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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 Letter. '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

Gospel Letter. '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


저에게 명절은 온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날입니다. 저 같이 대가족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명절 때 가족이 모이면 저는 목사가 아니라 ‘막내 승주’가 됩니다. 허드렛일도 하고 심부름도 하고 막내로서 몸에 밴 일들을 합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기도했고 오랜 세월이 지나 든든한 믿음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많은 복음 가진 분들이 가정 복음화를 두고 저에게 상담을 요청해 올 때 저는 마음이 불편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말투와 행동들을 볼 때입니다. 우리의 복음이 옳지요. 우리의 방향도 옳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메시지도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옳을 때 교만하기 쉽습니다.

'나는 당신보다 더 많이 알아. 당신은 고칠 것이 많아. 당신이 나와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당신은 도움이 필요해. 당신은 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해.'

물론 복음을 누군가는 전해줘야 합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전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이나 문자가 전부가 아니지요. 복음메시지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은 너무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교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고, 욕심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만족, 자기애, 자기 자랑을 칭송하는 현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_누가복음14:11’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복음메시지인데 그런 삶보다는 메시지가 잘 정리되어있어서 말을 잘하는 것으로 복음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처음 보는 불신자들에게는 잠깐의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오랫동안 함께 한 가족들에게는 거의 쓸모없는 것이지 않을까요?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_잠언15:4'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행복이 없는 사람은 말이 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메시지인 줄 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법 아닌가요. 듣는 척하고 뒤에서 그 메시지에 대해 부정적인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러하답니다. 그래서 명절 때가 되면 예수님을 믿는 가족들과 불신자 가족들이 다투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_ 잠언13:9-10'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으려 합니다. 그것이 자존심이 상하거나, 마음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릴 사랑하기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셨지요. 그 사랑을 알면 예수님과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욕심이나 교만은 당장의 효과가 있어 보이지만, 결코 우리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결코 교만과 욕심을 통해서는 예수님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문제가 되고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주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과 교만은 마귀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_빌립보서 2:21'

낮은 마음과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이 하찮아 보이고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그 마음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 있으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그것들이 묻어나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그것은 어떤 말보다 강력한 힘이 있지 않을까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_빌립보서2:5-11'

추석 명절 동안 가스펠 가족들의 마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그 마음으로 낮은 곳에서 부모와 형제, 그리고 후대들을 섬긴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복음메시지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_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승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