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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8-06-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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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24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거짓 증언하는 자들

본 문 :

마가복음 14:53-65

오승주 목사

 

. 보이지 않는 사랑_고린도전서13:5,아가8:6-7,요한일서3:14,16

 

사랑이라는 단어는 위대한 단어입니다. 우리가 결혼을 할 때 상대방을 알고자 한다면 사랑해야 진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뭐든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해야만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류는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렇지요? 그것이 죄입니다. 그 죄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 우리가 말씀을 듣고 죄인 됨을 깨달으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하고, 은혜라고도 합니다. 성경을 보니 어떤 때는 전능하신 분으로, 어떤 때는 무서운 분으로, 어떤 때는 용서하시는 분으로 다양하게 하나님에 대해 묘사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하게 묘사하는 단어가 있으니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적, 핵심적, 중추적 속성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과 성품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 사랑에 대해 오해를 하고 믿지 못하는가 보니 성경은 이 땅과 반대가 되는 언어로 하나님의 사랑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_고린도전서13:5’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닌 타인 중심의 사랑입니다.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낯설고 이질적인 개념입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_아가8:6-7’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이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태양이 에너지를 방사하듯이 뜨겁고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그렇게 뜨겁고 많은 물도 끄지 못하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합니다. 그 사랑은 인간이 온 재산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받으면 생명이 생겨납니다. 생명을 위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법이 곧 생명의 법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_요한일서3:14’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_요한일서3:16’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끊임없이 사랑의 작업들을 하셨습니다. 그 작업이 너무 방대해서 때론 잘 깨닫지 못했고, 오해도 했습니다. 그 사랑을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하는 원망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하나님의 은혜가 깊어지니 이제 철이 들어 하나님의 사랑을 보니 눈물뿐입니다. 그만큼 이 사랑은 더없이 아름답지만 그것이 내게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쉽지 않았던 이유는 평소에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조화를 이루어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크니 그것을 깨닫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어둠에 익숙한 눈에는 오히려 환한 빛이 해()가 될 수도 있듯이 말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말씀은 인간의 크나큰 오해를 무릅쓰고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의 한 장면입니다.

 

. 사랑은 오해를 무릅쓰고

 

거짓 증언하는 자들_마가복음14:55-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_마가복음14:55-59’

 

예수님을 유다를 통해 팔려 드디어 말씀대로 공회 앞에 서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 그것도 타락한 재판장에게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대제사장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아예 결론을 내리고 심문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있어서 자신들이 정의롭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신앙생활을 많이 합니다. 내 이론과 내 삶을 증명하고자 거짓 증거를 찾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성실하지 못한 이유를 아버지나 어머니의 가난과 무능력을 탓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또 예를 들어, 제가 은밀하게 지은 죄들을 그저 이 시대가 그러려니 하고 합리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런 작은 이유들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어도 별 볼 일이 없다고, 교회를 다녀도 별 응답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맞을까요? 어떤 응답을 바라고 있기 때문인가요? 전부 세상적인 목적과 요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겨우 돈을 잘 벌기 위해서입니까? 겨우 좋은 직장 취직하기 위함입니까? 그것 때문에 우리는 거짓 증거를 찾고 있습니다. 진짜 증거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섬기지 않고 믿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니 이 세상에서 힘도 없고, 거의 거짓증인으로 살아갑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거짓증거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그것을 믿어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는 대신에 늘 다른 이유들을 찾습니다. 휴식이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다.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환경이 변화되면 잘할 수 있다. 상황이 바뀌면 잘할 수 있다. 과연 구원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요?

 

2. 그들의 두려움_마가복음14:60-61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_마가복음14:60-61’

 

그들은 사실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사랑을 베푸시지만,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십니다. 그들은 진짜 증인을 찾았습니다. 그 증인이 저 사람이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대제사장이나 종교인들이 분노를 일으킵니다. 왜 그럴까요? 감히 하나님의 성전을 헐뿐만 아니라 3일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 해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메시아라 하니 그렇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린다 했지만 실제로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 믿지도 않았고 준비도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메시야가 당장 앞에 있는 볼품없고 초라한 예수는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이 침묵하셨습니다. 따질 법도 한데, 기적을 베풀어 다 멸하실 법도 한데 그저 침묵하셨습니다.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그들에게 말입니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공이십니다. 자신이 스스로 무너지는 길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종교인들은 왜 그것을 그토록 두려워했을까요? 그들은 이미 그 시대에 기득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 되어 엉망진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 로마 권력과 타협하여 권력과 자리를 유지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와 자리, 권력이 사라질까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이 타락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곧 십자가의 은혜를 놓칠까 두려워하고 계시는 가요. 아니면 세상의 성공에 도달하지 못할까 두려우신가요?

 

3.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_마가복음14:62-6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_마가복음14:62-65’

 

결국, 그들은 예수님에게 신성 모독죄라는 죄명으로 사형이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판결이 내려지자마자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립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가난한 자들과 함께 했을 뿐이고, 버려진 자들을 섬겼을 뿐인데요. 아마도 예수님이 권력자들과 함께 자리하고, 어울렸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짓밟고 무시했던 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죽어도 싫었던 모양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들을 살리려고 말씀을 성취하려 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니 예수님을 그리스도야하고 비난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난 너같이 별 볼일 없는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 될 수 있겠냐 하고 인류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모함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지난날들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가난했고 또 배경이 없어 성공에 대한 상처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있는 척, 가진 척, 되는 척을 많이 했습니다. 목사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누구와 친하다' 이런 것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는 것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 한 번도 예수님을 기뻐하고,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이 감사가 되고, 예수님 때문에 내 죄악 된 삶을 고치려 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신앙생활로 축복받으려 했지 십자가가 보이는 신앙생활을 선택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는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인생 중에 지금도 그 십자가 사건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아무 힘도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장 그렇게 보였겠지요. 이런 인간이 뭐 부활한다고,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 참 증거를 가진 자의 길_마태복음23:37, 호세아11:1-4, 마태복음16:25, 히브리서5:9, 요한일서4:18, 데살로니가후서2:10.3:5

 

1. 참 증거가 있는 가_마태복음23:37, 호세아11:1-4

 

우린 거짓증거를 가지고 살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참 증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_마태복음23:37’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_호세아 11:1-4’

 

우리가 붙잡아야 할 참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것만이 참 증거입니다. 그 증거를 가지고 사는 자가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조금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순교자들이야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그런 줄 알지만 구약의 요셉이나 다윗, 에스더 같은 인물이 어찌 그렇게 자기 삶을 통째로 내어드릴 수 있었을까요? 에스더를 보면 하나님을 믿어도 그렇게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자기를 하나님께 내어드린 믿음을 보세요. 그뿐 아닙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의 신앙을 금요예배 때 시편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합니다. 사실 우리가 볼 때 포기지 실상은 포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별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좁은 길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놀랍습니다. 그 사랑을 증거로 가지고 있으면 승리하게 됩니다. 그것이 영적싸움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2. 십자가 사랑을 이루는 길_마태복음16:25, 히브리서5:9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_마태복음16:25’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_히브리서5:9’

 

그렇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우리가 누릴 수 있고, 이룰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로 가지고 있으면 오해를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고 견디기도 합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10년을 넘도록 기다렸습니다. 온갖 핍박과 고난을 당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 사랑을 가해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 사랑만이 저들을 살릴 수 있다는 영적인 사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오늘 생각해봐야 합니다. 무엇을 자랑하고 싶으십니까? 세상적인 자랑을 하고 싶으시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은근히 십자가가 창피하게 여기고 예수님이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저는 목사이면서도 그랬습니다. 성경은 정확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면 찾게 됩니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면 근원적인 축복을 받게 됩니다.

 

3. 온전한 사랑의 길_요한일서4:18, 데살로니가후서2:10, 3:5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_요한일서4:18’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_데살로니가후서2:10’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_데살로니가후서3:5’

 

그렇게 살면 왠지 손해 볼 것 같고, 왠지 불안하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두려움이 엄습해옵니다. 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실업계 고등학교는 자격증시험을 봅니다. 그게 취업하거나 대학을 갈 때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 신학교에 가기로 결단했으니 사실 그 자격증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안한 것입니다. 친구들이 자격증 몇 개씩 딸 때 나도 딸 수 있는데 주일에 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그 갈등을 엄청 했습니다. 그러다가 속아서 자격증 시험을 딱 한번 예배를 빼먹고 봤습니다. 사실 빼먹은 것도 아니지요. 오후에 예배를 드리러왔는데 그래도 그것이 못내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회개하고 그랬습니다. 굳이 저에게 필요가 없는 자격증인데, 제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나요? 친구들에게 선생님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입니다. 저는 그때 기도하면서 결단했습니다. 내 인생에 예배를 빼먹는 일은 없다. 그게 어린 마음에 그냥 결단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귀히 여기셨다 생각합니다. 그 두려움을 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 세상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시선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저희 학교에서 가장 좋은 수능 성적을 받았고, 가장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런 작은 경험이 온전한 사랑의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감정에 행동이 수반되지 않을수록 그만큼 더 행동 능력이 떨어지고 결국 감정의 기능마저 약해진다_C.S. Lewis'

 

신앙은 예수님을 실제 내 삶에 모시는 것입니다. 예쁜 강아지 한 마리만 집안에 키워도 우리는 변화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매일 만나면 변화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을 감정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삶에 행동으로 수반되도록 새로운 시작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 사랑으로 두려움도 이기고, 그 사랑으로 원수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여러분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도 시작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두려운지 시작도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 사랑의 증거를 가진 자의 길을 가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저 비브릿지를 통해 1,2만원 후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내 삶에서 예수님을 가까이 하고, 예수님을 통해 나와 내 주변을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묵상일기를 씁니다. 왜 그 시간이 저에게 소중하냐? 타락한 제가 몸부림치며 가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부부도, 부모 자녀 간에도 말뿐인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견디고 인내하기도 해야 하고, 사랑은 희생과 고난도 필요합니다. 사랑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면 그가 변화되고 축복받는 것이 내 일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그 증거를 가지고 우리가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가스펠 교회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늘의 것으로 채우십니다.

 

주님 저는 지금 어떤 증거를 가지고 살고 있나요.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그들처럼 거짓증거를 붙잡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요? 세상이 주는 거짓증거들을 붙잡으면서 진짜 증거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붙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공이니, 인간관계니, 세상의 모든 것은 힘써서 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은 붙잡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가까이 하여 우리 인생이 십자가 사랑에 쓰임 받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이 내게 증거가 되어 아름답고 존귀한 신앙의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매일 작은 시간 예수님과 친밀하여 말씀으로 내 삶을 돌이키는 사랑의 시간을 가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릴 사랑하셔서 그렇게 자신을 내어주셨음에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여 우리 인생을 내어드리길 원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사랑으로 살아 생명의 열매를 맺는 축복된 인생이 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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