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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4 주일 1부 예배

< 주일 1부 예배 >

일시:  2014년 5월 4일

제목 : 예수님에게 배우는 사명자의 자질

말씀 : 마태복음 3  : 13-17

설교 : 오승주 목사



2014-05-04 주일1부예배.hwp



아래 링크를 통해 음성 메시지를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db.tt/Y8xaguMt


아래 링크를 통해 영상으로 메시지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http://vimeo.com/93809827



가스펠교회 주일1부예배 20140504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오늘 예배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는 예배가 되기 바랍니다.

 

. 리더쉽 바이러스

 

5월이 되었습니다. 참 시간이 빠릅니다. 첫 예배를 드릴 때 세 가지 그릇에 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믿음의 그릇, 생각과 마음의 그릇 그리고 실력의 그릇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냥 교회를 세워 우리끼리의 잔치를 한다면 그런 말씀을 주실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이 있는 가정에서, 일터에서, 아픔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축복의 그릇으로, 사명자로, 성도다운 성도로, 도피성으로, 제자로 세워져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조금 더 멀리 볼 것이며 더 깊은 호흡을 할 것입니다. 저부터 잘못된 관습들이 있다면 말씀 앞에 내어놓고 고치려고 할 것이고 잘못된 신앙체질이 있다면 말씀 앞에 내어놓고 갱신하려고 할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져 가는데 한 가지 기준이 있다면 말씀입니다. 교회가 세워지는데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기준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갈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를 위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함께 응답받아 가야합니다. 내일 예배 처소 감사예배는 그런 의미에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 앞에서 행사가 아닌 우리의 영적인 상태와 우리의 가정, 일터, 현장을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얼마 전에 리더쉽 바이러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등의 리더들이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기업을 시작했는데 리더쉽 바이러스 때문에 리더쉽이 변질되었다고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그 바이러스를 퇴치하지 않으면 그 조직과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바이러스를 발견하면 즉시 치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이 깊어지고 자신뿐만 아니라 조직도 어려워 질 것입니다.

결국,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자기 의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 할 때는 . 헌신해야지, 하나님 앞에 서야지라고 하지만 나중에는 자기 의가 쌓여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하나님의 은혜, 첫 사랑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자신을 점검하고 갱신해야 하는데 세상이 기준이 되거나 자신의 의가 기준이 되면 곧 병들고 주변인까지 힘들게 하는 종교인이 되어버립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 앞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명자로 세상에서 살아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시작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준이고 축복입니다. 그 축복을 마태복음의 말씀을 통해 누리길 바랍니다.

 

. 사명자의 자질을 가로 막는 것들

 

하나님의 사명자로 살고자 하는데 사명자가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열등감입니다.

1. 열등감

 

한 잡지에서 자신의 외모에 대해 만족하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남자들은 28%, 여자들은 겨우 13%만이 만족한다고 했습니다. 불만족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질문했습니다. ‘그렇다면 외모를 바꿀 의향이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남자는 94% 여자는 99%가 바꿀 수 있다면 바꾸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 자기 존재에 대한 열등감이 얼마나 심하게 훼손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열등감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사단이 부정적인 자아상을 심어주면서 생긴 것입니다. 결국 열등감은 자기 학대를 낳고 나아가 자기 파괴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존귀하게 창조하셨는데 자기 몸을 함부로 해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에도 만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엘리트들이나 소외계층이나 똑같습니다.

시편 139편에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고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닙니다. 우리가 잉태되는 것에 하나님이 관여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창조가 신묘막측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놀라운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보며 감탄하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을 보고 감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아상을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맡겨서는 안 됩니다. 열등감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면서 아직도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면 구원의 확신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모두가 원빈이나 장동건, 송혜교나 손예진처럼 생겨서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대상입니다. 죄로 인해 일그러진 자아상을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자아상을 회복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열등감의 문제가 해결될 때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순종하는 것,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도 할 수 있습니다. 비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자신 있게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_마태복음3:13’ 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 엎드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부모, 배우자, 상사에게 엎드리는 것도 어렵고, 나보다 못한 사람 앞에 엎드리는 것은 더더욱 못할 일입니다. 내가 잘못을 했어도 잘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을 것처럼 힘든 순종을 할 때 그것이 공적 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주어진 관계와 질서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줄 때, 남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인정하고 지지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것을 안다고 해도 사과 한마디를 제대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머리라도 좋아서 지금 숙이고 들어가는 게 이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잘못했다고 해야지마음먹었다가도 자존심을 조금만 건드리면 그래 너 잘났다. 내가 이런 인간인데 어쩔래!’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그것이 열등감 때문입니다.

 

2. 비교의식

 

죄로 인해 부정적인 자아상에서 나온 또 한 가지가 비교의식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고 나를 향한 창조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자만하거나 비굴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가장 파괴하는 것 중 하나가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단순히 과학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을 경배하는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합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피조물의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그래서 잘생기고 대단한 사람들을 보면 그 능력과 외모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특별한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케네디가의 유명인 중 한 사람인 로버트 케네디의 인기가 한 창 높을 때 어떤 잡지에 그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웃옷을 벗고 몸매를 뽐내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은 몇 명입니까?’ ‘11명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두셨나요?’ ‘나같이 우수한 종자는 후손을 많이 퍼뜨려야 합니다.’ 그런 자랑을 한 케네디는 그 인터뷰 후에 유언한마디 못하고 비행기 사고로 죽게 되었습니다. 현대사회는 그렇게 인간을 하나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우수한 인재를 만들기 위해 노벨상 수상자의 정자를 뽑아서 IQ160 이상의 여자에게만 제공하는 정자은행을 1980년에 만들어 1999년도에 문을 닫았습니다. 19년 동안 217명의 천재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는 완전히 실패하였다고 결론이 나고 폐쇄되었습니다. 이유는 똑똑하게 태어나긴 했지만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라주지 않아 대부분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을 경배하고 하나님 없이 내가 잘나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절대 세워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진화론 사상이 세상과 우리 안에 팽배해 있기 때문에 비교의식을 갖게 됩니다. 비교의식은 실패의 감정을 낳고 자신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명 곧 복음을 전하는 일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세워줄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하기 힘들게 합니다. 이런 열등감과 비교의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 사명자의 자질을 갖추라

 

사명자로 살기위해서는 반드시 열등감과 비교의식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것은 예배를 회복함으로만 가능합니다. 단순히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가정과 가문, 일터, 나라와 시대는 어떨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몇 가지 자질을 배워야 합니다.

 

1. 참된 겸손

 

첫째는 참된 겸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참 재미있습니다. 사실 요한이 당황한 장면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 처지인데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시겠다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정했습니다. ‘예수님 도대체 왜 그러세요?’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이 겸손은 틀린 겸손입니다. 요한은 늘 청렴하게 살고 완벽한 성품과 완벽한 삶으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반대로 가장 큰 낮아짐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동물을 좋아한다고 해도 인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세례를 받으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주된 관심사인데 예수님은 가장 낮은 일부터 하심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낮아지시고 십자가 지실 것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일을 하시고자 하셨는데 요한이 자기 겸손으로 그 일을 말렸습니다. 우리는 보여주기식 겸손으로 주의 일을 망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같은 진짜 겸손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_마태복음3:15’

 

2. 오직 복음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의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 일, 즉 사단의 권세를 멸하고 죄와 저주와 지옥권세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수 천년동안 예언되어온 십자가 사건을 이루기 위한 일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시대의 세례자였던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간으로 낮아지심을 공포하셨으며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스스로 높아지고 남을 업신여기는 권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은혜를 받았을 뿐이지 남을 업신여기라고 주신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 의가 진짜 의입니다. 그런 의를 가진 자는 가장 낮아질 수도 있고 가장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세상의 기준으로 그것이 낮아 보일 수 있고 작아 보일 수 있으며 또한 비참해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셈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위해 사는 자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가족 중에서, 일터에서, 혹은 모든 만남 속에서 복음을 위해 섬기는 삶을 사는 자가 참된 사명자의 자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_마태복음3:16’

 

3. 순종과 섬김

 

오직 복음을 가지면 순종과 섬김이 자연스럽게 되어집니다. 저도 예전에 설거지를 시키면 하기 싫어 죽겠는데 해야 될 상황이면 요란하게 소리 내면서 했습니다. 그런 순종은 안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제가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진짜 순종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하는 작은 섬김들이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기업의 회장이 되면 변화시키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법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누룩과 겨자씨, 소금 같은 것이었으며,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에 감사하고 낮아진다면 놀라운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로마를 뒤집은 비밀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박해와 핍박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나고 밉고, 싫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해 저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제 의나 제 힘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시작한다면 그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리더쉽 바이러스가 무엇입니까? 섬김이 없이 다스리려고만 하기 때문에 리더의 자리에 가면 책임감과 압박을 느끼고 그런 것이 변질되어 내 맘대로 하려고 하는 권력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 비전이 야망으로 바뀌는 것이 리더쉽 바이러스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게 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 땅보다도 먼저 죽게 되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주장이 꼭 맞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틀린 주장을 맞는 주장이라고 착각했다면 깨닫고 실수라고 잘못했다고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상하게 하고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은 리더의 자질이 아닙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인으로 시인한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삶의 방향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영혼구원 한 가지 때문에 가장 낮은 곳까지 오셨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될 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순종하며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순종과 섬김은 성품이 아닌 복음을 깨달을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_마태복음3:16’

 

. 주님의 사명을 이루는 성도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_마태복음3:17’

 

주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예배를 통해, 말씀을 통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로, 사명자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는 위로입니다. 안전장치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의 기준입니다. 내 힘으로, 내 성품과 내 의로움으로 주님이 주신 사명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열등감과 비교의식으로 낙심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내 존재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바르게 알고 복음으로 자아상을 회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사명자로 내가 있는 곳에서 사역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무슨 사역입니까? 영혼구원의 사역입니다. 축구시합에서도 열심히 뛰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제도 우리 재준집사님 팀이 첫 승을 거뒀습니다. 그런데 한 명이 퇴장당해서 상대팀이 계속 슈팅을 했습니다. 현란한 개인기를 가지고 있어도 종횡무진 90분을 최고로 뛴다 할지라도 골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 게임은 진 게임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고, 운동을 하여 건강하고, 여행을 다니고, 사업을 잘하고, 남들이 보기에 화려하고 모두가 나를 부러워하여도 영혼구원의 골을 넣지 못한다면 그것은 처참한 실패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중요하게 평가될 것이 영혼 구원입니다. 여기에 방향을 맞추고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조금 비굴해진다 하여도 하나님의 상금과 셈하심이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이 구주시라_디모데전서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