 은혜인 것 같습니다. 저는 주일날 설교를 들으면 설교가 진짜 막 이해가 되었습니다. 교회 다닌 지 얼마 안 됐는데 속속들이 이해가 되고 스펀지처럼 빨아드렸습니다. 저는 여러분 교회 다닌 지 1년도 안 돼서 대 예배,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다 참석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처럼 뒤에 앉아 있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데 저는 신앙생활 할 때부터 앞자리를 한 번도 목사님과 제 사이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게 고등학교, 대학교 때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가 너무 궁금한 것입니다. 솔직히 목사님 설교가 발음이 좋지도 않으셨고 무슨 말 하시는지 잘 몰랐습니다. 설교 들을 때는 잘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으로 그 본문을 일주일 내내 봤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달았냐면 성경을 몇 번 산지 모릅니다. 고등학생이 학교 가면 성경책부터 폈습니다.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 학교에서 별명이 이미 그 때 오목이었습니다. 오목사였습니다. 아이들이 목사라고 놀렸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목사 같이 살지는 않았습니다.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고 운동도 좋아하고 그래서 괜찮았는데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이 저에게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그러냐면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나를 하늘의 별과 같이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존귀한 자로 만드시겠데요. 우와 희망이 있더라고요. 나 같은 자도? 예. 누구나. 그래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금요일에 가서 하나님 저 사용해달라고. 저 축복해달라고. 그런데 금요일에 가서 축복해달라고 사용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게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신학교에 가려면 공부를 해야 되고 대학에 합격을 해야 되겠더라고요. 공부를 되네? 그전에는 공부를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지금 깨달음이 뭐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만 깨닫는 것이 아니고  그 깨달음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뭔가를 해야 되겠는데 고등학교 때는 신학교를 가기 위해서 공부라는 것을 해야 되겠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지?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데.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닐 때. 그래서 교회 친구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수능 공부 어떻게 해야 돼? 학원 다녀.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는 대학을 보내지 않으니까 삼성전자, 현대전자를 보내지 대학을 보내지 않으니까 공부하려면 종합학원을 다녀. 그래서 종합학원을 등록했습니다. 누나들 꼬셔서 학비 달라고 해서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공부하고 공부하고. 정신 차리고 예배 드렸습니다. 왜? 저는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싶었습니다. 그 속에 있으니까 하나님이 지혜도 주시고 명철도 주시고. 그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과 불에 함몰되지 않고 지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스라 6장13절-22절로 오늘 본문을 설명해보려고 합니다. 

 

(13)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 (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15)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16)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하니 (17)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할 때에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드리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18) 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순차대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니라 (19)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2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22)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_에스라6:13-22

 

13절. 뭘 신속히 준행하냐면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습니다. 

14절. 아닥사스사 왕 때 성전 건축이 끝난 것입니다. 

15-18절. 율법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1장에 나오는 율법대로 제사 드린 것과 이 본문은 다릅니다.

19-21절. 몸을 정결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1장에서 예배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이것이었습니다. 22절이 핵심입니다.

22절. 하나님도 즐거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뭘 하셨냐? 정말 중요합니다. 에스라서 6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고레스 왕이라는 사람을 세워서 갑자기 이유도 없이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 포로로 잘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갑자기 너희 나라로 돌아가, 성전 재건해, 성전 다시 지어. 그게 고레스 왕만 그랬냐? 다리오 왕도 그랬고 아닥사스사 왕도 그랬습니다.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냐면 왜 유대인들에게 이방 나라의 왕들이 호의를 베풀었을까? 물론 정치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하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이야기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뭐냐면 가만히 살펴보면 선지자 학개, 스가랴, 에스라. 지금으로 말하면 목회자들이 하나님 앞에 깨어난 것입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보니까 우리가 그동안 신앙생활을 율법을 오해했구나. 그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와 같은 믿음의 성도들이 그 당시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 1장을 읽어보시면 알잖아요. 느헤미야가 성공한 정치인이었고 바벨론에서 성공한 행정가였습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성전 건축하러 갈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바벨론에서 떵떵거리면서 살만큼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포로의 가문이었지만. 그런데 느헤미야가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밤에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우리 민족의 성벽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고 우리 유대인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너무 궁금하니까 자기가 실력자니까 사람을 보냈습니다. 알아봐라. 가서 알아보고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성벽이 이방인들에게 노략질 당하고 다 파괴되고 다 빼앗기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참하게 삽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이 때를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은사, 달란트를 주셨구나. 나에게 이 때를 위해서 하나님이 바벨론에서 성공된 삶을 살게 하셨구나 그렇게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자기 민족,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성전을 마음 아파했습니다. 선지자들이나 느헤미야와 같은 성도들이. 그것 때문에 정확히 시간표를 맞춰서 고레스를 세우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뭐하고 비슷하죠? 종교개혁과 비슷합니다. 100년 동안 로마 가톨릭이 말도 안 되는 율법으로 백성들을 착취하고 거짓 선동하는 로마 가톨릭을 향해서 종교개혁자들이 양심 있는 목회자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성경 이야기를 하고. 그때 성주들, 전문가들, 신아에 신실한 사람들이 이들을 보호하고. 그 때가 차매 하나님이 인쇄술을 개발시켜서 발전시켜서 타이밍을 딱 맞추셔서 종교개혁이라는 것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다시 일어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다시 주신다고 믿습니다. 역사하신다고 믿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최선을 다해서 사업하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성실하게. 우리의 모든 은사들, 우리의 모든 달란트들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때가 차매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성전 봉헌식을 할 때 속죄제를 드리고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말씀대로, 모세의 율법대로 유월절을 지켰는데 22절에 즐거움으로 지켰다고 합니다.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_에스라6:22

 

이사야 1장도 모세의 율법을 지켰지만 즐거움으로 지키기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우상을 탐했고 쾌락을 탐했지만 이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즐거움으로 예배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너무 기뻐하셔서 그들이 성전을 건축할 때 여러분 노예들이 성전건축을 얼마나 잘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 돌려서 앗수르의 지원을 받아서 성전 건축하는 손에 힘 있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걸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교회 건물 지을 때 이 설교를 하시는데 이 성전이 아니잖아요. 가스펠교회 건물 짓는 내용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구속사를 세우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엉터리 목사들이 교회 건물 지을 때 느헤미야 말씀을 가지고 짓더라고요. 아니죠? 이 교회는 그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 우리 삶의 성전, 구속사를 이루는 구원이라는 것을 이루는 성전을 세울 때 느헤미야 말씀을 인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깨어져 버리고 무너져버린 우리의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보셔야 합니다. 왜? 이게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회복된 교회들을 통해서.

 

- 다시 모을 것이며_이사야43:5-7, 열왕기하17:6, 역대상5:26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_이사야43:5-7

 

이게 이스라엘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_열왕기하17:6

 

포로로 끌고 가서 한 곳에 모아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흩어놓은 것입니다. 의도적으로요. 역대상 5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_역대상5:26

 

이때부터 이스라엘 유대민족은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시죠? 왜 흩으셨는지. 왜 뭇별이 되게 하셨는지. 그들이 은혜를 힘입을 때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는 그곳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들, 딸들을 동쪽과 서쪽과 북쪽과 남쪽에서 불러오겠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아래 구원 받을 자를 모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인위적으로 가스펠교회에 모여라는 모임도 되겠지만 진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전 인류를 통틀어서 말세 때까지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모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속사라고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누구를 통해서 허락하셨나면 본인이 직접 하시는 일이시지만 우리 인간을 통해서 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 인간을 통해서 하셔야 하냐면 우리가 그 일을 함으로써 원래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있고, 우리가 존귀한 자가 되고 의의 면류관을 받으며 천국에 입성할 수 있게 허락하시기 위해서.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선교와 전도를 우리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예에서 해방시켜서 노예를 돈 주고 값싸게 사서 그전처럼 노예처럼 부려먹거나 그전처럼 노예로 계속 살도록 놔두면 나는 나쁜 사람이고 그건 나쁜 신입니다. 그런데 노예보고 이야기하는 너 이제 노예 아니야, 너 이제 자유인이야. 그런데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돼. 네가 자유인의 삶의 규칙도 배워야 돼. 룰도 배워야 돼. 식사습관과 예절도 배워야 돼. 네가 성공해야 되는 이유도 알아야 돼. 그러면 그것은 네가 스스로 노력해야 되는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민족, 노예로 아직도 있는 너희 민족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래서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제도를 반대했고 미국에 수많은 흑인들이 마틴 루터킹 목사들이 그런 혜택을 받아서 목사가 되고 경제인이 되어서 노예제도를 해방시키는 주역들이 된 것입니다. 지금 인류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것을 구속이라는 것으로 여러분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방의 우상들에게 갇혀 삽니다. 내놓으라. 하나님이 내놓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남쪽에도 북쪽에도 내놓으라. 내가 하나님의 백성, 존귀한 자 나의 증인들을 내놓을 테니깐 내놓으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복음이 들어가면 어떤 민족이라도 어떤 우상 숭배라도 공산국가라도 어떤 가정,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살리시는 것을 봅니다. 선교사, 목사들이 믿음의 성도들이 직장, 가정에 들어가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왜요?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그래서 가정 복음화, 민족 복음화, 선교를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진짜 목적인 부흥을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흥이 우리 가정에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 일을 하는데 아주 중요한 신앙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합니다.

 

Ⅲ.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_이사야43:8-13, 시편119:97-105, 야고보서1:5, 고린도전서1:27-31, 12:11, 31, 13:1-13

 

(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9)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는데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알려 주며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겠느냐 그들이 그들의 증인을 세워서 자기들의 옳음을 나타내고 듣는 자들이 옳다고 말하게 하여 보라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12)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_이사야43:8-13

 

8절. 이게 우리가 해야 될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그런데

9-10절. 노예를 해방시켜 왜 공부를 시키는가? 네가 나를 믿어, 내가 너를 지원해줄게, 공부시켜줄게. 네가 최선만 다해. 이유가 뭐에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민족들 그들에게 증인으로 세우려고. 우리는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아도 돼. 우리가 네팔에 하려는 선교전략입니다. 여러분 네팔 아이들 네팔에 놔두면 네팔의 문화, 종교, 피해의식에서 못 벗어납니다. 우리 네팔 아이들을 머지않아 시스템을 갖춰서 한국으로 불러와야 합니다. 한국에 불러와서 이 예배, 이 신앙을 가르치고 또 눈을 열어줘야 합니다. 교육을 배우고 또 목회자가 될 친구들은 신학교를 보내고.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다시 너희 나라가서 너희 나라를 너희가 살려라. 그게 네비우스 선교전략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금 구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 축복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증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증인이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진짜 신앙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조직, 가스펠교회라는 조직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가스펠교회라는 조직에 속하면 구원 받는 줄 알고 소속감만 가지고 사는 것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어제 밤에 제 개인방송에 이야기했습니다. 가스펠교회가 중요하고 오승주 목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승주 목사는 끊임없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려고 발버둥치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혹 행여 제가 실수할 수 있고 제가 넘어질 수 있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럼 가스펠교회 성도들이 다 죽는 것입니다. 그게 로마 가톨릭이었습니다. 면죄부를 팔아 제끼는 사기꾼 같은 사제들 앞에 성도들이 전부 면죄부를 사고 틀린 구원의 길을 갔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무엇이냐?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하도록. 그게 좋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게 만들어주고. 하나님 앞에 가도록 서포트 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 목회자의 역할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목회자를 우상 삼으면 안 됩니다. 물론 감사해서 목회자가 레위지파니까 열한 지파가 물질이나 이런 것을 도와서 먹고 살게 하는 것이 맞아요. 그러나 목회자를 우상시하면 안 됩니다. 그 어떤 훌륭한 목사라도 예수님의 자리에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도 여러분과 똑같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아이스크림 좋아하고 커피 좋아하고 노는 거 좋아하고 휴가도 가고 싶습니다.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목회자이기 때문에 저하고 여러분하고 다른 것은 저에게 하나님이 계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목회자인 나에게만 계시가 있냐? 아닙니다. 분명히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는 택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여러분에게도 하나님말씀의 계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게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신앙이 극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관람하는 곳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앉아 있다가 어, 저 말씀을 내가 인용하면 성공하겠네 하고 적고. 아 이러고 가는 것입니다. 입도 벙긋 안 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예배입니까? 한국교회 예배 다 죽어버렸습니다. 극장, 영화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과정이 중요하지 결과가 중요해?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저도 옛날에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 결과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좋은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 아시죠? 과정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좋은 과정, 그에 합당한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왜 중요하냐?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죄의 습성들, 어떤 환경에 매여 살면서 핑계되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거리들. 제가 지금 그 이야기를 간증을 통해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이러니깐 나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 난 술 먹고 아버지처럼 살아도 남이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게으르거나 세상을 좋아하거나. 그래서 거기에 맞는 열매를 맺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책망합니까? 네 처음 신앙이 나중 신앙보다 좋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보다 죽을 때 훨씬 좋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날 때보다 죽을 때 더 못해서 죽는 것이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는 예쁘기라도 귀엽기라도 했지. 사랑스럽기라도 했지. 죽을 때 장례 치를 때는 인생을 잘못 살아서 원수도 많이 만들고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뭐에요? 처음 신앙보다 나중 신앙이 더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인간도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죄인으로 살지 않고 이상한 짓하면서 살지 않고, 나쁜 짓 하면서 살지 않도록 교육받는데 신앙교육은 그런 의미에서 엄청 중요하겠죠. 신앙교육. 우리가 나중 신앙이 좋아야 합니다. 신앙은 자라야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무지한 것은 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잠언 서를 읽어보세요. 지혜가 없는 것은 죄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음녀, 이세벨에 다 넘어간다고 합니다. 물과 불의 환난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고 내 하나님으로 믿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우리 삶에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처럼, 에스라처럼, 학개처럼 기쁨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식을 하는데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하나님 말씀을 낭독했는데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물로 감사를 표현했는지. 춤추며 소고 치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98)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99)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100)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04)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_시편119:97-105

 

97-98절. 주님을 사랑하는데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하도록 사랑했다고 합니다. 율법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은 율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잘못하면 제가 또 율법주의자가 될 수 있는데. 이게 중요한데 왜 중요하냐면 하나님이 율법을 지켜라 지켜라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99-100절. 하나님 말씀이 세상의 원수 마귀보다 더 우리를 지혜롭게 해서 구원을 깨닫게 한다고 합니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낫게 하신다고 합니다. 

101절. 내가 주의 말씀을 지켜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않는데 안한 길로 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그래서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102절.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주님이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하신다고 합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우리 삶이 불신자들에게 증인이 될 만한가요? 끔찍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아니면 원수, 세상에게 함몰되어서 살아가지는 않나요? 악한 길로 가지 않아야 하는데 자꾸 악한 길로 가고 있지 않나요? 그 말은 내가 주의 법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말 뿐이고 법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 학사 에스라들이 이스라엘을 회복하는데 주님 사랑합니다, 좀 회복시켜주세요 라고해서 회복이 됐나요? 아니에요. 율법을 재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켰던 것이 왜 우리가 포로가 됐지? 고난을 당하지? 아,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이게 아니구나. 모세의 말씀이 이런 의미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그 의미들을 성령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율법대로 회복해서 성전회복이 된 것입니다. 저는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자주 어울립니다. 예전에 그랬습니다. 지금은 모임을 자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코로나도 코로나이지만 제가 실력을 준비하고 양질의 설교를 하고 나중에 사람들하고 어울리다가 내용은 하나도 없고 실력도 없으면 팽 당하고 버림받잖아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동창회 가는데 자동차를 빌려 타고 명품 백을 빌려서 가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동창회 가서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진짜 성공한 것이 아니잖아요. 차 빌려가지고 명품 옷 빌려서 가는 게 무슨 성공한 거예요? 사실 진짜 성공한 사람들은 동창회를 가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진짜 내 삶이 존귀한 사람들은 그런 모임에 굳이 가서 자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디 강의나 불려 다니고 어디 가서 멘토가 되어달라고 부름 받아서 갑니다. 우리가 모임 같은데 잘 가면 안 됩니다. 맨날 희희낙락거리고 내용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고.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 장례식 때 아무런 열매 없는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인생을. 교회에서 교사 한 번 못 해보고 죽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내 신앙을 간증도 못 해보고 죽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얼마나 비참해요.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라고 핑계하지 마시고 하나님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이 시편기자처럼 종일 작은 소리를 읊조릴 만큼. 왜? 작은 소리로 읊조렸을까요? 일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놀고먹은 것이 아니라 너무 삶이 힘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읽을 시간이 어디 있나요. 이 사람은 아예 암송해서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릴 것입니다. 우리 할 수 있잖아요. 할 수 있잖아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_야고보서1:5

말씀을 깨닫는 지혜가 부족하면 깨닫게 해달라고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 주신다고 합니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_고린도전서1:27-31

 

27절. 이거는 조금 다릅니다. 왜 우리가 미련한 자가 되어야 되냐? 

30절. 왜 우리가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하냐?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혜가 되고 의로움이 되고 거룩함이 되고 구원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미련한 자라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예수를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썼어요? 바울이 썼습니다. 바울이 진짜 미련했습니까? 진짜 가난했습니까? 바울은 그 당시에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고 가장 배경이 좋은 사람이었고 가장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이 미련한 자를 택하신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의인화해서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예수님을 만나보니까 예수님이 아니면 천국에 갈 수 없구나.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 인생을 가장 값지게 살 수 없구나.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신앙에 성공하는 거구나 라고 고린도전서에 간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 아, 나는 가난하고 미련하니까 위로받아야지 그러지 마세요.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31절. 주 안에서 마음껏 자랑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축복을 나누어주고 살기를 원합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_고린도전서12:11

 

누구에게나 준다고 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니까.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_고린도전서12:31

 

왜요? 큰 은사를 왜 사모하라고 합니까?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예수 믿으면 하나님이 길을 보여주십니다. 저는 길을 보았습니다. 저희 가정에서 아무도 길을 못 보셨는데 저는 예수 믿고 봤습니다. 하나님이 저보고 목회자가 되래요. 내가 너에게 계시를 줄 테니까. 목회자가 되라고 합니다. 저는 봤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노력해서 좋은 목회자가 되면 우리 가정을 구원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변화되고 새 삶을 살면 우리 누나, 형님, 조카들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길을 보여주신데요. 그런데 좋은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좋은 은사는 선지자, 교사가 되기도 하고 각양각색의 은사를 주신다고 합니다. 느헤미야, 학사 에스라 같은. 학개 같은.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은사를 사모하고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해놓고 고린도전서 13장에 결론은 이렇게 내고 있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_고린도전서13:1-13

 

1-2절. 지금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신가요? 이 모든 은사를 가지고 있는데 사랑이 빠지면 꽹과리가 된다고 합니다. 시끄러운 꽹과리, 쓸모없는 것들이 된다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이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리새인들이 훌륭한 율법자들이 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이 사랑이 빠져버리니깐 하나님 앞에 율법주의자가 되고 범죄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11절. 어릴 때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제가 마흔 다섯 살인데 열두 살처럼 생각하면서 살면 되겠어요? 우리 한빈이 여섯 살인데 여섯 살처럼 생각하고 살면 얼마나 부끄럽겠어요. 맨날 아이스크림 달라고 떼쓰고 이러면 될까요. 뭐라고 이야기해요? 

12절. 이게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과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수 있도록 어린 아이의 때를 버리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신앙생활을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린아이의 때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볼 수 있도록. 그러면서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아멘. 욥이 이 고백을 했습니다. 환난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주님을 부분적, 지식적으로 알았지만 환난을 통과하고 나니깐 내가 주님을 직접 뵈옵는 것 같습니다. 이게 무엇인가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도 사랑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죠? 돈이 필요가 없습니다. 재벌 2세들이 결혼해서 돈 많은 사람들이 결혼해서 결혼 생활이 깨지고 나쁜 짓하고 범죄하고 너무 많이 봅니다. 저는 탤런트 모델이었던 한 분 좋아하는 분이 있는데 남편이 범죄자인줄 모르고 결혼한 것입니다. 그게 밝혀지고 이혼했잖아요. 아이를 키우는데 정말 안타깝더라고요. 사랑이 없으면 진실할 수 없고, 내 자존심으로 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볼까요? 이 사랑에는 그래서 율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율법이 필요합니다. 자, 내가 내 인생을 성공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필요하죠?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사랑에는 율법이 필요합니다. 진짜 사랑하잖아요? 그러면 율법이 반드시 동반이 됩니다. 이것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은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증인이 되기 위해서 많은 은사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꽹과리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으면 교회가 목사가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된 이유가 그리고 가스펠교회를 개척한 이유가 하나님을 마음껏 눈치 보지 않고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좀 커지고 숫자도 늘어나고 교역자, 직원도 많아졌는데 가끔은 제가 교역자, 직원들 눈치 볼 때가 있더라고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예전에 좀 됐습니다. 우리가 금요예배를 시작하면서 제가 몇 번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야라고 잘하지 않지만 교역자들 보고 금요예배 끝나고 불 바로 켜지마. 성도들이 한 명이라도 끝까지 기도할 때까지 교역자들이 같이 기도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다 가고나면 불 켜. 제가 몇 번 이야기했는데 10분 지나면 불을 켜버립니다. 야, 왜 켜? 물어봤더니. 성도들이 지하철 끊기고 버스가 끊기니깐 빨리 보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들을 위한 마음입니까? 교역자들 자기들이 빨리 가려고. 그런데 제가 제 성격상 한 번 이야기한 것을 두 번 잔소리를 못하는 성격입니다. 또 그러려니 하고 지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해보니깐 너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집니다. 여러분 그것은 경제적으로 생각하고 세상 적으로 생각해도 멍청한 짓입니다. 성도들이 한 명이라도 남아서 뜨겁게 기도하고 변화 받아야 교회는 부흥이 되고 교역자들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게 멍청한 짓이에요. 이게 영적으로는 완전 미련하고 무지한 짓 아닙니까? 일주일 내내 세상에서 치여서 겨우 금요일에 은혜 받으려고 왔는데 불을 켜? 빨리 가라고? 한 명이라도 기도하고 있으면 그게 얼마나 값진 귀한 기도의 눈물에요? 그러면 우리가 같이 기도하고 우리도 같이 은혜 받고 교회가 그래야 살아나고 부흥이 되는 것인데.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전부 이기심과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경험을 못하나요? 존귀한 자, 하나님이 기름 부으시고 역사하시고 사용하시는 것을 영원히 경험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운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 하나님 사랑하는 것 뜨겁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군가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비교가 아닙니다. 사랑은 어떤 행위로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처럼 열심히 제사 드리고 예배드리고 헌금 드리는 사람을 기뻐하셨나요? 아닙니다. 가난한 향유 옥합 하나를 가지고 가서 주님께 다 드린 그 여인을 훨씬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사랑은 평가가 아닙니다. 돈 많다고 아내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탤런트 김재우씨 인가요? 그 부인이 책에 그런 글을 썼습니다. 자기는 진짜 자기 삶이 비참해서 죽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남편을 만나서 이 남편이 자기를 계속 괜찮다고 하니깐 내가 진짜 괜찮은 사람인가 생각이 들더래요. 그래서 진짜 괜찮은 사람처럼 살려다보니깐 자기 수입의 절반을 어려운 사람을 돕고 미혼모를 돕고 이렇게 사는데 진짜 보람되게 산다는 것입니다. 남자 한 명 잘 만나서 자기 인생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해주는. 공감이 되더라고요.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잖아요. 아무리 실력 있는 목사라도 타락하고 변질됩니다. 그러니 저희 교회를 개척할 때 제가 표어로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뜨거워야 합니다. 물론 교회는 건물, 재정문제도 있고 교회는 사람문제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 지나갑니다. 물과 불이 그것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우리 신앙. 하나님의 사랑이 뜨거워보세요. 환경이 문제가 되나? 여러분의 과거가 문제가 되나?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뜨겁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이 뜨겁다는 것은 율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 우리 인생을 열매 맺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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