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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8-04-22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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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22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아는 것과 믿는 것

본 문 :

마가복음 12:28-37

오승주 목사

 

. 참된 자유가 없는 이유_마가복음12:38-40,고린도전서4:6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_마가복음12:38-40’

 

서기관들의 실제 모습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실제 모습을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는 직업으로 그들은 성경에 대해 가장 잘 알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들의 삶은 교만과 오만이 가득하여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기만 하였습니다. 서기관은 자신들이 얼마나 복된 자리에 있었는지, 얼마나 존귀한 직분을 가졌는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전 이 부분이 너무 이해가 되고 고민이 되고 기도가 됩니다. 목사라는 직분이 얼마나 축복 된가요? 장로라는 직분, 권사, 집사 그리고 성도라는 직분이 얼마나 존귀한 직분인가요? 그런데 무엇이 서기관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_고린도전서4:6’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이 서로 이간질하고 싸우는 이유를 교만한 마음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서에 쓰였던 교만이라는 단어는 다른 성경에서 쓰인 단어(휴브리스)와 다른 단어(푸시우)를 사용하였습니다. 바울만 쓴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바람을 일으켜 불을 지피는 풀무와 같은 단어입니다. 적정한 크기를 넘어 지나치게 부풀고 팽창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한껏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까지 이른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자아가 바로 이런 상태에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교만한 마음은 자존감이 매우 낮은 사람에게 생기는 마음입니다. 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으며,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삶의 의미를 삼을 만큼 중요한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환상이 바로 영적인 교만함입니다.

영적인 교만함을 가지면 몇 가지 특징이 생깁니다. 첫째, 매우 공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를 쓰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자기 자랑을 끊임없이 늘어놓습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상처를 잘 받습니다. 기분이 상했다고 자주 말합니다. 사실 기분이 상한 것이 아니라 자아가 상한 것입니다. 왜 그렇지요? 거절당한다거나 무시당한다는 느낌 없이, 주눅 들거나 스스로 바보 같다는 느낌 없이 하루를 지나가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아가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늘 분주합니다. 영적 교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분주한가요? 텅 빈 자아를 채우기 위해 자신에게 주의를 끄는 일로 분주합니다. 특히, 비교하고 자랑하는 일입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학원에 막 보내는 이유와 같습니다. 첼로도 배워야 하고, 태권도도 배워야 하고, 수영도 배워야 하고, 바이올린도 배워야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너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그 일이 보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다고 뽐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인상적인 이력서를 작성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즐겁지 않은 온갖 일들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분주합니다. 그러나 되는 일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약합니다. 영적인 교만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듭니다. 견고한 실체가 없어서 의기양양하게 보이지만 곧 의기소침해질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같은 것입니다. 공허하고 분주한 자아는 허약한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왜 그렇게 교만했는지 말입니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간증이 바로 고린도서입니다. 왜 참된 자유가 없습니까?

 

. 아는 것과 믿는 것

 

서기관의 신앙_마가복음12:28,32-33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_마가복음12:28’

 

서기관은 그런 신앙의 실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이 변론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대답을 잘하는 줄 알고 끼어들었습니다. 자신들이 성경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전문인들이었으니 당연하지요.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_마가복음12:32-33’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자신들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예수님과 수준 높은 대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 같지 않나요? 예수님과 대화가 되는 것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런 실체가 없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것 같게 보일뿐입니다. 그들의 삶은 전혀 하나님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거나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과부들의 돈을 취하거나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자리를 원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의 신앙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신앙을 주의해야 할까요? 실체가 없는 신앙을 주의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자연스럽게 올바른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켜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안다면 누구보다 깨어 있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그것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교만 때문입니다.

 

2.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_마가복음12:29-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_마가복음12:29-31’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의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십계명을 둘로 나누어 정리한 것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 영혼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핵심을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우리는 전혀 감흥이 없습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이 말씀이 거리가 있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셨음에도 오셨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믿고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육신에 빠져 살기 시작합니다. 거기에는 결코 열매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다 살고 하나님 앞에 갈 때 후회를 합니다. 사실 이미 늦은 것 아닌가요? 왜 그토록 말씀이 우리 마음과 삶에 담기지 않을까요?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지요?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사탄이 있다는 것도,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것도, 귀신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깜빡하고 살아갑니다. 분명 우리 배후에 사탄이 역사하고 세상의 정사와 권세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아버지를 그냥 미워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쉽게 패를 가르고 싸웁니다. 고린도교회처럼 말입니다. 쉽게 죄를 짓고 쉽게 말과 행동을 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정말 하나님을 유일하신 주로 믿느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될텐데 왜 그것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느냐? 정말 구원을 믿느냐 그렇다면 이웃을 향해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할 텐데 왜 그것과 상관없이 사느냐? 라고 서기관을 향해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3.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_마가복음12:34-37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성전에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샸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_마가복음12:34-37’

 

서기관들의 지식이 가득한 대답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이 말씀은 가까이 있으나 안에 들어오지는 못한 것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는 것으로 구원 받진 못합니다. 믿는 것으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서 다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삶이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홍수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들 들었습니다.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딱 한사람 노아만 믿었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산에다가 방주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떤 손가락질을 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것이 노아의 정체성입니다. 믿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인 것을 알았지만,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구원받은 것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 우리 믿음으로 살아요. _로마서8:1, 마가복음1:11, 요한복음5:24, 5:44, 14:26-27, 17:18-21, 18:36-37, 사도행전1:8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도록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실체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 마음이 답답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만큼 믿음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_로마서8:1’

 

믿음은 엄청난 참 자유를 선물로 줍니다. 자유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신에 대한 평가를 다른 사람이나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서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판결을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주님께서 최종적인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_마가복음1:11’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_요한복음5:24’

 

우리를 그리스도의 완전한 행위로 전가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받으셨기 때문에 나만의 이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정작 신경 써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미 복음을 받았는데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이미 주어진 축복에 대한 확신입니다. 무엇을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에 부활이후에 반드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리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_요한복음14:26-27’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_요한복음17:18-21’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공동체의 삶입니다. 그런 삶을 통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공동체의 삶은 곧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삶입니다. 영적인 삶은 그렇게 실체가 있는 삶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_요한복음18:36-37’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나라의 왕이다. 내 나라에 너희를 속하게 하기 위해 내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진리 곧 말씀에 속한 자가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산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증거가 무엇인가요? 곧 음성을 듣고 사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_사도행전1:8’

 

그래서 우리는 성령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교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아에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소리 지르고 기도할까요?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닐까요?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임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혼을 구원하려는 강렬한 마음이 온 삶을 사로잡게 됩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임한 사람은 자아가 건강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견고한 실체가 있는 삶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진짜 내 삶에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아침마다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밤마다 말씀을 묵상하게 만듭니다. 그 믿음이 감사를 만들어내고, 찬송을 부르게 합니다. 그 믿음이 성령을 의지하게 만들어 우리 삶의 진짜 정체성을 회복하게 만들어줍니다.

 

주님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길 원합니다.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여 이제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죄악들이 드러나며 우리의 연약함이 고백되며 우리의 그릇된 말과 행동이 발견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주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이 되게 하시며, 오직 주님만이 나의 산성, 나의 영광이 되어 세상에서 요동치 않게 하옵소서. 그 안에 말할 수 없는 행복과 위로, 놀라운 힘이 있음을 믿게 하시며 그것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어 내 삶 역시 살아있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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