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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2-06-12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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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6월 12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본 문 : 고린도전서 9:16-27

 

 오승주 목사

 

-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_고린도전서9:16-19, 에베소서1:3-14

 

저는 이제 코로나가 다 마무리가 됐다고 생각하고 실내에서 마스크를 조만간 벗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식당에서, 카페에서 마스크를 벗고 있는데 예배시간에만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도 참 코미디 같은 일이고 상식적으로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법적을 그런 제한들이 있어서 조심스럽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많이 바뀌었다, 우리의 형태가 많이 변화됐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많이 변화된 것은 제 마음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목회하는 스타일이나 사역이나 이런 것들이 많이 바뀌었지 않을까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제가 코로나 때 몇 가지 느낀 것을 정리하고 있는데 제일 첫 번째는 제 손에 기도제목이 없었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인데 코로나 이전에 기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코로나를 겪고 나서 내가 진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기도를 하지 못했구나 이런 회개, 또 그런 진실 된 저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손에 성도들의 이름을 쥐고 기도하고 있었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장로님들, 권사님들 기도해야 되는 분들 손에 기도제목을 쥐어주지도 못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가족과 성도님들과 자녀들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의 기도밖에 없는데. 이전에는 세련되게 목회를 하고 싶었고 사역도 잘하고 싶었고 사람들을 많이 신경 쓰고 그래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녔었는데 이제는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사도 바울이 부득불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_고린도전서9:16

 

부득불이라는 단어는 내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라든지 해야 되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부득불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라도 내가 아프면 아픈 대로 내가 연약하면 연약한대로 내가 가지고 있으면 가진 것대로 내가 해야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심지어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16절에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화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 여러분 바울은 이미 육신의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시죠? 바울이 질병을 고쳐달라고 여러 번 기도했지만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네 몸의 십자가다, 네 몸의 가시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며 치료를 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육신의 질병을 가지고 사역을 한다는 것은 엄청 고달픈 일입니다. 저는 감기만 걸려도 사역 다 취소하고 싶고 설교 준비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여러분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가 몸에 질병 하나만 있어도 만사가 귀찮고 괴롭고 사람도 만나기 싫은 것이 질병인데. 바울의 질병이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너무 괴로워했던 질병입니다. 편한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어도 괴로운 것인데 바울은 늘 이 집 저 집을 전전하고 그러지 않을 때는 그냥 밖에서 자기도 하고 감옥에 가기도 하고. 상황이 어려워져서 잠을 자지 못하면 더 아플 거 아니에요. 그 질병이 더 심해지고 진짜 괴롭고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사역 하다가 몸이 아프니까 몸이 아픈 것이 제어가 안 되면 얼마나 힘이 빠졌을까요. 나 지금 뭐하고 있냐? 이런 생각도 들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내 몸 아파가면서 내 몸이 이렇게 아픈데 내가 지금 고린도에서, 에베소에서, 안디옥에서 이 사람들 복음 전하려고 천막을 짜고 있고 지금 뭐하고 있냐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진짜 복음 전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몸이 아픈데 어떻게 복음을 쉽게 전할 수 있겠어요. 몸이 아프면 기도도 하기 싫습니다. 몸이 아프면 예배도 가기 싫습니다. 그런데 복음 전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여러분 얼굴이 뒤집어지면 사람 만나는 것이 꺼려지는데 복음을 어떻게 전하겠어요? 몸이 아프면 사람 만나는 것을 꺼릴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질병을 가지고도 부득불 복음을 전하려고 했고 또 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도대체 바울은 이런 고백들을 왜 했을까? 도대체 이런 삶을, 이런 고통스러운 복음 전하는 삶을 굳이 이렇게 살아야 돼? 우리는 이런 마음이 들죠? 왜 했을까? 17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_고린도전서9:17

 

이 상이 너무 궁금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분명히 상을 얻는다고 합니다. 내가 자의로 하면, 내 의지적으로 하면. 그런데 의지적으로 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내가 사명 때문에 이걸 할 건데 부득불 할 건데 내가 스스로 내 의지를 가지고 자원해서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상이 무엇이냐? 에베소서 1장 3-1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_에베소서1:3-6 

7-9절 다 같은 말씀입니다. 11절에 보니까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_에베소서1:11-14

 

바울이 생각하는 상은 아마 오늘날 교회를 다니면서 얻으려고 생각했던 상과 개념이 많이 달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싶었고, 그게 하늘의 신령한 복이었습니다. 찬송이 되고 싶었고. 내 상이 무엇이냐?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내 상이 무엇이냐? 그 상은 바울이 이 복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안 것이 자기에게는 상급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자의로 하게 되었고 자의로 하게 되면 상이 있고. 혹시 자의가 아니더라도 이건 나의 사명이다. 18절에 보니까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_고린도전서9:18

 

밑줄 치셔도 됩니다. 내 상이 무엇이냐. 내 상급이 무엇이냐 이야기했을 때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심지어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여러분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바울의 상급이 무엇이었냐면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복음을 아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 문장은 주님을 정말 만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입니다. 새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일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상이 무엇이냐? 값없이 전하는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상입니까? 복음을 값없이 전하는 게? 복음 전해놓고 저 사람한테 인정받고 저 사람이 반찬이라도 하나 해줘야 되고. 너는 내 제자야, 너는 내가 양육했으니까 너는 나에게 뭔가를 줘야 돼 라고 해야 되는데 권리를 다 포기하고. 값이 전하는 것 그게 자기의 상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무슨 말이죠? 복음의 가치,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를 바울은 진짜 알고 있었던 거죠. 여러분 복음 전해보셨나요? 여기에 복음 받아 보신 분은 알 것입니다. 거만한 사람을 통해 복음 들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거만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면 절대 복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기분 나쁘고 거만하고 교만한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듣지를 않습니다.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낮아지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종의 형체로 오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다른 모습으로 왔다면 우리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구유에, 인간의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진심으로 낮아져야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낮아질 수 있죠? 여러분 바울 옆에서 바울의 사역을 도왔던 사람들 중에 귀부인, 지식인, 당시 권력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뵈뵈는 겐그레아 라는 고린도교회 옆에 있는 소도시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훈련 받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뵈뵈가 로마에 로마서를 전달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 여인이 수백 키로나 되는 거리를 편지를 들고 전달했을 때 돈이 없었을까요, 주변에 사람이 없었을까요. 여러분 그 당시 여자가 수백 키로를 로마에 가서 편지를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랑 고고학자들은 뵈뵈를 유명한 재력가였을 거다, 실력 있는 귀부인이었을 거다, 지식인이었을 거다 이렇게 추정을 하는 것입니다. 계속 성경해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 가난한 사람들, 그냥 비천하고 낮은 사람들이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고고학이나 자료들이 발달하면서 아니었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는 눈도 시대의 신학적인 자료들이나 신학을 통해서 계속 보면 바뀌게 됩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숙해져서 성경을 보면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이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늘 술 먹고 밖에 나쁜 짓 하는 이런 사람들은 교회도 아니꼽게 보이는 것입니다. 설교도 그렇게 들리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왜 내 욕하는 거 같지 이러면서. 우리의 신앙도 같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신앙은 절대 그게 구분될 수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과 내 삶의 질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귀부인들이나 지식인들이나 권력자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심부름하고 희생하고 헌신했을까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진짜 알았던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뵈뵈 같은 사람이 목숨 걸고 생명 걸고 그 수백 키로나 되는 거리를 여성의 몸으로 편지를 전하고. 여러분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너에게 복음 전해줄게. 으스대고 그런 게 복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전하는 메시지 좀 들어봐, 네가 복음을 몰라서 그 모양으로 살고 있어 이렇게 하는 게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 전도했어, 너는 내 제자야. 이런 말 못하는 것입니다. 너는 내가 양육했으니까 내 이야기 들어야 돼. 그런 말을 못합니다. 복음은 값없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진짜 안다면. 내 제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교만한 말을 함부로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겸손입니다.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는데 다 주님의 제자지 어떻게 내 제자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죠? 그거는 후대들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는 거죠. 복음은 값없이 그냥 전해줘야 합니다. 그 말의 진정한 뜻은 복음을 진짜 아는 거죠. 내가 경험했던 내 경험, 내 지식, 내 노하우를 조금이라도 전한다면 아직 복음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맞잖아요 여러분. 내 노하우, 내 경험이나 내 삶을 전한다면 복음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고. 복음을 아직 잘 모르니까 내 경험을 전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이 땅에서 받은 상급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그것이 자기 인생에 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온전히 알고 나니까 값없이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_고린도전서9:20-22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_고린도전서9:20-22

 

20-22절에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도 유대인이 될 것이고 내가 율법 가진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는 율법 가진 자로 살 것이고 내가 이방인에게 율법 없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가지고 있지만 율법 없는 자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고 나는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처럼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을 천주교가 잘못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에 가면 제사 지내고 있으니까 제사 제도를 인정해주고. 우리도 제사를 같이 지내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냐. 필리핀에 가면 그들의 문화를 인정해주면서. 그래서 천주교가 가지고 있는 복음이 확 확산된 것이 뭐냐면 그 나라의 전통과 종교 문화를 인정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천주교 식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가면 제사 지내면 안 돼. 그 문화 바꿔야 돼. 그건 우상문화야. 이러니까 기독교는 가는 곳마다 트러블이 있었고 천주교를 진짜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결과는요? 천주교가 들어간 곳은 다 부패했습니다. 복음이 다 희미해지고. 다 변질되고.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고 할 때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다 제거하라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가 고린도전서 9장을 가지고 자기들의 사역들을 합리화합니다. 그런데 그 뜻이 아닙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되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들처럼 낮아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귀부인들이 명품 옷 같은 거 입고 립스틱 예쁘게 바르고 명품 백 들고 판자촌 이런데 가서 하루에 한 끼 먹는 판자촌, 쪽방촌 가서 예수 믿으세요 저처럼 복 받으실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복음 받을까요 그 사람들이? 외제차 이런 거 타고 내려서 복음 전하러 왔는데 이러면 너나 잘 믿으세요 이럴 것입니다. 에드윈 저지라는 유명한 고고학자가 이야기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가 약 80명 정도였을 것이다. 진짜 작습니다. 물론 도시도 지금처럼 수십만 명 되는 도시가 아니지만 그래도 큰 도시에서 고린도교회 하면 엄청 대형교회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분쟁도 있었고 파벌도 있었고 하는데 겨우 한 80명, 많아봤자 100명. 자료를 통해서 숫자 추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진짜 적은 숫자입니다. 초대교회는 막 삼천 명씩 복음 받았다, 오천 명씩 복음 받았다, 폭발적인 부흥이 있을 것 같았지만 바울이 사역했던 지역에는 교회의 성도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바울은 아무쪼록 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이니. 자기가 이렇게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내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내 권리를 포기하고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무쪼록 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이니. 이게 바울의 진심이었습니다. 실제로 전도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왜냐하면 로마의 핍박도 있었죠. 예수 믿으면 잡아 죽였죠. 어떤 세상적인 우상문화도 강력했죠. 특히 고린도지역은 바닷가에 있는 항구도시라 복음 전하는 것이 너무너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눈높이를 맞추고. 사도행전 18장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러서 평일에는 뭐했죠? 그들과 함께 천막 짜는 일을 했습니다. 바울은 천막 짜는 일을 안 해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을 후원하는 사람이 진짜 많았기 때문에. 그런데 왜 천막 짜는 일을 했고 안식일에는 쉬는 날에는 1년 6개월 동안 뭐했다고 했죠? 하나님 말씀, 성경 가르치기를 쉬지 않았다. 쉬지 않았다. 그러면서 뭐라고 사도행전 18장에 나와 있죠? 내가 하나님 말씀에 매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뭐에요?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마음으로 그 사도의 직분을 감당했다. 그러니까 여러분 거대한 목표와 사역도 해야 되지만 사실 복음은 아무쪼록 몇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직분자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야 되는 제 마음에 이유가 있습니다. 목회자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신학교 3년 다니고 목사 안수 받고 목사 한다고 하는 시대입니다. 겨우 3년 신학교 가서 공부하는데 이것도 변별력이 없습니다. 요즘 신학교들이 재정난에 있으니까 아무나 들어가고. 그냥 공부 좀 대충하고 나면 웬만한 교단들은 목사 안수를 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지 않는 사람들, 콜링도 없는 사람들이 다 목사를 합니다. 왜 콜링이 없냐? 저는 그거 확신합니다. 콜링이 없으니까 절제하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사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는데 목사를 하고 있으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목회자들의 삶에. 그 목회자로 살았을 때 주는 하늘의 상급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발전시키고 나중에 바울처럼 자기 몸을 쳐서 복종 시킨다 이런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은 말 좀 잘하고 기획 좀 잘하고 세련되게  사역하면 교회 안에서 인기 있는 목사가 되고. 그런데 여러분 아시죠. 그게 결과적으로 복음을 다 가로막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거 같은데 복음은 가로막는. 아이러니하죠. 교회가 대형화가 되고 성장하는 거 같은데 복음은 가로막는. 그것을 미국의 폴 트립 목사님이 이야기하셨습니다. 미국 교회가 대형화되고 세련되게 목회하고 수많은 찬양팀과 세미나들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수많은 문화를 제공하는데 복음은 아이러니하게 사라지고 있다. 생명의 복음은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은 눈물로 기도해서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은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아이러니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 삶이 지금 그렇잖아요. 목회자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 신학교 가서 목회 한다고 했을 때 신학교가 진짜 변별력 있게 인격이 훌륭하고 목회자가 될 만한 사람들을 뽑아서 훈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아무쪼록 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기도하고 말씀에 사로잡혀 살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천막 짜는 일을 했데요. 왜요? 1년 6개월이나? 이유가 뭐에요? 주일에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 단 하루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들이 교회를 와야 되니까, 몇 사람이라도 와서 말씀을 들어야 하니까 그들과 함께 천막 짜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 아시죠?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이 공산당원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아들 삼았다는 것이 유명한 이야기이고 또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유명한 목사님이지만 사실 손양원 목사님은 1938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서 제일 첫 사역지가 전라남도 여수에 있는 애양원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문둥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 한센병이라고 하죠. 그 기관의 목회자로 간 것입니다. 그 철없는 어린 전도사가 문둥병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가서 그런 사역들을 하고 있는데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떤 것이 있었냐면 문둥병 환자의 몸에서 나오는 고름 이런 것들이 우리 몸에 오면 옮는다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간호사들도 문둥병 환자를 만나려고 할 때 바닥에 신문지 깔고 그들과 접촉을 하지 않으려고. 그러니까 문둥병 환자들이 우리가 짐승이냐? 우리가 개냐? 하며 문둥병 환자 중에 인격적으로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간호사 한 명을 때려 죽였던 것입니다. 그때 손양원 목사님이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여기 왜 왔을까? 평양에서 그 은혜를 받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는데. 그래서 그런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 차라리 제가 문둥병이 걸려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여러분 그거 쉬운 거 아니잖아요.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이 장갑 다 벗어버리고 양말, 신발 안 신고. 그냥 했는데 신기하게 문둥병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몇 번 검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름을 짜주고 방마다 가서 그들에게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손양원 목사님이 애양원 사역을 그만두고 목회 사역을 하러 갈 때 문둥병 환자들이 얼마나 많이 울었다고 하는지.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적당히 존경도 받고 싶고. 우리의 말도 조금 세련되고 해서 내가 전한 복음이 포장도 잘 하고 싶고. 저 사람이 내가 전한 복음을 멋있게 생각해주면 좋겠고. 그렇게 접근하면 몇 사람이나 구원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사영리가 진짜야. 자기 단체니까 진짜라고 이야기하겠죠. 전도폭발이 최고의 방법이야.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방법이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자기 교만에 빠지면 더 위험합니다. 이 방법 밖에 없어. 내가 전하는 복음이 전부야 라고 자기 교만에 빠지면 위험합니다. 여러분 정말 다양한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다 다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는 자에게는 율법이 있는 것처럼.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율법이 없는 자처럼. 가난한 자들에게는 가난한 자처럼. 또 부유한 자들에게는 부유한 자처럼.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성령 앞에서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으로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에 매여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에 매인다는 말은 가식적으로 한두 번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 가식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 23절부터 보면

 

-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_고린도전서9:23-27, 히브리서12:10-13, 디모데전서4:5-8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하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이것은 전투, 전쟁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_고린도전서9:23-27

 

바울은 이런 복음 전하는 삶을 두고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경기하는 자처럼, 1등하기 위해서, 그리고 전투에서 이겨서 면류관을 얻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1등이 되기 위해서 승리의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심지어 27절에 보면 내 몸을 쳐서 복종했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나는 타락하고 무너지면 안 되니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다 복음 전해놓고 나는 무너지면 안 되니까. 항상 내 몸을 살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금방 깨닫고 이해하고 너무 쉽게 넘어가는 것들. 그런 것들은 절대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응답 이러면 쉽게 온다고 생각합니다. 축복이 그냥 쑥 오는 게 하나님이 축복 주셨어, 응답 주셨어 이런 분들 계시잖아요? 쉽게. 나는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기도도 안했는데 하나님이 이런 것을 주셨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것이 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여러분 보통 저는 이거 진짜 어렵네. 하나님이 이건 내게 주신 것이 아닌 거 같아,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닌 거 같아 하는 것들이 대부분 제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누구보다 오랫동안 힘들게 노력했고 고통을 겪었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냈기 때문에 제 것이 되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쉽게 되어지는 것을 응답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화목하게 되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 모두 쉽게 되는 것이 없습니다. 남들은 쉽게 되던데? 저 집 보니까 쉽게 화목하고 쉽게 잘 사는 거 같은데? 그거는 남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겉모양만 봐서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SNS나 들여다보고 이 사람 부럽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노력하면 사는지 그것은 안 보고 결과만 봐서 그러는 것입니다. 영적인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상급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되어지는 것, 대충 해도 되어지는 것, 저절로 되어지는 것, 그런 것들이면 영적인 축복일까요? 정말 그것이 영적인 축복이라면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있나요? 우리가 대충 살았는데 축복이 온다면? 우리가 죄 짓고 사는데 응답이 온다면? 그런 하나님 믿어야 되나요? 그런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일까요? 참 우리 아버지이실까요? 하나님은 진짜 상급을 받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상급이 누구나 받기 쉬운 것이라면 바울은 왜 그토록 경주하는 자처럼 전쟁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사람처럼 자기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려고 했을까요? 복음을 전하고 구원하는 삶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또 상급이 있는 삶이 분명하지만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자유를 소중하게 사용해야 됩니다. 정말 삶을 바꾸고 싶다면 누구보다 간절하게 신앙생활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 복 받고 싶다? 누구보다 애쓰며 노력하며 신앙생활하셔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축복받고 싶다면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동행하셔야 합니다. 아닌가요? 어디서 대충 신앙생활했는데. 주일날 교회 한 번만 와도 하나님 축복하셔, 이런 삯꾼 목사의 설교만 듣고. 한두 번 기도하고 포기하거나 성경 한 두 장 읽고 에이 별 거 없네 하거나 주일에 겨우 예배 한 번 드리고 무엇을 바라고 계신다면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취미생활하는 거 아닐까요?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_히브리서12:10-13

 

당시에는 징계가 피곤해보이고 즐거워 보이지 않지만 그 징계로 인해서 우리가 연단을 받고 나면 뭐가 오죠? 의와 평강이 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권투 선수가 올림픽 무대에 서기 위해서 4년 동안 열심히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음식도 조절해야 되고 아침, 저녁으로 스케줄에 맞춰서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올림픽 결승에 올랐을 때 평안함. 왜? 훈련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 훈련을 게을리 하고 훈련을 하나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주먹을 날려야 할지 어떻게 피해야 할지를 모르니까. 당시에는 편할지 모르지만 진짜 실전에 가서는 불안한 거죠.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으면 불안한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_디모데전서4:5-8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고 그것으로 형제를 깨우칠 수만큼 자기 자신을 연단했다고 합니다. 그게 얼마나 좋았느니 에베소서에 찬송하리로다. 훈련받고 자기가 정말 하나님 말씀으로 거룩해지고 나니까 너무 평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해지는 과정을 표현했습니다. 1등 되기 위해서 경주하는 자처럼, 썩을 면류관을 얻으면서 저렇게 전쟁하는 사람인데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냐?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내가 무너질까 하여 내 몸을 날마다 쳐서 복종할 정도로 했다고 하는데. 우리 영적인 축복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는 교회를 개척해서 좀 세련되고 사역도 하고 싶었고 멋들어지게 교회도 세우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목사라는 이미지도 얻고 싶었고 그래서 성도들에게 싫은 소리도 잘 못하고. 하면 교회 떠날 거 같고. 또 어떤 목사님들이 그렇게 가르쳐주시기도 했고.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요즘 많이 느끼고 깨닫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그렇게 사역하고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이나 자녀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구원 받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 세련이 논리가 좋은 목사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인가요. 저주지. 그런 교회는 저주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 여러분 가족들, 자녀들. 세상적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머리가 좋거나 부모님이 좋은 학교에 보내주고 하면 좋은 대학, 좋은 직장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안하고 예수님 안 믿으면 우리 자녀 교육 실패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 권리를 포기하고 내가 낮아지고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엄청난 유익이 있다고 바울은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 정도 유익이냐? 면류관. 세상 사람들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 사는데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면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런 말씀들이 우리 성도님들 교회에 오면 좀 쉬게 해주고 예수 믿으면 평안하고 쉬고 안정적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이런 메시지가 더 은혜롭잖아요? 성경 보니까 그런 말씀이 단 한군데도 없습니다. 단 한 군데도 그렇게 쓰여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죄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에 달음질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요? 1등하기 위해서 달리라는 것입니다. 게으르지 말라고 합니다. 저는 다리 일으켜 세워서 뛰라는 것입니다. 어그러진 너희 마음 고쳐서. 여러분 우리는 누구라도 말씀으로 양육 받아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 혹시 나는 성경을 다 알아. 나는 하나님을 너무 잘 알아 하시는 분이 계시나요? 그래서 마음이 평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고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쓰는 분이 계신가요? 그렇다면 그건 은혜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전도를 하려고 정작 하나님을 모르고 전도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교만하게 됩니다. 전도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인물들이 그렇게 복음에 쓰임 받고 무너질까요? 정말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내가 말씀으로 양육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매여야 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씀에 매여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저라고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이런 삶을 안 살아야 되나요? 아휴, 목회 30년 했으니까 이정도 했으면 쉬워도 되지.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나요? 대충해도 되지, 경험으로 해도 되지. 조금 타협해도 되지 이렇게 할 수 있나요? 이번 여름에 중요한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10주간에 6,7,8월 달에 거쳐서 바이블스쿨이 진행됩니다. 어른들을 위한 성경학교입니다. 주일학교 성경학교가 아니라 우리 어른들을 위한 성경학교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성경 읽기를 원합니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나는 장로니까 나는 알아서 읽을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 알아서 읽으면 되지. 그것처럼 이기적인 생각이 어디 있어요. 그러면 교회를 세우는 거나 연약한 성도를 돕는 것에 마음이 없는 거잖아요. 나는 목사니까, 전도사니까 나는 잘 읽고 있어. 그러지 마세요. 우리 교역자들 진짜 잘 읽고 계십니까. 기도하고 계시나요. 제가 교회 와서 기도할 때 한 번도 못 봤거든요. 물론 집에서 기도하겠지. 우리 직장과 가정을 사랑한다면 가정에서 성경읽기 모임을 시작하십시오. 권면하십시오. 먼저 실천하십시오. 교역자의 도움을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됩니다. 성경 읽는 모임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전도사, 목사의 메시지가 필요가 없습니다. 같이 모여 성경 읽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 말을 같이 묵상하면 됩니다. 오늘 오후에 클로리 예배 때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리 몸을 복종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내어드려야 하나요? 승리의 면류관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달렸는데 열심히 달렸는데 상이 없으면 어떻게 되냐? 우리가 열심히 복음 전했는데 복음을 다 전하고 내가 버림받으면 어떻게 되냐? 이 시대는 그런 것을 가장 주의해야 되는 시대입니다. 얼마나 속상할까요? 막 달렸는데 잘못된 길로 달렸습니다. 막 복음 전하고 살았는데 전도하고 살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었다면. 내 교만이었고 내 사역이었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하나님 너 왜 그렇게 살았어.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에 매여서.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눈동자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내 자신을 쳐서 복종해야 된다는 말은 늘 우리가 나 자신을 복종해서 밑바닥에서 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말고 넘어지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라 이 말이겠죠.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 일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가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상을 받는 게 맞잖아요. 그 상이 뭐냐. 바울은 복음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 값없이. 심지어 내 권리를 포기하면서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역설적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복음이 진짜 값없이 받았다는 거, 그 복음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으면 값없이 줘요. 얼마나 복음을 제대로 알았으면 주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그 복음을 아는 방법이 무엇인가요? 그 복음을 이해하고 깨닫는 방법은 그냥 쉽게 되어집니까? 아닙니다. 달음질하래요. 면류관을 얻는 것처럼 싸우래요. 그게 무엇이냐? 바울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고 양육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자신을 향해서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향해서.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승주 목사에게 설교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렇지. 얼마나 그릇되고 잘못되게 목회를 하고 사역을 했는지. 오늘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그 은혜가 내 안에 있어서 그 감사가 내 안에 넘쳐서. 우리 성도들의 이름을 손 안에 쥐고 눈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그럼 된 거잖아요. 우리 장로님들 손에 성도님들 기도제목이 다 쥐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역자들 그거 심부름 해보시라니까요. 잘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저도 이해가 안 되니까. 저도 그걸 잘 못하니까. 우리 그거 해야 합니다. 장로는 행정 하라고 세운 거 아닌 거 아시죠.. 원래 교회 행정은 안수집사가 하는 것입니다. 집사들이 하는 것입니다. 장로는 영적인 권위자로 성도들을 심방하고 기도하고 안수하라고 세운 직분입니다. 원래 성경적으로. 그런데 장로님들이 정신없이 행정하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들을 돌봐야 합니다. 기도하셔야 합니다. 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심방하라고 같이 가서 울어주고. 기도해주고.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러려고 세운 직분입니다. 그 손에 기도제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 자녀들 기도제목이 손에 쥐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믿지 않는 자녀들 많이 있으시죠? 다 기도제목 내세요. 그거 부끄러운 일 아닙니다. 당연히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부모, 형제가 있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그러면 다 기도제목 모아서 믿지 않는 가정을 위해서 같이 기도하는 게 직분자들의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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