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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1 주일1부예배

 

 

 

 

 

 

가스펠교회 주일1부예배 20150621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2015-06-21-주일1부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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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람산의 비밀_마태복음2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_마태복음21:1’

 

감람산은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건넌 기드론 시냇가에 있는 산입니다. 이 산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었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도 한 곳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사역인 십자가 사역을 오늘부터 6장에 걸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 감람산에서 이루어진 사역이고 사건입니다. 사실 이전까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숨기신 것은 십자가 사역을 방해할까 봐서였고, 나중에 세워질 주님의 교회의 일꾼이 될 제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훈련시키시려고 그러셨습니다. 그런 훈련이 끝나고 시간표가 와서 이 감람산에서 십자가 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감람산은 역사적인 증거가 됩니다. 갈보리산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지고 죽으셨다면, 감람산은 그 십자가 사역이 준비된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인 실제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증거를 가지는 것입니다. 감란산에서 보여주신 십자가 사건의 증거가 곧 내 증거가 됩니다.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증거를 붙잡는 것입니다. 벅차고 힘든 도전을 하는 중에도 그 증거로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감란산의 비밀입니다. 그 증거를 가지고 증인이 되려 할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사용하시게 되어 빛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감란산에서의 첫 십자가 사건의 시작을 보려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나요? 바로 순종입니다.

 

. 순종하는 믿음

 

1. 이름도 없는 맞은 편 마을_마태복음21:2-3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_마태복음21:2-3’

 

사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으로의 입성입니다. 예루살렘을 입성하기 위해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가려고 하시지요? 그것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_스가랴9:9’

 

그런데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나귀를 찾으러 제자들을 보내신 곳이 어디지요? 벳바게는 베다니 근처 마을입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리아와 마르다, 죽음에서 살아난 기적의 주인공 나사로의 가정이 있는 곳입니다. 벳바게는 유명하지 않지만 유명한 베다니 마을 근처에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 마을에 가셨는데 마리아나 나사로 즉 예수님 때문에 기적도 체험하고, 능력도 체험한 사람들이 오지 않았을까? 왜 말귀도 못 알아듣고, 부자청년이나 부러워하는 제자들을 또 나귀를 가지고 오도록 중요한 심부름을 시키셨을까? 신앙은 기적을 체험한다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체험하여 유명한 사람이 되었지만, 제자는 못되었습니다. 교회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상한 소리를 해도 끝까지 주님과 같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끝까지 보내시어 경험하게 하십니다. 왜 그렇지요? 훗날 교회를 맡기시려고, 당신의 구원사역을 맡기시려고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제자들보고 맞은 편 마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왜 마리아의 집이나 나사로의 집이 있는 마을이 아닌 이름도 없는 맞은 편 마을에서 나귀를 데려오라 하셨을까요? 우리는 늘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쓰임 받을꺼야, 아니지요? 그것은 우리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으로 신앙생활하지 말고 오늘 주신 말씀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필요한 나귀가 준비된 곳은 이름도 없는 마을입니다.

 

2.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_마태복음21:4-6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_마태복음21:4-6’

 

그곳에 나귀가 메여있습니다. 우리는 이름도 없는 고을과 같은 존재이고, 또 멍에에 메여있는 나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쓰시겠다하면 쓰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제자들이 가서 그대로 순종하여 나귀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름 없는 마을의 나귀 주인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내어드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유명한 마을에 유명한 사람들은 아무리 소란스럽게 살고, 아무리 기적을 많이 체험해도 주님이 쓰실 나귀조차 준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인생이 되면 안됩니다. 그저 기적이나 체험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이 쓰시겠다 할 때 순종하는 것입니다. 매일 주님이 명하신 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실 주님이 쓰시면 이름 없는 고을도, 짐승의 새끼마저 금보다 귀한 것이 됩니다. 심지어 십자가 사건, 구원을 위한 일에 쓰임 받았기 때문에 그 이름 없는 마을의 나귀새끼가 귀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쓸모없고 초라해 보이는 어떤 것도 주님께 내어 놓으면 귀한 것이 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긴다 난다 해도 성경에 이름을 올리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구원을 이루는 주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다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멍에를 맨 나귀처럼 우리 인생도 십자가 짊어지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내 고집, 내 명예, 내 소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늘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못 들었다고 합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라, 나귀를 달라 해라, 그런데 나는 모른다 합니다. 귀찮은데 맞은편까지 가라고 하십니까? 여기에도 나귀가 있는데 꼭 굳이 이름도 없는 마을에 가야 합니까? 이런 식입니다. 머리가 나빠서 그렇습니까? 이것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명령한 대로 행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되라 하신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아무리 들어도 못합니다. 자기 상식, 자기 기준대로 자기논리로 신앙생활하니 안됩니다. 어찌 이름도 없는 맞은 편 마을까지 가겠습니까? 창피해서 나귀를 타기나 하겠습니까?

 

3. 겉옷을 벗어_마태복음21:7-8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_마태복음21:7-8’

 

나귀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었습니다. 그래도 제자는 제자입니다.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하였습니다. 겉옷은 재산과 명예, 지위 등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물론 그들 마음에 드디어 개혁이 시작된다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의미가 큽니다. 보세요. 제자들이 벗으니까 백성들도 따라했습니다. 제자들이 본을 보이니 백성도 따라 한 것입니다. 속옷만 걸친 것이 너무 부끄러웠을 텐데 상관하지 않고 겉옷을 벗었습니다. 내가 겉옷을 벗어 그 겉옷위로 예수님이 지나가시면 인생이 해결됩니다. 이 말씀의 적용이 죽을 것 같지요? 그런데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밟고 지나가시도록 내 자존심, 내 명예 내 지위 내려놓으면 해결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사인 저부터 겉옷을 벗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여기 계신 중직자들이 먼저 겉옷을 벗어 진실한 나눔을 하시면 그렇게 영혼을 섬겨 말씀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고 회개를 나누면 모두가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이루려고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새끼나귀입니다. 초라하고 볼품없지만 그러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지나가시도록 겉옷을 벗으십시오. 자존심, , 야망 다 벗으십시오. 그리고 멍에를 매십시오.

4.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_마태복음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이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_마태복음21:9’

그렇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사람들이 소리를 높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사실 엄청난 고백이요, 엄청난 장면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이들이 일주일 뒤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로마에서 해방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적에 열광합니다. 기적을 보여주지 않으면 통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사실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저주에서, 재앙에서, 지옥에서 해방시켜주셔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가 맞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끄럽게 소리 지르고 난리를 피우던 사람들이 일주일 뒤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실망했겠지요. 그래서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하고, 그저 지식적으로 복음을 들어서 그렇습니다. 다 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인생의 문제 해결자라고 압니다. 모든 생사화복이 주님께 있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그 복음이 내 인생과 내 사건과 내 현실과는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증거를 가진 사람은 변함이 없습니다. 늘 구원에 감사하여 찬송하는 삶을 삽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몫을 다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찬송하는 인생이 되셔야 합니다. 그것이 그저 소음이 되지 않고 여러분의 인생가운데 실제로 이름 없는 마을처럼, 쓸모없는 나귀처럼, 잘 못 깨닫지만 순종한 제자들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 빛나는 인생

 

1. 소동하는 세상_마태복음21:10-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_마태복음21:10-11’

 

세상은 금방 소동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이 겉옷을 내어 깔아드리고, 그 위로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하니 난리가 났습니다. 마치 크리스마스 같습니다. 십자가에 반짝 반짝 장식도 하고, 거리마다 찬송이 나오고, 모든 사람들이 뭔가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에는 적용을 하지 않습니다. 누군지 물어보지만, 정작 그 예수님의 말씀을, 십자가 복음을 내 인생에 적용은 하지 않습니다. 그저 소동만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마치 그렇습니다. 연예인들에게 호들갑이고, 유명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는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던데? 저분은 엄청난 은사가 있다던데? 그런데 내 인생, 내 신앙은 없습니다. 내 증거는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적으로 나만 응답받고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복음이 내게 적용이 안 되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사람들이 여론에 흥분하고, 분위기에 쉽사리 흔들리는 이유는 자신의 신앙로드맵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소동합니다. 그리고 쉽게 등도 돌립니다. 그런 인생은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합니다. 미션홈과 지교회를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지교회를 참석하시려고 말씀 한 번 더 듣고, 적용한번 더 하지요. 그것이 살길입니다.

 

2. 주께서 쓰시는 인생_빌립보서1:5-6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_빌립보서1:5-6’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생은 저 소동 속에서 주님이 가시는 길의 의미를 알고, 그분에 말씀에 순종하였던 인생입니다. 심지어 하찮은 나귀새끼까지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쓰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닌지요? 우리가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대단한 것을 내어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나귀새끼였고, 그저 겉옷을 벗어드렸지만 그것을 왜 내어드려야 하는지 이유만 알면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들은 주님께 드림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어떤 논리도, 경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아드리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할 때 나귀를 드리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_갈라디아서3:6’

 

아브라함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상황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단한 교회도 아니고, 대단한 사역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처지가 그렇다고 녹록한 것도 아닙니다. 토요일 밤이면 제가 몇몇 분들과 통화를 합니다. 주일예배를 권면하려고 전화를 하지만, 막상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 삶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주님께 쓰임 받는 일에 소홀히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되지요. 무엇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시작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어 내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적용이 잘 안될 것입니다. 받아드리지 못해서 부자청년처럼 발길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앙입니다. 부족한 삶이지만 주님이 쓰시겠다 할 때 내어드릴 수 있는 인생이 되길 기도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안되면 다시금 시작하면 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 인생이 주님께, 우리의 후대들에게 빛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사랑을 주시려고 십자가 지신 것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그저 기적을 바라는 소동하는 무리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네요. 쉽게 흥분하고 쉽게 낙심하는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내 작은 삶속에서 주님이 쓰시겠다 할 때 내어드리지 못한채 그저 허황된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주님 이제 그런 신앙생활에서 돌이키렵니다. 감람산 십자가의 증거가 내 모든 삶에 적용되어 주님의 말씀과 구원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비록 더디게 깨닫고, 비록 비루하게 보이지만 주님이 사용하실 때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는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여주세요. 그래서 내 인생이 주님께 빛나는 인생이 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