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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4 금요예배

<금요예배>

일시:  2014년 2월 14일

제목 : 고난중에서도

말씀 : 시편 6 : 1-10

설교 : 오승주목사



2014-02-14 금요예배.hwp



아래 링크를 통해 음성 메시지를 파일로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db.tt/bUZ9J5f3


아래 링크를 통해 영상으로 메시지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http://youtu.be/NXBCbkUFxGo


한주동안 어떻게 사셨습니까?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굉장히 긴 시간인데 지난 주 주신 말씀을 묵상하며 사셨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배에 나오는 발걸음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저는 한 때 몸무게가 100kg에 육박했습니다. 그때는 야식도 많이 먹고, 일도 많았지요. 그런데 문제가 온겁니다. 아퍼서 병원에 가면서 10kg이상 살을 뺐습니다. 살이 빠지고 나니 몸도 가볍고 생활도 달라졌습니다. 영적인 것도 똑같습니다. 영적으로 살아나서 정상이 되어져 가면 몸이 가볍듯이 신앙생활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사모하는 마음이 예배 드리면서 느껴지시길 바랍니다.

Ⅰ. 무엇이 고난입니까?

‘고난은 어디서 올까요?’ 오늘 시편을 묵상하면서 저는 계속 이 질문을 계속 했습니다. ‘도대체 고난이 어디서 왔을까?’ 오늘 장면은 다윗이 온몸을 쥐어 짜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이거든요. ‘스올에 있는 사람이 기도하면 들어주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나를 건져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시편 6편은 회개의 모범적인 시편이라고 신학자들이 이야기 합니다. 중요한 것은 도대체 고난이 어디에서 왔을까?입니다. 다들 답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0.1초도 지나지 않아서 머릿속에 답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오는 ‘고난’이 문제입니다. 오늘 시편은 다윗의 자기 자신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쓴 시입니다. 결국 머릿속에 떠오르는 답을 내려놓고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도대체 고난은 어디에서 올까?’입니다.

이 시를 스미닛이라는 단어로 말을 합니다. 해석이 어려워서 할 수 없지만 추측을 해서 보면 8현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해석을 하기에는 정말 낮은 음이라는 뜻입니다. 추측이지만, 다윗이 노래로 만든 것인데 우울한 노래입니다. 고난이 그렇게 온 것이죠.

다윗은 육신의 질병과 적들의 공격으로 인한 괴로움가운데 이 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괴로운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괴로운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니 다윗은 그 시대의 법과 질서에 따르면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의 왕들은 다 그 정도는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회개는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윗의 죄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그것이 축복이지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이 어디서 오든지 간에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태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고난이 도대체 왜 온 것입니까? 저 사람 때문입니까? 고난이 세상의 기준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죄인지 왜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지 그것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죄의 기준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고난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회개도 없습니다. 그리고 용서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도 없으며,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소외계층의 아이들, 제3세계의 아이들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축복도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의 차이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기도제목을 찾아야하겠습니다.

C.S 루이스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좀 더 선하다, 좀 더 낫다, 좀 더 거룩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악마의 지배를 받아서 행동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의 태도는 영적 교만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고, 그런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교만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인간의 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꼭 기억하라’

무슨 말일까요? 굉장히 난해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남을 볼 때 그렇게 판단합니다. 누군가 고난에 빠져 있으면 ‘저 사람이 왜 고난에 빠져 있지?’라고 합니다. 지금 제 친구 목사님 한 분이 고난에 빠져 있습니다. 누가 봐도 고난인 상황입니다. 교회를 열고 3년이 되지 않아 교회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저는 몰랐는데 이번 주에 그 사건의 이유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울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친구를 조롱하는 소리를 듣고 울었습니다. 다들 조롱을 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럴 수도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일 수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친구를 도울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고난을 두고 사람들을 볼 때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기준입니까? 세상의 기준입니까? 혹시 옆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Ⅱ. 무너진 영적 상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너져 버린 영적인 상태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준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상태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다윗은 그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 기준을 주셨습니다. 다윗이 이를 청종하지 않고 세상의 기준으로 살았다면 영원히 회복하지 못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범죄 했음에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마음에 하나님의 기준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1. 무너진 영적 상태를 인정할 수 있나요?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는 지금 어떻습니까? 어떤 기준으로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말이죠!

제가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30년 정도 된 원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놀라운 이야기들을 하셨습니다. 저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몇 가지 검사를 하시더니 제가 태음인인데 저의 체질과 성격, 삶의 패턴 등을 전부 아시더라는 것입니다. 저의 몸 상태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건강해질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걸으면 몸에 좋고, 몸은 동쪽으로 두고 자야 하며.. 등등 이야기를 하는데 원리는 원래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이 육신의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중요한데, 감사한 마음, 좋은 마음,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 마음이 회복되면 육신이 회복이 된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은 창조원리이지 않습니까.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기 위해 음식조절, 운동, 삶을 가꾸면 자연스럽게 원래의 몸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원리들을 잘 모르니 옆의 것들을 하게 됩니다.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기준을 정해주시고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기준만 따라가도 건강하게 살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분이 모르는 진짜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상태입니다. 영적인 것도 똑같습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 데 세상 병원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그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큰 결단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결단이 없으면 절대 건강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연한 것들을 기준으로 제시하는데 그것이 맞는 것입니다. 심각한 경우에는 치료와 심지어 수술까지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요. 영적인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진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이 안되고, 예배드리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고, 뭔가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아간다면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혼의 병원’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역에 일어날 미션홈은 그런 병원역할을 하는 미션홈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교회에 갈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병에 빠져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목사만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단순히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되어서 모든 것에 문제가 오는 것입니다. 선우가 엄마 아빠랑 떨어져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문제에 처하고 위험이 올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먹으면 몸에 문제가 오듯이 영적인 것은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무너진 영적인 상태를 인정하느냐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영적인 상태인지 인정하셔야 합니다. ‘병원에 가지 않아도 치료를 받을 수 있어, 헬스장에 가지 않아도 살을 뺄 수 있어’라고 합니다. ‘내가 진단을 받아 보아야겠구나’ 라고 할 때 영적인 회복이 시작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예배를 제대로 드려라!’고 했을 때 기분이 나쁘거나, 아니면 아예 무덤덤할 것입니다. 그 두가지 전부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_잠언19:3’

'악을 행하는 너희는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어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_시편6:8-9‘

다윗이 그 기준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장면입니다.

2. 어떻게 회복해야 합니까?

영적인 치료와 회복에 관해서는 성경에 한 가지 길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씀입니다. 제가 말씀을 그냥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가 교회 틀을 갖추기 위해 시간을 내어 준비하는 시간이 많지만, 본격적으로 해야 할 것은 성도들이 그리고 우리 주변에 영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영적인 기준에 맞추어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저는 제가 겪어보지 못하고 확인하지 못한 말씀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렇게 살아라’고 해야 겠는데 제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그 말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설교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준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기준은 목사의 기준도 아니고, 다른 교회의 기준도 아닙니다. 강단말씀을 주셨을 때 여러분의 마음에 주시는 기준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주신 기준에 맞추면 자연스럽게 회복과 치유는 일어날 것입니다. 무엇보다 정말 평안하고 세상의 행복이 아닌 성령의 충만함으로 오는 행복이 있겠지요.

우리가 장소가 안정이 되면 가장 먼저 이 성경공부와 훈련을 할 예정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요. 이 기준까지 도달 하도록 체계적인 말씀훈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예 무너져서 이런 마음조차(회개하는 마음, 우리가 어찌할꼬) 가지지 못하는 가족들은 직접 가야 합니다. 병원에 갈 힘이 없는 사람은 의사가 가야 하지요?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생명수를 마시면 목이 안 마릅니다. 그것이 살길입니다. 회복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생수가 여러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생수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곧 생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결론이 나면 됩니다. 그런 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알아’라고 합니다. 단순히 ‘나는 알아’ 가 아닌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실제 그리스도를 알면 생활이 바뀌게 됩니다. 생각과 마음, 모든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은 거의 지식입니다. 초대교회가 국교화가 되고 영지주의같은 것들이 일어나 지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성경을 이야기했습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이 주인되지 못했습니다. 관습과 전통이 중요했겠지요. 결국, 중세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그렇습니다. 다 안다고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닌데 나는 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_요한복음4:14’

Ⅲ. 무너진 삶의 상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무너진 삶의 형태를 회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영적인 상태를 회복하는데 삶이 중요합니까? 병원 갈 시간이 없어요. 운동할 시간이 없어요. 책 좀 읽으면 마음이 좋겠는데 그럴 시간이 없어요. 게으르든지, 너무 분주한 것입니다. 시간이 진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남으면 그 시간에 음란한 행위를 하러 가고 술집에 가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큰 병이 오면 마지못해 병원에 가게 됩니다. 돈도, 시간도 더 듭니다. 어리석지요. 한치 앞도 내다보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1. 삶이 무너져 있으면 영적인 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삶이 무너진 기준이 무엇입니까? 아침에 늦잠을 자는 입니까? 술을 마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율법입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기준은 그것이 아닙니다. 삶이 무너진 기준은 영적인 생활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준입니다. 술을 마시더라도 삶이 하나님을 묵상하고 찬양한다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술취하지 말라는 것은 반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거룩하게 사는 것을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예배 생활도, 묵상생활도 안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바르게 살아도 영적인 생활이 되지 않는다면 그 삶은 율법적인 생활입니다.

사실, 저는 고민입니다. 예배가 정말 사정이 있고, 자신의 현장에서 되어지면 상관없는데 자꾸 안보이는 핑계가 쌓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꾸 코너에 몰리고, 흉년의 때로 돌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괜찮은데 개인이 그런 상황 속에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못 깨닫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주일날 말씀을 나누겠지만, 하나님이 인생가운데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질문해보셔야 합니다.

다윗이 다 가지고 아마도 최고의 존경을 받으면서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책망하십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취하였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으면 해석을 올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무엇을 놓쳤습니까? 영적인 생활을 놓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삶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삶과 영적인 상태는 맞물려져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식하는자, 바리세인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복과 성공이 기준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의 기준에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무너져 있습니다. 기도생활이 안되고 있습니까? 불신자를 보면 어떤 마음이 생깁니까?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너진 삶입니다. 규모 있는 삶이 필요한 데 무엇이 규모 있는 삶인가요? 그런 규모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 규모입니다. 새벽이나 저녁이나, 혹 직업에 따라 자기의 스케쥴 속에 영적인 생활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삶을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중심은 공동체예배입니다. 개인은 엄청 잘하는 데 공동체가 안되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공동체를 위한 개인을 찾으십니다. 그래야 가정도, 이 지역도, 이 나라도 살릴 수 있고 선교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혼자만 신앙생활 잘하면 그것이 잘하는 것 인줄 알고 그러지만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래서 C.S,루이스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에 가서 섬기지 못하고 낮아지지 못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품지 못합니다. 진짜 영적인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부족하지만 공동체가운데서 자신을 변화시켜가고 또 다른 사람을 섬기고, 또 힘이 되어 제자가 되면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치유의 최고단계입니다. 치유가 되지 않은 사람은 절대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복음을 전해서 누군가가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날아갈 것 같을 것입니다. 이 공동체 안에 어려분이 전도한 제자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치유의 최고 단계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_잠언14:27’

2. 삶을 무너뜨리는 존재를 알고 계십니까?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조롱하는 자입니다. 물질로, 행복으로, 혹은 가난과 저주로 묶어버립니다. 그들의 목적과 전략은 무엇입니까? 깨어있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막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전략을 다 동원합니다. 가장 큰 전략은 ‘고난’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고난을 줍니다. 욥에게, 초대교회에게, 오늘 말씀의 다윗에게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 그렇게 합니다. 그것이 사단의 최고 전략입니다. 한국 교회에 곧 이 고난이 올 것입니다. 예언이 아닙니다. 미국교회가 그러했습니다. 한국교회에 곧 몰아 닥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절망과 낙심을 줍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에 굳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혹 그런 상황이 와도 릴렉스하고 묵상하여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 고난을 주셨는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고난은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그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고 복음을 위해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함께 하는 지체가 있을 때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이런 상황에 빠져있어도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 줄 것입니다. 함께 할 것입니다. 정말 기도로 섬길 것입니다. 그럴 때 사단이 조롱자가 떠나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_베드로전서5:8-9’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_에베소서4:27’

3. 그렇다면 싸우십시오. 그것이 가정과 교회, 국가를 살리는 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싸우는 것입니다. 싸움은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죄와의 싸움입니다. 싸움의 방법은 기준에 맞추는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라면을 가져다 주더라도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것도 그러합니다. 사단과의 싸움은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맞추어 지면 사단은 자연스럽게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살도록 노력하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견고한 의뢰가 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을 통해 가정과 가문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는 한 사람이 있으면 온 가족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실력 있는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직장에 가기 싫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저도 학교가 싫고 세상이 싫었지만 성경을 보면 볼수록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결단을 해야 합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앞에서 상사를 섬기고,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교회는 그런 건강한 중직자로 가득할 때 국가에 유익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핍박과 고난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_잠언14:26’

Ⅳ.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항상, 24시간, 좋은 일, 안좋은 일 상관없이 이것이 제 신앙생활의 기준입니다. 은혜를 생각하면 화도 풀립니다. 은혜를 생각하면 잘못된 삶도 되돌리게 됩니다. 잘 안되지만 이익과 손해의 한계도 뛰어넘게 됩니다. 하나님이 채우시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긍휼입니다. 신기하고 놀랍지요.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덮어주신 것입니다. 지옥을 죄 짓는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사람이 가는 것입니다. 천국을 죄가 없는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주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이 필요해요라’고 인정하는 순간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가 자꾸 하나님의 자리로 가려고 하는 것이 죄의 습성, 교만입니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새벽에 나가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가난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어렵지만 남모르게 누군가를 위해 돕고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은 우리의 생색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 기준, 세상 기준으로 되지 않습니다. 누굴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라나요? 오늘 성경은 긍휼히 여기야 긍휼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진짜 하나님 은혜를 받으려면 내 죄가 인정이 될 때입니다. 오늘 다윗의 메시지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진짜 주인으로 계십니까? 무엇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습니까? 진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죄악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죄가 무엇입니까? 영적 생활을 하지 않는 교만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는 교만입니다. 말로는 다 안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려놓고 있지 않습니다. 은혜가 임할 틈이 없습니다. 정말 은혜를 받고 싶다면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거실에 치장용으로 걸어 놓는 액자처럼 여기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아마 오늘 말씀은 한국교회가 살고 우리가 다시 빛을 발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흠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흠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흠을 두고 하나님앞에 회개하고, 이제 그런 삶에서 벗어나 작은 예수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준에 맞춰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버릴 것, 인내할 것이 정리가 될 것입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야 우리 또한 흠 있는 자를 가슴에 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위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_마태복음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