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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6 주일 1부 예배


2016-03-06 주일 1부 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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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세례를 베푸는 인생_요한복음3:22-23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_요한복음3:22-23’

저도 이제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어른으로써 여기에 있는 젊은 분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참 많이 몰랐습니다.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실제로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메시지를 잘 깨닫고 빨리 이해했는데 그것이 복음을 아는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삶은 어둠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제 삶속에서 신앙생활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어른들이 욕을 먹는 듯합니다. 가만 들어보니 그들이 욕하는 내용이 전부 맞습니다. 뭐라고 반박조차 못할 만큼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마저 그렇게 살면 안 되지 않습니까? 어른으로써 여러분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습니다. 물론 모든 사과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어른들을 욕하고, 원망하기 이전에 여러분 세대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저도, 여기에 계시는 어른들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엇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까? 그래서 우리가 세례는 베푸는 인생이 되길 원합니다. 성령의 세례를 우리가 베풀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세례를 받도록 예수님께 안내하는 세례를 베풀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의 세례였습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죄 사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안내하여 구원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저는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늘 내 기준으로 비교하고, 늘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늘 내 기준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길로 오지 못하도록 오히려 막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게인, 종교지도자들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싸우고, 그토록 감정대립을 하고 있으며, 그토록 등을 돌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정말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게 관심이 있습니까? 전부 내 의로 신앙생활을 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의 차이가 정말 작습니다. 내 의로 사랑할 수 있으나 그것은 나중에 상처가 되기도 하고 분노가 되기도 합니다. 내 의로 봉사하면 그것은 원망이 되기도 하고, 교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인생은 세례를 베풀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주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사랑으로, 그 은혜로 사랑하고 봉사도 합니다. 누가 뭐라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합니다. 그런 인생이 예수님께 안내하는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Ⅱ.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그들의 관심

1. 세례 요한의 제자들_요한복음3:24-25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_요한복음3:24-25’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의리파입니다.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전부 예수님에게 보냈을 때 가지 않고 남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위기가 왔다는 것도 아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감옥에 가지 않았던 세례요한의 곁을 지켰던 대단한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마치 그와 같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설교하기 매우 힘든 부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하겠다고 하여 드리는 설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의리나 명예, 자리에 연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로 가지 않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 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어느 순간 인맥이나 자리다툼에 빠져 있는 목회자들을 많이 봅니다.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장로 임직식을 하는데 3명의 장로님이 피택이 되어 임직식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3명의 장로님이 서로 주장하던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장로 임직식 때의 순서문제였습니다. 한분은 가나다 순서대로 하자, 한분은 나이순서대로 하자, 한분은 교회등록순서대로 하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분들일까 의구심이 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받았던 분들일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이 높아지고, 예수님이 영광을 받아야 하는데 오로지 자기 생각뿐이고, 자기중심입니다. 자기 의를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가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에 대해 스승님이 증언한 그 사람이라고 지칭합니다. 참 불쌍한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그들의 관심 그리고 그들의 마음_요한복음3: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_요한복음3:26’

그들의 관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이 예전에는 건들지 못할 만큼 세례요한의 세력과 명성이 대단했는데 이제 그 인기와 명성, 세력을 다 나사렛 예수에게 빼앗겨버렸습니다. 그래서 변론을 하다가 짜증이 났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와서 고자질 합니다. 선생님, 우리에게 왔던 사람들이 전부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에게 갔습니다. 거기는 사람들이 넘치는 데 우리는 이제 별로 줄도 길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이 화를 낼 줄 알았겠지요. 대책을 세우자 그럴 줄 알았겠지요.

무슨 말인가요? 왜 우리는 이렇게 되었습니까? 원래 우리는 대단한 세력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의리도 지키고, 선생님을 따랐는데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관심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걸 오늘 우리가 봐야 합니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지 봐야 합니다. 보통 관심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과의 의리에 있던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자기중심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깨어지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당황스럽고, 화도 나고, 창피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나중에 무슨 일만 생기면 교회를 안 나옵니다. 창피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소위 말하는 시험에 듭니다. 그것은 시험들 거리가 그 사람에게만 있어서가 아닙니다. 창피한 일이 그 사람에게만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에 자신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아직도 보이지 않습니다.

뜨겁게 교회를 다니기도 합니다. 친구들이 좋기도 하고, 공동체가 좋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오면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문제를 주셨는지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기의 성공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이단집단도 있지만, 눈에 안 보이는 이단도 있습니다.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 중에 펠라기우스라는 이단이 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완전히 부패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원죄를 부인했습니다. 그때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는데 아직까지 교회 안에 남아있습니다. 인본주의 같은 거지요. 그뿐 아닙니다. 또 하나의 이단이 있는데 신사도 운동입니다. 신사도운동은 교회성장을 위한 성령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빙자해서 비 성경적인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세속적인 부, 건강, 행복, 성공을 강조합니다. 소위 번영신학이라고도 합니다. 제가 왜 신학적인 내용을 이야기하지요? 세례요한이 그토록 알려주었던, 말해주었던, 증언해주었던 그리스도가 깨달아지지 않았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지고 계십니까?

Ⅲ. 우리 신앙생활을 합시다.

1.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_요한복음3:27-28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_요한복음3:27-28’

세례요한을 통해 우리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이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단호하였습니다. 아니 확실하였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었다고 그래서 제자들에게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증언해야 한다고 오히려 말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전략이 무엇이지요? 그것은 창세기 3장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간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 파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창세기 3장의 사건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자리에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입니다. 자기 의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하고,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죄로 인해 가정도 파탄 나고, 삶도 파탄이 나는 것을 모릅니다. 남편도 내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내도 내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녀도 내가 낳았으니 내 것이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존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함부로 때리고, 상처를 주고 전부 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나면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는 어디서 나옵니까? 내가 연약한데 하나님의 은혜를 주셨구나에서 나오지요. 그런데 마귀는 착각하게 만듭니다. 파탄 나고 있는데 감추어버립니다. 성공으로, 물질로, 명예로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2.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_요한복음3:29-30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_요한복음3:29-30’

세례요한은 제자들과 달리 그리스도를 소망하였습니다. 천국을 소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오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신경조차 쓰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다른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저렇게 손해를 보면서 괜찮다고 말씀하실까? 왜 저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감사하다고 할까? 그런데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고,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는데 그것은 핍박과 유혹을 견딘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이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내 기준도 사라지고, 자기중심도 완전히 사라집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살게 되고, 예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분 그것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를 바라만 보아도 좋습니다. 마치 신부를 취하는 신랑이 너무 기쁘잖아요. 생각해보십시오. 묵상해보십시오. 우리를 살리시려고 신부로 오셨어요. 그것을 아는데 세례요한이 지금 사람이 몇 명오냐 그렇지 않냐로 마음이 상할까요? 제자들이 다 예수님께 가길 원할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감옥에 가서 순교하길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길을 닥을 수 있다면 자기는 그것이 너무 행복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독립운동하면서 순교했던 순교자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순교한 것이 아니지요. 가만 보세요. 주를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그 기쁨으로 헌신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 그래요. 예수님을 주인삼아 사는 사람들의 그 기쁨을 세상은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논리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그 기쁨으로 충만하길 바랍니다.

3. 마르다와 마리아_누가복음10:38-42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에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_누가복음10:38-42’

누가복음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시니 음식장만을 했습니다. 잔칫상을 차릴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화가 났습니다. 자기는 밥도 하고, 반찬도 만들고, 잡채도 하고, 고기도 굽고 거하게 예수님을 위해 잔칫상을 만드는데 너는 뭐하냐 입니다. 제 모습입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세례요한의 제자들 모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두 번이나 부릅니다. 그러면서 너는 왜 이렇게 염려하고 근심하냐고 하셨습니다.

대장장이가 먼 여행을 떠나면서 조수에게 말발굽을 하나주면서 같은 것 100개를 만들어놓으라 했는데 다녀와서 보니 말발굽 100개가 모양이 다 달랐습니다. 왜 그렇지요? 처음 만들 때는 주인이 만들어놓은 것을 보고 만들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것을 계속 보고 만드니 100째 말발굽은 완전 다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렇습니다. 큰 교회, 다른 교회를 따라가는 것은 문제가 옵니다. 프로그램을 잘해야 하겠다, 예배당을 잘 지어야 하겠다, 교회가 부흥하면 되겠다 그러면 변화가 옵니까? 인생의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인생의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한 사람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변화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교회는 천국 같은 공동체가 됩니다. 예수님을 주인 삼는 교회이기 때문이지요.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모신 장본인이라도 예수님과의 관계가 되어있지 않고 이것저것 하고 계시다면 이제 한 가지만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세요.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정말 날 구원하신 분이 예수님이 맞다면 오직 예수만 고백하셔야 합니다. 잘 안 되도 괜찮아요. 문제가 와도 괜찮아요. 마귀가 역사하겠지요. 그래도 괜찮아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살길이니까요. 살길로 가야만 합니다.

✔ 주님 우리는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잘 먹고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고, 성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의리로, 전통으로, 내 의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네요. 거기에는 예수님도 없고,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예수님에게 있길 원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세례요한처럼 다 없어져도, 다 사라져도 기쁨이 충만하게 되길 원합니다. 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넘치길 원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이 세례를 베푸는 인생이 되게 해주세요. 한번뿐인 인생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르는 인생이 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