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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8-01-21 주일예배

2018-01-21 주일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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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나는 누구인가

본 문 :

마가복음 9:33-37

오승주 목사

. 너희가 서로 토론 한 것이 무엇이냐_마가복음9:33-34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_마가복음9:33-34’

 

예수님의 일행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이방 땅인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치셨습니다. 실제로 부활된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제자들과 잠깐의 시간을 보내신 후에,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메시아 되심을 밝히신 후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실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마태 다섯 제자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머문 곳은 베드로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버나움으로 오는 길에 제자들 중에 어떤 문제로 논쟁하였는지를 질문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잠잠하였습니다.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제자들 중에 누가 큰 지?’에 대해 논쟁을 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 후를 대비하고자 이를 논의하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의 신앙 상태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정도의 신앙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 땅에 건설된 정치적인 메시아 왕국에서 열 두 제자의 서열을 매기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자는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강력한 경쟁자는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직접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요구하였습니다.(마가복음10:37) 이를 마태는 이들이 그들의 어머니까지 동원하였음을 밝히며, 이를 두고 나머지 제자들이 두 형제에게 분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0:24)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의 특권을 주장하여 자신의 서열을 맨 위에 두고자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저 마다 마음속에 욕심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를 논쟁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아시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이 들통 난 것 같아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잠잠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인간적인 야심을 이내 영적인 것으로 포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 질문(마태복음18:1)을 하였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에 대해 완전 오해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산 위에서 천국을 보고서도, 산 아래에서 예수님이 하신 역사를 보고서도 제자들은 누가 큰가? 라는 논쟁을 하였습니다. 인간은 환경과 상황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육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토론 내용이 무엇인가요? 우리의 토론 내용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크게 되는 것인가요? 그것이 한국교회의 지난 수십 년간 토론 내용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늘 싸웠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논쟁을 합니다.

 

. 누가 크냐?

 

1.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_마가복음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_마가복음9:35’

 

예수님의 답이 무엇입니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답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늘 생각하던 것과 반대의 내용이 아닌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한 번도 크기로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우리에게 적용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엄청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도 커야 하고, 사역도 커야 한다고, 뭐든 커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렇게 키우려다 보면 늘 놓치는 것은 본질입니다. 우리는 늘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라도 되라고 가르치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끝이 되라니요? 제자들은 세상의 것을 천국에 적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가지고 천국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이루기 위해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끝이 되라고 합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몸소 실천하신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가장 낮은 자리인 사람의 끝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섬기는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세상은 실패했다고, 바보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도 다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십자가가 결국 다 살렸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천국으로 안내하는 승리의 길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품은 사람들은 전부 뭇 사람을 섬겼습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끝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뿐 만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면서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늘 누가 크냐의 논쟁에 빠져 살게 될 것입니다.

 

2.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_마가복음9:36-37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_마가복음9:36-37’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고 바로 어린아이를 하나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는 아직 교육을 받지 못한 아주 어린 아이(파이디온)를 말합니다. 유대사회에서 어린 아이는 여자보다 훨씬 뒤에 있는 서열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린이는 생산성이 없는 잉여자원으로 생각합니다. 복음을 알고 보니 어린이가 귀하지 사실 교회에서 어린이의 서열은 가장 마지막 아닌가요? 다시 말해 보호가 필요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런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말은 그의 발을 씻기고 음식을 대접한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문화적 배경으로 볼 때는 불가능한 모습입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고 계신가요? 우리는 높은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영접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꺼리는 사람, 미운 사람, 불편한 사람, 도움 되지 않는 사람은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놀라운 것은 뒤에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접하길 원합니다. 우리 예배 가운데 임재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오시길 기도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어린아이는 영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한다는 뜻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가능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가난하고 병든 잉여 자원 같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복음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3. 나는 누구인가?_창세기12:1-4, 창세기22:1-18

 

예수님은 누가 크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계속해서 살아가는데 헷갈립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복음을 받고서도 한참 동안 내가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꾸 성공하려고만 했습니다. 자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했습니다. 또 자리만 생각했습니다. 내 계획을 생각하고 자꾸 육신적인 능력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의 영향을 계속 받았습니다.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고난 속에서 결국 깨닫게 하셨는데 내가 누구인가?’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를 시작하시면서 아브람의 가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보여주시고자 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아브람을 처음 부르실 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고통 받는 땅에서 축복의 사람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_창세기12:1-4’

 

그러나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환경과 상황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었습니다. 왜 그렇죠? 말씀을 따라 갔지만 환경과 상황이 더 강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귀한 것은 그는 항상 예배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넘어져도, 잘되어도 그것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아브라함은 믿음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테스트를 받습니다. 100세에 낳은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번제는 태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는데 장작과 불, 그리고 칼은 준비하지만 정작 태워야 할 어린 양은 준비하지 않습니다. 이삭이 물어봅니다.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단다. 이삭도 대단합니다. 자기가 재물이란 것을 알았을 텐데 또 순종합니다. 장작을 준비하고 그 위에 이삭을 묶습니다. 불을 지피려고 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급하게 말립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_창세기22:12’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_창세기22:16-18’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언약 곧 구원의 언약을 이루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걸 믿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인생을 통해 그 믿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들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신 이유를 말입니다.

 

.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_창세기26:24-25, 28:18-22, 37:5-11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은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이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 불렀던 찬송의 저자인 크로스비는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고백은 전 세계의 영혼들을 살리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신앙고백은 우리를 치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안내하는 길이 됩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_창세기26:24-25’

 

이삭은 우물을 팔 때 마다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우물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면 다른 곳에 가서 파고 또 파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삭은 하나님을 만난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막을 쳤습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_창세기28:18-22’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평생 형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하실 일이 있으셨습니다. 야곱이 그토록 고생하다가 드디어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되는 구나! 그리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_창세기37:5-11’

 

아브라함의 가문이 어떻게 신앙고백을 했는지 보시길 바랍니다. 세상은 자꾸 우리를 속입니다. 누가 크냐? 그것은 가버나움이라는 대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논쟁입니다. 거기에 빠지면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신앙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사무엘은 언약궤 앞에서, 다윗은 목장에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요셉은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요셉이 붙잡은 믿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노예가 되어도 감옥에 가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안이숙 여사님을 아시는지요?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옥고를 치루셨습니다. 그의 책인 죽으면 죽으리라를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도록 부름 받은 존재들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야만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라야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누가 크냐에 빠져 있으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생이 이 땅에서 끝날 것입니다. 천국과 연결된 인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누가 크냐의 논쟁에 빠져있는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가치관인 누가 크냐에 빠져 있는 동안 복음의 본질을 놓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사람들이 볼 때는 볼품없고 미련한 일처럼 보였지만 결국 우리를 구원한 길이었고 살리는 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승리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우리도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기 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알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신 이유를 알길 원합니다. 사람들을 섬기고 어린 아이를 영접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들을 살리는 첫째되는 삶을 살길 원합니다. 천국과 연결된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시길 원합니다. 우리의 포럼이, 우리의 기도가 신앙고백이 되게 하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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