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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9 주일 1부 예배


2015-11-29 주일 1부 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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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성공과 실패_고린도전서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_고린도전서9:25’

세상은 자꾸만 그런 쪽으로 몰아갑니다. 성공했냐 실패했냐 그래서 사람들에게 쾌락과 흥분을 주기도 하고 낙심과 좌절을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공과 실패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성공했을 때 바로 광야로 가게 하셨습니다. 무려 그곳에서 10년을 넘도록 훈련을 하셨습니다. 무슨 훈련이지요?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좋아했고 또 그가 광야로 쫓겨 가자 불쌍하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가 다윗에게는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곳에서 변화가 되었습니다.

성공과 실패라는 개념은 세상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패를 주시는 것 같지만, 은혜를 주시고 성공을 주시는 것 같지만 감사를 주십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환경과 상황은 곧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에 접속되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길이 되시나요? 어떤 길인가요? 영원한 세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접속되어 살도록 합니다. 만일 그것을 모른다면, 육신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니 그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서로 싸우고, 서로 비방하고, 서로 비교하고, 성공과 실패를 기준삼아 살아갑니다. 성공하면 행복하고 실패하면 불행인가요?

여러분, 제가 오늘 이 본문으로 설교준비하면서 여러분과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짜 축복은 우리가 세상에 영원에 접속해서 살아가도록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제가 설교를 잘하고, 또 여러분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권면해도 여러분이 믿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믿으려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역보다 더 기도하는 부분이 훨씬 큽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깨닫도록 여러 가지 사건들을 주십니다. 그렇지요? 성공한 것 같지만, 실패로 인생이 끝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대로 실패한 것 같지만, 성공으로 인생이 끝나기도 합니다.

저는 가난한 농부의 8남매 중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글을 모르셨습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이셨습니다. 가난해도 이렇게 가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완전 실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 안에서도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 참 감사하게도 저는 믿음의 사람을 좇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도 어려움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조금 위기처럼 보이는 상황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기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임재 속으로 들어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성공과 실패가 아닌 하나님의 영원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자들과 그렇지 않는 자들을 보려고 합니다.

Ⅱ. 예수님의 장례식에 쓰임 받은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1. 부활을 믿어 쓰임 받은 자들

1) 아리마대 부자 요셉_마태복음27:57-60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_마태복음27:57-60

가장 먼저 아리마대 부자 요셉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요셉을 그저 부자로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라는 지역 사람인 요셉은 혈통도 대단했고, 돈도 많고 권력과 지위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어울리기가 꺼렸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환경을 뛰어넘기가 어렵습니다. 교양 있는 그가 무식하고 거짓말도 하는 어부 출신의 제자들과 아무렇지 않게 교제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다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오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예수님의 무덤을 파고 시체를 닦고 장례를 치릅니다. 저는 부자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군에서도 높은 계급을 가진 장교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정결하고 순종하고 진실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규모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멋지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시절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두가 외면하였습니다. 외면할 뿐 아니라 대적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부자 요셉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장례식을 다 준비합니다. 장례식을 치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사람들의 비난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부활을 바라본 사람이 분명합니다.

2) 니고데모_요한복음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_요한복음19:39’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시체를 달라 했고 장례를 치르는 동안 한 사람이 더 나타납니다. 바로 예수님에게 거듭남에 대해 묻고 떠났던 니고데모입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함께 장례식을 치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서 잡힐까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처형될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했던 니고데모가 찾아왔습니다. 나중에 이런 인물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름도 없이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이들은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장례식을 목숨을 걸고 치렀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고비가 있습니다. 질문도 해야 하고, 사람들의 수준 때문에 갈등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생명을 건 적용을 해야 합니다.

3)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_마태복음27: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_마태복음27:61’

두 사람처럼 실제적인 적용을 하지 않았지만, 주님을 사랑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자들입니다. 장례를 치르는 모습도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떠난 후에도 무덤을 지켰습니다. 이유가 뭐지요?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조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신학이 필요한가요? 조직이 필요한가요? 수준이 필요한가요? 우리가 가끔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데 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자체가 걸림돌들입니다.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처럼 부자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고, 연약한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연약한 여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보았습니다. 구원 받았다는 사람은 환경이나 상황 자신의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데, 부활에 참여하는데 무슨 그런 것이 필요합니까?

2. 부활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사람

1)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_마태복음27: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_마태복음27:62’

반대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의논을 합니다. 자기들이 세력을 모으고, 대단한 시스템을 가지고, 권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빌라도까지 자기들 편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그 기세가 등등했을까요? 예수님을 죽이고도 또 모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니까 그 날이 안식일인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다음 날이라고 그냥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이미 신앙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무슨 말씀을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다. 한번 불신앙이 들어오면 계속해서 불신앙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마다 새로운 은혜를 기도해야 합니다. 결국 그들은 그 권력과 대단한 세력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을 ‘저 속이던 자’라고 하는 자들_마태복음27: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_마태복음27:63’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을 ‘저 속이던 자’라고 표현합니다. 저 속이던 자라니요. 예수님이 백성들을 속여서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했으니 그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작당을 하는 것입니다. 속였다면 그 말을 믿지 않아야 하는데 혹시 진짜 부활하면 어떻게 하지 그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저 속이는 자라고 거짓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백성들을 단 한 번도 속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 3년 동안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겠다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시는데 그걸 막으려고 모여서 악한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속이는 자라고 어디서 대충 소문을 듣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수준으로 판단합니다. 한 번도 제대로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고 한 번도 제대로 예수님과 동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해도 아닙니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귀히 여긴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악한 계획이 오히려 부활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머리가 좋고, 재능이 많고, 재물이 많아도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3) 무덤을 지키는 자들_마태복음27:64-66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_마태복음27:64-66’

재미있는 것은 제자들은 주님이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하신 것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왜 그렇지요? 부활하면 큰 일 나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악한 마음이나 동기를 가진 자들은 철저합니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일을 처리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섬겨야 하는데 믿음이 없으니 자신들의 능력을 내세웁니다. 예수님이 살아날까 두려워서 무덤을 지키게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힘써 지키게 합니다.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고 밧줄로 동여맨 후에 흙으로 인봉까지 합니다. 공기도 통하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완벽하게 무덤에 가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님은 영접했는데 세상 쾌락 때문에, 성공 때문에, 세력이나 지위 때문에 예수님을 가두고 방해하고 그렇습니다.

Ⅲ. 사라진 부활신앙

1. 무엇에 묶여 있습니까_고린도후서4:6,10-12

저는 항상 뭔가에 묶여서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능력이 없을 때는 능력이 없다고, 가정의 문제가 많을 때는 가정의 문제라고, 젊을 때는 놀면서 시간이 부족하다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이유는 은혜를 못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은혜 받고 보니 능력이 문제가 아니었고, 가정도 문제가 아니었고, 시간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같은 문제 속에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다른 사람을 도왔습니다. 생각의 차이 정도가 아닙니다. 저는 훌륭한 사람도 되어야 하고, 성공한 사람도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왜 하나님이 나를 이런 환경에 묶어두냐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제 삶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정작 제 자신을 묶고 있는 것은 제 상처였고 열등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처럼 세력과 성공 욕이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_고린도후서4:6’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부활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것은 묶인 상태이지만 자유가 있는 삶이 됩니다. 영원한 세계와 접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_고린도후서4:10-12’

2. 사라진 부활신앙_고린도후서4:16-18

그런데 왜 그런 부활신앙이 우리 인생에서 사라질까요? 사실 제자들이 그랬다고 볼 수 있지요? 그 대단한 제자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결국 마가다락방에서 모여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여서 바뀌었습니다. 교회가 그런 역할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좇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라도 눈에 보이는 것을 좇는 사람과 이면의 것을 좇는 사람은 다릅니다.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연예인들이나 스포츠 스타들을 보세요. 그들이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을 좇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면 화려한 쾌락의 유혹에 빠집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기량이 하락하여 은퇴할 때 그 공허함을 이기지 못해 이상한 것들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좋은 가치관을 좇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꿈이 돈이 아니고 성공이 아닙니다. 그러니 멋있게 나이가 듭니다. 사람이 가치관만 달라도 달라집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하물며 신앙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_고린도후서4:16-18’

우리는 썩어질 것들을 보지 마시고 영원한 것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배가 회복되고 변화되었습니다. 겉 사람이 아니라 속사람, 즉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야 합니다. 내 영혼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 영원에 쓰임 받는 인생_고린도후서5:17-19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_고린도후서5:17-19’

요즘은 기도가 없어지는 시대라 합니다. 무조건 짧고 간단해야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간단 간단해야 성도들도 좋아한다고 교회의 모든 예배가 간단명료해집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너무 지친 성도님들이 교회에 와서도 지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저도 교회 시스템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은 예배나 기도 말씀묵상마저 간단해지면 안 됩니다.

부활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부활에 맞춰서 사는 것입니다. 그걸 믿기 때문에 그렇게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기 때문에 사모하기 때문에 예배도 드리고, 묵상도 하고, 전도도 합니다. 단순히 기도해라, 예배를 제대로 드려라 정도가 아닙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관심과 관점이 거기에 집중이 됩니다. 사실, 사람하고 화목하려면, 원수 같은 가족과 화목하려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화목하게 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말씀이라 했습니다. 말씀입니다. 말씀은 부활신앙의 핵심입니다.

마치 부활 신앙 이러면 허황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말씀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주일날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했으면 반드시 다시 들어야 합니다. 깨닫지 못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미치겠다’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말씀이 들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는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핑계를 쉽게 가집니다. 집중이 안 된다, 피곤하다, 아이 때문이다. 그렇다 칩시다. 그러면 누구 손해입니까? 잘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우리교회 성도님이 운영하시는 치료센터가 있습니다. 이 분이 저를 위해 거기에 등록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주 가기만 하면 되는데 바쁘다고 못갑니다. 컴퓨터를 많이 하고 잠을 못자니 몸이 좋지 못할 때 가기만 하면 됩니다. 멍청하게 아프다고 말만 하고 안가면 내 손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을 소중히 여긴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부활신앙은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것입니다. 이단 사이비처럼 허무맹랑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살 때 우리가 부활신앙을 살 수 있습니다.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나 니고데모나 마리아들은 말씀을 귀담아 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것은 잘 못해도 됩니다. 그러나 말씀 하나만큼은 제대로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묵상일기를 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해서 내 것으로 적용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말고 다른 교회가 뭘 하든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말고 우리는 성경대로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섬기는 직분들을 가지십시오. 저 어린 아이들에게 말씀을 심겨지도록 교사로 헌신하시고, 말씀으로 화목하게 하는 미션홈장으로 섬겨주시고, 각 부장님들은 그 말씀의 은혜가 있도록 예배를 섬겨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중직자님들은 영혼을 섬겨주시면 됩니다. 교회는 그렇게 말씀이 우리의 이웃에게 가족들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이 주된 사역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설교 한편을 준비하는데 평균 15시간정도 걸립니다. 사실 전에는 지교회를 다니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본부의 일을 섬기는 시간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나 지금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시간이 훨씬 더 소중하지. 설교 준비할 때 반드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준비하는데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눈에 안 보이는 여러분의 속사람을 말씀으로 세우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시길 바랍니다. 예배에 투자하시길 바랍니다. 투자라는 단어가 어색하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하셔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투자하셔야 합니다. 부활신앙을 우리가 회복해서 정말 초대교회처럼 어려운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복된 성도로 살아가십시다.

 ✔ 주님 세상은 성공과 실패로 저희들을 속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실패한 듯 하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게 되고, 성공한듯하나 그곳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의 축복을 놓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구원받아놓고도 세상의 성공과 실패에 붙들려 살 때가 많습니다. 환경과 상황, 상처와 열등감에 묶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도 은혜를 주시고, 말씀을 주시려고 예배의 자리로 부르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여주세요. 그래서 부족한 내 환경도, 연약한 내 상황도, 힘들고 어려운 내 가정도 모두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주신 선물임을 깨닫게 하여주세요. 하나님이 날 구원하시려고, 내 인생을 구원을 위해 사용하시려고 주시는 축복임을 깨닫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