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2014-02-21 금요예배

<금요예배>

일시:  2014년 2월 21일

제목 :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

말씀 : 시편 7 : 8-17

설교 : 오승주목사




2014-02-21 금요예배.hwp




아래 링크를 통해 음성 메시지를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db.tt/6vdqp29C



 오늘 처음으로 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제목이 나왔습니다. 아직 빠진 분들도 있지만 이름이 나와 있으니 기도할 때 활용하여 기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Ⅰ. 누구를 위해 살고 있나요?

오늘 시편은 다윗이 사울의 부하들에게 쫓길 때에 쓴 것입니다(사무엘상22, 24, 26장) 다윗은 그를 비방하는 원수들에게서 구원받기를 기도하면서 자신의 무고함을 엄숙히 단언하고, 악인을 심판하여 자기의 무고함을 입증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베냐민 사람 구시라는 사람이 사울에게 다윗이 왕위를 도전하며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을 했을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 사울왕은 그 모함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같은 베냐민 지파인 구시와 함께 다윗을 곤경에 처하게 한 것입니다.

시편을 묵상하면서 많은 것들을 얻게 됩니다. 오늘 다윗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중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야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살아가는 것은 회사에 있던지 학교에 있던지 역기능의 가정에 있던지 간에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 보다는 기독교인들이 전전긍긍하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자체는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거슬리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교회의 모습이 ‘우리는 문화적인 교회야, 행복한 교회야, 너희들이 와도 불편함이 없는 교회야.’ 라고 국회의원들이 선거할 때의 모습처럼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복음의 본질을 손상시켜가면서까지 불신자들의 마음에 상처와 부담을 안기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반대로 진짜 복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된 복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려움과 핍박,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을 붙잡고 사울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무고함을 말하는 기도를 했지만 사울과 싸우지 않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과 모종의 이면계약이 있기에 가능한 행동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정말 복음을 가졌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안타까운 것은 이제 교회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불신자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오랜 시간 교회에 머무르면 중직자가 되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 복음에 거슬리는 영향을 주는 교회들이 될 것입니다. 좋은 이미지를 위해 복음을 가공한다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좋은 이미지를 위해 복음을 가공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불편하고 거슬리게 한 그 복음을 다시 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저 부터도 이 일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진짜 복음을 모르고 껍데기를 쌓아 간다면 언젠가 그것이 들통이 나고 종교적 껍데기가 사라졌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놓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일을 위해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그 분을 만족케 할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_ 존파이퍼 ’

Ⅱ. 수학보다 더 강한 계통성이 요구되는 신앙생활

수학은 계통성이 강한 과목입니다. 계통성이 무엇일까요? 순서에 따라 기초를 다져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전부 연계가 되기 때문에 순서에 따른 기초 확립이 되지 않으면 결코 수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갑자기 공부를 해야지 한다고 해서 수학이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원리는 수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이러한 계통성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이 계통성이 손상될 때 심각한 문제가 왔습니다.

1. 명목상 그리스도인

콘스탄틴 황제의 회심과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마구잡이로 만들어냈습니다. 국가가 전부 예수를 믿으라 하고 교회를 가야만 하는 법을 제정하니 그것이 너무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인데 역으로 가장 문제가 된 시점입니다. 아이러니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똑같습니다. 교회 가는 것이 너무 쉽고, 교회에 가면 시스템과 프로그램이 너무 잘되어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너무 편합니다. 교회에 가는 것에 대해 방해하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그러니 복음의 본질을 체험하는 기회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문제이지 세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은 교회가 자충수가 된 것입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을 신자로 간주해가며 대중성 을 확보하려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평전을 읽으면서 저는 놀랐습니다. 침례를 주기 전에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예수 믿고 증거가 있는지 반드시 확인을 한다고 합니다. 시험이 들만큼 확인하고 침례를 준다고 합니다. 저 사람이 진짜 신자인지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가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더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관을 가져야겠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 봉사와 헌신을 강요하고 그것으로 교회에 옭아매는 것이 결국 시간이 지나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장본인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니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통성을 지켜나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신앙생활의 단계를 밟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_신명기4:40’

2. 진짜 신자입니까?

교회성장이 늦더라도 사람들의 인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신앙의 도리를 기초부터 철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가는 참 신자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니까 신앙도 자기중심으로 하게 됩니다. 이것이 안되니 은혜가 없다고 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준이 자기에게, 세상에 있으니 심지어 하나님도 만들어냅니다. 꼭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어내서 하나님을 자기의 기대와 요구에 맞도록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변형시킨 것입니다. 혹 우리가 가스펠 교회에 맞는 하나님을 변형시켜 만들까, 혹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변형할까 걱정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주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그대로 될 줄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마지못해 메추라기를 주고 반석에서 샘이 나게 하시는 것 입니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그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그리고 대학교 때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는 목적이 없었습니다. 정말 삶이 어려웠는데 그냥 입에서 찬송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시기가 끝난 이후로 타락한 것 같습니다. 외형적으로는 멀쩡했지만 사실 내면은 교만과 야망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친구들을 만나 고 돌봐줄 여유도 없이 뛰었습니다. 꼭 종교전문가가 되어 정답을 가지고 종교적인 멘트를 하는 그런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 속사람은 어느 순간 여호와의 이름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어려울 때 새벽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주시는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물론 그것마저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가정복음화의 생명의 역사를 주셨지만 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괜찮은 목사였는지 모르지만, 부름 받은 신실한 종은 아니었습니다. 중대한 병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2, 3년 전부터 어떻게 이 중대한 병과 싸울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저는 많은 시간을 방황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불안감(성공)과 사람들의 시선에 늘 신경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감사하게도 그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자각하게 하셨습니다. 실타래처럼 얽힌 인간관계속에서 저는 이제야 본질을 찾은 느낌입니다.

시편을 묵상하며 많이 울었습니다. 제 속에 여호와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질을 놓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 사는 하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능력이나 조건, 열심히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칭송을 받는 찰나에 고난으로 몰아넣으셨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기도했습니다. ‘할 수 있다면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 은혜를 나누는 일에 생을 드리길 원합니다.’ 참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_신명기5:10’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계명을 지키며 살지 않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단의 발 아래서는 그 축복을 맛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만 의지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Ⅲ. 부끄러워진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

제가 그런 상태에 빠져있으니 자연스럽게 여호와의 이름은 부끄러운 이름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고난과 흉년의 때가 오기 전에 여호와의 이름이 제 삶에 없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제 능력으로 한 것입니다. 은연중에 내 자랑과 내 의를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내 의로 되어진 것 같아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성공했다. 실패했다,’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1. 예수 믿으면 행복해집니까?

여러분 정말 예수 믿으면 행복해 질 수 있습니까? 그렇기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행복하지 않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좁은 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행복하다니요? 오히려 예수 믿으면 더 불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고, 교회라는 공동체에 시달려야 합니다. 자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남들이 일요일에 산에 가서 사진도 찍고 놀러 다니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행복합니까? 그런 자유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오늘 다윗은 주를 위해 산다고 했는데 고난이 찾아오니 이유 없이 사람들이 조롱하니 억울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은 주를 위해 산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모함하고 조롱하니 억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들을 멸하셔서라도 내 죄를 드러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힘들어 죽겠습니다. 왜 이렇게 회사생활이 어렵습니까. 라고 기도 한 그 기도 뒤에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지요? 이 길이 맞지요? 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_마태복음7:21‘

금요철야에 나와서 기도원에 나와서 ‘주여, 주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계통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바로 시작해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연약하면 연약한데로 있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2.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_시편7:17a'

다윗은 이런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단계 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스펠 가족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겠습니다. 그는 그 환경에서 그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하다고 고백합니다. 그 말은 깊은 기도시간에 힘들고 원통한 것들을 부르짖었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선 것입니다. 다윗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될지 몰라 답답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습니다. 그러한 인도함이 잔인하고 모질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길과 방향에 대해 선명하게 알고서 그 길을 간다는 것이 꼭 축복은 아닙니다. 미래가 인간의 시야에 예측 가능한 것이 된다면,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은 불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나선 이 길, 이 길의 고단함과 힘겨움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면 누가 이 길을 가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이 길이 얼마나 고단한 길인지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실에서 초라함으로, 열매없음으로 울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놀랍도록 성숙되어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 환경 속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중심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신앙인들이 모인 건강한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3.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_시편7:17b'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그의 중심에 그의 삶에 그의 인생에 여호와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10년의 광야생활이 거뜬했습니다. 문제없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문제는 없습니다. 고난도, 핍박도, 어쩌면 우리스스로 잘못해서 저지른 자충수까지도 하나님은 감싸 안아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신을 의지하고 찬양하고 당신이 세운 길을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행복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 자체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신앙인입니다. 어디로 가냐에 따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따라가는 그 인생 자체가 감사인 것입니다.

Ⅳ. 임마누엘

오늘 시편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는 '임마누엘'입니다. 다윗이 너무 억울하고 힘들었지만 다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임마누엘’ 이었습니다. 위기 역경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털어놓는 기도와 찬송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곧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행복이 아닙니다. 자꾸 신앙의 목적을 행복에 두십니까? 좋은 직장, 좋은 집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까? 그러니 교회가 자충수를 두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거룩이어야 합니다. 그 신앙의 목적을 위해 처절하게 싸우고 갱신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 10여년 동안 그것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늦게나마 답을 주셨습니다. ‘내가 저 성공의 자리에 가야지’가 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음을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뛰어 다니는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는 초대교회와 같이 회복하려는 삶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없다면, 복음이 필요없다고 마음의 고백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처럼 축복은 없습니다. 저는 화려하고 실력이 있는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복음을 말할 수 있고 여러분에게 충고와 책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조금 적게 모일지라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교회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이 땅에 지금 우리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따라 감사함으로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는 백성이 되기 바랍니다.

문제와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떤 흉년의 때에 머물러계십니까? 고난 속에 있습니까? 코너에 몰려 있습니까? 오늘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철저하게 신앙을 점검하기 바랍니다. 불신자보다 더 못한 종교인인지 아니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기준인 '임마누엘'에 맞추도록 살고 있는지. 그것을 위해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노력하고 나아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_마태복음9:12-13’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잘 못합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죄악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