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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4 주일 1부 예배



2016-01-24 주일 1부 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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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뵈지 않는 조선의 마음’_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9

저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도 받고 잘먹고 잘살게 되었지만, 어느새 세상의 기준에 사로잡혀서 마음에 감사와 감격이 아닌 먹고 사는 것, 성공하는 것, 조직에서 인정받는 것 이런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말씀으로 찾아와주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저는 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물건취급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일단 하나의 잣대를 갖게 되면 사방에 그 잣대를 들이댑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그들의 차별적인 태도는 이웃으로 확장됩니다. 누가 하나님을 더 잘 아나, 누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기나, 누가 하나님과 더 가까운가 유대인들의 머릿속과 마음은 그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이 항상 더 큰 관심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겉은 깨끗해 보이나 속은 시기, 질투, 탐욕과 방탕, 음란과 분노가 가득함을 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전문가였지만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지지 못할 짐을 남에게 요구했습니다. 출발은 좋았습니다. 율법은 원래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족쇄로 변했습니다. 율법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그 율법으로 묶어버린 것입니다. 본질을 다 놓쳐버렸습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자칫 종교심이 다른 자기만족과 자기과시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신앙의 본질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니 신앙생활을 목적달성쯤으로 여겨서 낙심하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비교하고, 경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그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 망콴마을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표적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적입니다. 그런 일들을 많이 해야만 하고, 그런 것이 우리의 삶을 정말 행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표적과 기적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표적과 기적을 따라가면 또 우리는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럼 무엇을 따라가야 하나?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저는 유대인들처럼 용두사미 같은 신앙생활을 할 뻔 했습니다. 이 땅의 교회나 성도, 그리고 목회자들이 그렇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알고, 마음에 모시고 눈물 흘리면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결단했습니까? 그래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영향력을 끼쳤습니까?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에게 했던 그 방법 그대로 유혹을 하였습니다. 권력, 물질, 명예입니다. 곧 다시 예수님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자기중심의 삶, 사고, 신앙생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목사님들이 그래서 교회 건물에 집착하고, 숫자에 집착합니다. 마치 기업처럼 교회를 운영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니 은혜가 왜 필요하고, 훈련이 왜 필요합니까? 예배 한번 드려주면 되고, 헌금 좀 보태주면 되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공한 것 같으나 용두사미입니다. 시대는 다시 어두워지고, 우리 마음에서 다시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신앙생활 해야 하나? 요한복음이 그 명확한 답을 제시합니다.

Ⅱ. 나다나엘 같은 우리의 마음

1.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_요한복음1:45-46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_요한복음1:45-46’

나다나엘은 제법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늘 메시야에 대해 고민하고, 영원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자주 갔던 것이 증거입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언제나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는 자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모여서 율법을 논하거나 홀로 깊은 묵상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묵상을 할 정도의 나다나엘이라면 내적으로 메시야를 항상 간구하고 있었다는 뜻합니다.

그런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만난 빌립이 와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찾던, 우리가 기다리던, 우리가 소망하던 메시야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야! 그런데 나다나엘이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어디? 나사렛?' 그렇습니다. 나사렛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유명한 사람, 아니 유명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조차 난 적이 없는 빈민촌입니다. 그런 곳에서 메시야가 났다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웃었습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삶인지 모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에게 사로잡혀 자기를 붙들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늘 그 기준에 사로잡혀 모든 사람을 판단하고, 모든 사건을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2. 예수님의 마음_요한복음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_요한복음1:47’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무시하고, 자기중심으로 해석했던 나다나엘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그의 마음, 그의 본질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의 본질을 보고 칭찬하셨습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이라고, 영원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중요한 원칙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의 상황이나 환경, 여건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에 있었던 것을 보았다. 이를 믿느냐? 더 큰일을 보리라.'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비난했고, 무시했던 나다나엘이지만, 예수님은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조차도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니었습니다.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3. 나다나엘의 변화_요한복음1:48-51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_요한복음1:48-51’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중심으로 살기만 하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엄청난 일들을 목격하고 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 사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저부터 그렇습니다. 도저히 바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받아드리니까 저와 상관없이, 저의 능력과 상관없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은혜라 합니다.

예전에는 저 밖에 몰랐습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되지, 나만 응답받으면 되지.' 그런데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오래 걸리고, 더디 가는 것 같으나 그렇게 살기로 했습니다. 내 중심적으로 살면 편한데 그 편한 것을 버리고 처음엔 조금 불편한 예수님을 내 중심에 모시고 살기로 했습니다. 세상에 살면 똑바로 예수님을 믿고 살기란 너무 불편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다들 타협을 합니다. 적당히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큰일을 못 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라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은 절대 못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완전히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를 보세요. 홍해가 갈라질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고, 빈 하늘에서 메추라기와 만나가 비오듯 쏟아지는 것을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철옹성 같은 여리고 성이 저절로 무너져 내리리라 예상이나 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Ⅲ.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가스펠 성도

1. 자기중심적인 신앙_시편103:15-16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_시편103편:15-16’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백해무익한 자기중심의 삶을 버리지 못해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불행한 크리스천이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허망한 자기 욕심, 부질없는 자기 이기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하나님의 자녀,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큰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항상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권력과 명예, 물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항상 하나님이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 인생의 말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제 결단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용기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을 인도하려면 조금 강하고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합니다. 미안한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여서 우리 교회에 왔다가 그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 분들을 생각하니 그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이 길에 여러분을 꼭 데리고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어떻게 받느냐? 자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마태복음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이 요한복음의 이야기입니다. 구원은 자기를 내려놓아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불안합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으라니?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랍니다. 그것이 성경의 이야기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자기를 내려놓으랍니다.

어렸을 적에 쥐가 많이 있었습니다. 쥐를 잡기 위해서 끈끈이를 놓은 적이 있습니다. 먹이를 주변에 깔아 유인해서 끈끈이에 붙으면 움직이지 못하고 약이 뭍은 먹이를 먹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끈끈이에 붙어서 계속해서 먹이를 먹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죽게 되는 줄도 모르고 우상을 섬기고, 세상에서 주는 유혹을 쫓아가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죽게 되는 줄도 모릅니다. 우울증이 왔는데도, 정신문제가 왔는데도, 가정에 행복이 없는데도, 불법을 행하면서도,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죽어가는 것을 모릅니다. 괜찮다 라고 말하지만 정말 괜찮습니까? 정말 행복합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2. 예수님 중심의 신앙_디모데전서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_디모데전서4:7’

많은 부부들이 불행을 겪고 있는 것은 서로 자기중심적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부부가 서로 동화되기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보다 교회 출석이나 행사에 열심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실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이던 삶의 축을 하나님 중심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신앙의 전진이 없습니다. 겨우 종교생활을 할 뿐입니다.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똑같이 망콴마을을 보고 왔어도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려도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갑니다. 저는 회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묵상일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라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실수 속에 살면 안 되겠지요? 연약하니까 괜찮아 그러면서 고의로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매일 회개합니다. 묵상일기를 씁니다. 내 중심적인 삶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_요한복음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_요한복음1:14’

이제 여러분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매일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 중심의 사고와 삶으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은혜를 가져야 망콴마을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도 보이게 되고, 우리 가족들의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도 가질 수 있습니다. 힘들고 힘들지 않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잘 먹고 못 먹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이 기준이라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잘 먹고 잘살고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과 축복을 받았는지 말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여전히 예수님의 마음이 아닌 육신의 마음, 세상의 마음으로 가지게 합니다. 그 마음은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이 시대를 병들게 합니다. 만일 언더우드와 같은 선교사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언더우드선교사님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고자 결단하셨습니다. 그 작은 결단이 한 나라를 살렸습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큰 고민이 되고, 도전이 되길 바랍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로써 부끄럽지만, 또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 가족을 볼 때, 이웃을 볼 때, 편견과 자기중심의 사고가 아닌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려고 합니다. 기도 아니면 그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주님 길어야 고작 100년밖에 자신을 책임질 수 없는 자기를 신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중심의 삶을 살아 자기만족, 자기과시를 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아닌 인간의 마음 즉 시기, 질투, 탐욕과 방탕, 음란과 분노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겉만 신앙인인 척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일’은 경험하지 못해서 늘 불평과 낙심뿐입니다. 주님 오늘 말씀으로 내게 오신 예수님 앞에 회개합니다. 이제 자기중심의 삶을 버리고, 삶의 축을 주님께로 옮기게 하옵소서.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여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 받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감으로 이 땅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 받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