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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3 주일 1부 예배

< 주일 1부 예배 >

일시:  2014년 4월 13일

제목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씀 : 마태복음 1:18-25

설교 : 오승주목사


2014-04-13 주일1부예배.hwp



아래 링크를 통해 음성 메시지 파일을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db.tt/GilHTldV



Ⅰ. 마태의 고백 - 2천년동안 신실하신 하나님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이번 주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주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날입니다. 그래서 성 금요일이라 합니다. 절기를 지키는 것은 우리가 의미를 찾고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주에는 금식도 하고 화려하게 하는 것들을 자제하기도 합니다.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아도 되지만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고 죄사함 받았는지를 묵상하길 바랍니다. 왕의 자녀로써 복음을 누리지만 이번 주간은 그 고통당하심의 이유를 묵상하는 한주가 되길 바랍니다.

더불어 마태복음의 설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4복음서 중에 세리인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4복음서는 같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기록하였지만 각각 특징이 있습니다. 그중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주로 이방인보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직업은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입니다. 그래서 미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지배국이었던 로마의 권력에 빌붙어 세리노릇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같은 민족에게는 매국노로 불렸고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그 열등감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태와 같이 열등감이 많고 미움을 받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바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마태처럼 변화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유대인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으로 설명하는 데 놀라운 것들이 많습니다. 앞으로 마태복음을 보면서 그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고백하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것은 세리인 마태가 어떻게 예수님의 족보를 다 꿰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을 만나고 많은 연구를 하고 공부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역사관이 필요합니다. 중세시대에는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버리셨습니다.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역사와 상관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어떻게 성취해 가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세기22:18)”라고 하셨습니다. 또 다윗에게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사무엘하7:12)”하신 말씀이 정확하게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이 오래전에 약속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오늘, 지금, ‘나’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거쳐 예수님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기 때문에 많은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창세기의 ‘여인의 후손(창세기3:15)’에서 이사야의 ‘임마누엘(이사야7:14)’, 마태복음의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님”으로 오시기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땅도 자식도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25년 불임의 고통을 주시고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 훈련 뒤에 이삭, 야곱을 지나 모세의 출애굽, 여호수아의 모든 전쟁을 거치고, 사사시대를 거치고, 시간적으로 더 많은 훈련을 거쳐서 다윗이 태어났습니다. 다윗에게 많은 삶의 굴곡을 주시며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때로부터 더 많은 사건과 아픔들을 거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구속사의 정점에 다윗이 있고, 가장 마지막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것처럼 25년만이 아닌 2천년 만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훈련의 시간이 많이 지날수록 우리는 수준이 높은 신앙인이 됩니다. 예수님을 쉽게 믿으면 쉽게 포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점진적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바로 시대에 히브리 여인들이 낳은 남자 아이를 모두 죽게 해서 예수님이 못 오실 뻔했습니다. 아달랴 여왕 때도 이스라엘 왕조의 모든 남자들을 죽여서 예수님이 못 오실 뻔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실 때도 헤롯왕이 베들레헴 지경안에서 난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해서 못 오실 뻔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서 우리 가족은 다 죽을 것 같고 예수님이 오시기는커녕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잘 되는 꼴을 못보고 끝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택하셨다면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한 사연 속에서도 반드시 예수님은 오십니다. 아슬아슬하더라도 예수님의 후손이 길이길이 우리 집안에 있을 것입니다.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하님이 믿어지기까지의 많은 사연과 굴곡들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을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결같이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인생은 굽어 살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 의인의 세대를 이루시려고 찾고 계십니다. 저는 늘 좌절하고 낙심하고, 넘어짐이 반복되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한결같이 저를 인도해주고 계십니다.

Ⅱ.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오셔야 했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단번에 해결하시지 도대체 왜 이렇게 복잡하게 역사를 만들어 예수님을 소개하고, 또 이 땅에 보내셨을까요? 노아의 시대에 한번 그런 일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후회하시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하셨습니다.

1. 죄에서 구원한 사건

어떤 누구도 죄의 문제를 비켜갈 수 없습니다. 죄에서 놓이는 것은 예수님을 낳는 길밖에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죄 문제와 상관없이 교회생활을 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쓰인 죄라는 단어에는 ‘과녁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지나쳐도, 부족해도 죄인 것입니다. 너무 집착해도 죄이고 등한시해도 죄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무얼 해도 죄라는 것입니다. 과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이기 때문에 집착해도 평안이 없고 등한시해도 평안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명예, 돈을 가지면 평안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을 등한시 하고 청렴하면 평안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죄 문제는 그것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죄 가운데, 저주 가운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성령으로 잉태되는 사건으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고 그것은 회개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기 죄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죄를 깨닫게 해줘야 합니다. 그냥 와서 듣고 ‘참 좋은 말씀이야. 저 사람은 죄인이야. 나는 이 정도면 됐지.’라고 한다면 설교가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죄를 봐야 합니다. 남의 죄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돈과 학벌의 문제, 가정과 직장에서의 불화, 이웃과의 분쟁, 모든 불화에서 내 죄를 봐야 합니다. 모든 불화의 근원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싸우며 갈라지는 것은 모두 죄 때문입니다. 그 곳에서 내 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인생의 어떤 문제도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가난과 질병에서 구원할 자 예수’가 아니라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빈민운동가도 혁명가도 아닙니다. 오직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장벽,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처녀의 뱃속에 잉태되신 것입니다. 돌팔매질을 당할 그 자리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_마태복음1:21b

2. 말씀을 성취하시는 사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수많은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을 신뢰하고 갈 때 내 사건이 말씀을 이루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즉흥적으로 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앞날이 보이고, 인생이 보입니다. 처방이 나오게 됩니다.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봐야 하기 때문에 ‘보라’라고 하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지만 그 환경을 보지 말고 함께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예언이 언제 나왔을까요? 이사야 7장에서 아하스가 아람과 에브라임 왕의 연합을 너무 무서워하니 하나님이 징조를 주셨는데, 그 징조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였습니다. 그 엄청난 예언을 히스기야같은 성군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악한 아하스왕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아하스는 그 징조가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해와 달을 멈추고 천사를 보내시지 않고 무슨 말씀을 하시느냐고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 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전쟁에서 두려워하는 아하스에게 그 말씀을 주신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네가 지금 전쟁에서 이기고 싶어 하지만 내가 주는 징조는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는 것밖에 없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구원하러 오실 메시야를 보라는 것인데 아하스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유를 보라고 하신 것인데 그것을 놓쳤습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_마태복음1:22-23’

Ⅲ.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1. 요셉과 마리아의 믿음

사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 마리아가 잉태된 사실을 듣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의 역사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온 에너지를 다 모아서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을 듯합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마리아를 의심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사랑하는 약혼자를 위해 가만히 끊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_마태복음1:19’

그래서 주의 사자가 나타나 알려주게 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더 생각해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설마 자신의 집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실 것을 상상해 보았겠습니까? 그러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나타나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정에 요셉, 마리아와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길 기도했습니다.

창조주 예수님께서 여인의 몸에 잉태라는 수단을 통해 티끌처럼 낮아진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을 다 멸하시고 새롭게 인간을 창조하여 새 시대를 열어도 되는데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안개, 티끌, 물 한방울, 먼지, 풀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착해지고, 나의 불순물을 빼내겠다고 합니다. 혼자 온 우주의 에너지를 다 모아도 스스로는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24)'라고 탄식했습니다. 선을 행할수록 불가능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반도체를 제작하는 데 사용하는 금실은 불순물이 들어가면 쉽게 끊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도 100%의 금실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이 없으니 99.99%의 금실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순도 100%를 위해 모든 불순물을 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순금에다가 불순물을 집어넣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아무것이나 집어넣으면 나쁜 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0%의 순도를 가진 죄인입니다. 우리의 의도는 1%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100%의 금으로 완전케 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죄가 덮혀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죄가 없어진 것처럼 의롭다고 합니다. 가스펠교회 성도님들은 평생 잊지 않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욥기 23:10에서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_마태복음1:20’

2. 말씀을 순종할 때 일어나는 기적

마태복음 1:24에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니'라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 아침에 일어나 바로 순종했습니다. 말씀을 이루려면 반드시 적용과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묵상을 어떻게 합니까? 강단말씀을 요약하고, 느낌을 적고, 그 다음에는 적용을 해야 합니다. 나에게 적용이 있어야 말씀을 이루시는 사건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감으로, 감정으로, 느낌으로 합니다. 말씀이 내게 적용이 되어야 사건이 됩니다.

사탄도 생각속에 역사하고, 하나님도 생각 속에 역사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요셉에게 가만히 끊고자 하는 생각을 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주의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한번 더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도대체 얼마나 생각하셔서 요셉과 마리아를 선택하셔서 이 일을 감당하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보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꾸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만 있을까?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을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뭘 모르셔서 처녀 마리아의 배에 잉태를 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잘못아시고 그런 가정, 그런 사건을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럴 실 수가 있습니까?'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기적도 만들고 그 어떤 문제도 사랑의 결실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_마태복음1:24’

Ⅳ. 내 인생의 홈런

설교의 마지막 제목을 지으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구원하신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1회 때도, 2회 때도, 8회까지도 질 수 있지만 9회에 뒤바뀔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족보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듯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온 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이스라엘은 천년의 노예생활을 거치고 500년의 번영기와 500년의 암흑기를 지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우상숭배와 죄를 일삼으면 번영기 500년만큼이나 암흑기 500년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하셨습니다. 천년동안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계보에 다 올라감으로써 하나님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라 그러한 느낌으로 이 족보를 적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해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죄 많은 다윗이 어떻게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 다는 것을 족보를 통해 보이신 것입니다. 마태는 그것을 통해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힘을 얻은 정도가 아니라 깨달은 것입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에 시작되는 예수님 족보의 요약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_갈라디아서3:29’

저는 저의 속과 여러분의 속을 좀 긁으려고 합니다. 사실, 내 수치가 드러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살아가야 합니다. 껍데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죄가 드러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교회에 와서 자꾸 내가 한 일을 생각하면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로써 왜 이런 저런 고민과 준비가 없겠습니까? 그냥 가만히 지나가는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주의 사랑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밖에서 엘리트였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는 복음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내 의가 있으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감사합니다. 이것은 다른 감사가 아닌 구원의 감사합니다. 나 같은 것이 어쩌다가 이 십자가의 사랑을 받았을까요? 어쩌다가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예수님은 이 말도 안되는 사건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우리에게 이런 고백이 없다면 우리의 문제는 계속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속에 내 죄와 내 수치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달라질 것입니다.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당장 교회라는 것에는 행정이 있고, 모양을 만들어가야 하기에 부딪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뱃속까지 오신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죄 문제 저주 문제에서 해방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참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도 참으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_이사야5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