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예배

2018-11-04 주일예배

 


2018-11-04 주일예배.hwp


음성 다운로드 https://bit.ly/2SJNple


가스펠워십 다운로드 https://bit.ly/2QdB6M5






20181104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본 문 :

창세기 3:15-24

오승주 목사

 

. 진정한 돕는 베필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되는 하나님의 생명력에 의해서만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에게는 그 생명력이 차단되었습니다. 이미 그들의 코에서 산소 호흡기가 떼어져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인생이 그토록 공허하고 고달프고 괴로운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 봐도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 봐도 이내 찾아오는 공허함이 바로 영원한 죽음의 냄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그렇게 수천 년 동안을 이리 도망 다니고 저리 도망 다니다 보니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도망쳐 온 사람인지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며 왜 이 땅을 이렇게 선택 없이 살아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의 기원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 연구를 해 왔지만 현대 철학의 결론은 한 마디로 '나는 모른다입니다. 조선 최고의 천재라고 하는 매월당 김시습의 시들을 읽어보면 참으로 처절합니다. 그의 시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미친 듯이 옛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도대체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왜 아무도 내게 대답해 주지 않는가?’ 결국 그는 방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그 해답을 얻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불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석가모니의 제자가 석가모니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이렇게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까?’ 그 때 석가모니가 제자에게 대답을 해 줍니다. ‘지금 너에게 중요한 것은 네가 독화살을 맞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화살을 맞은 자가 이 독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이며 내 몸에 퍼지고 있는 이 독의 성분이 무엇인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있느냐? 어떻게 하면 내 몸에 퍼져가고 있는 이 독의 위험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거라석가모니도 인생의 시작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인생의 종국은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목적은 수행과 참선과 득도를 통해서 인생의 백팔번뇌에서 빠져나가는 것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진정한 돕는 배필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은 남자, 즉 남편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영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도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남자이고 성도가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인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와 생명나무실과에 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자는 그 후에 생겨났고 아담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남자인 아담은 생명나무실과를 먹고 여자인 하와에게 그 생명의 씨를 전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실과를 먹고 영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여자는 다소곳이 남자의 도움을 청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자인 아담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스스로 생명나무실과를 따먹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결론이 나옵니까? 남자든 여자든 모든 인간은 진정한 남자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여자의 자리에서 다소곳이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는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서 그렇게 되면 자신이 정말 남자를 도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실수를 저질렀고 남자 또한 하나님 절대 하위의 자신의 신분을 잊고 여자의 미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절대 스스로를 도와 영화로운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이 땅에서 남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인간들은 남자의 도움을 기다리는 여자로 이 역사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난 당신의 도움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수가 없다는 온전한 고백을 하게 될 때 진짜 신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치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여자 혹은 신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남자라는 역할을 주시면서 너희가 정말 여자를 이끌고 도와서 영생에 도달 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확인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인간들에게 맡김으로 모든 인간은 불가능하고 절대 의존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 구원의 여정

 

1. 남자와 여자_창세기3:16-21, 고린도후서11:2, 요한계시록21:2,9, 갈라디아서2:20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_창세기3:16’

이 역사 속의 남자들은 그들 안에 생명의 씨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의 씨를 여자에게 주어서 여자가 생명을 잉태하게 되는 그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실과를 따먹고 여자에게 그 씨(하나님의 생명)를 주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 아담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렸을 때 아담은 여자에게 생명의 씨를 전해주기는커녕 함께 죽음 속으로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 말은 모든 인간 중에 누구도 다른 이에게 생명의 씨를 전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남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씨를 받아야 하는 여자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인간들은 남자를 기다려야 하는 여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신 하나님은 남편을 기다리는 열 처녀를 모두 신부로 맞으시지 않고 그 중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남편이 보이지 않아도 남편이 온 것처럼 믿음을 갖고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을 신부로 맞으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도 남편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남편이 주시는 믿음을 소유한 진짜 신부들은 이 땅에서 남편이 오신 것처럼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적으로 성도들을 남편을 기다리는 신부로 표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_고린도후서1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_요한계시록21:2’

 

그렇게 해서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생명의 씨를 받은 신부는 비로소 생명의 씨를 소유하고 그 생명의 씨를 다른 이에게 전해줄 수 있는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신부라고도 표기하지만 아들이라고도 표기를 하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_로마서8:14’

 

이렇게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의 씨를 받아먹고 살아야 하는 신부로 서는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생명의 씨를 소유한,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주는 아들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여성명사인 것이고 아울러 그 여자인 교회를 아들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 성도들의 실존은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력을 받아서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신부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을 아직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나머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하는 아들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의 씨를 받은 성도들은 이제 그 씨가 온전한 생명으로 잘 자라나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애를 쓰게 됩니다. 마치 밭에 씨가 뿌려지게 되면 그 밭이 자신의 모든 영양분을 동원해서 그 씨가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돕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생명을 잉태하게 되면 모든 영양분이 그 여자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에게 흐르는 것처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를 받은 성도는 그의 옛 사람을 죽여 그 안에 뿌려진 생명의 씨가 온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옛 사람을 죽여 새 사람을 입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의 씨를 받으면 여자의 모든 생체 리듬은 그 안에 잉태된 아이에게로 맞추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가 원하는 음식을 자기도 원하게 됩니다. 그 것을 입덧이라 하는 것입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여자는 이제 아이가 찾는 것을 자신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여자 안에 잉태된 새 생명인 아이가 여자를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새 생명인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조종 받게 됩니다. 여자의 주인이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것을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신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_갈라디아서2:20’

이렇게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가게 되는 것을 우리가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그러한 변화를 성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잉태한 여자는 모든 것을 아이에게 맞추게 되고 아이에게 조종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치관의 변화요 세계관의 변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렇게 자신안에 들어 온 새 생명에 의해 가치관과 세계관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2. 남자답게 강건하라_디모데전서2:15,고린도전서16:13-14

 

예전에는 남을 밟아서 나의 유익을 챙기고 어떻게 해서든 성공해서 남들보다 높은 곳에 오르려는 삶을 살았었는데 이제는 자신을 비워 남의 유익을 구하고, 낮아지고, 겸손하고, 섬기는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속에 있는 새 생명이신 예수에 의해 그의 삶이 주관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경은 겉 사람이 후패해지고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삶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겉 사람이 후패해지고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현상은 결국 씨가(예수의 생명) 여자(옛 사람)를 잡아먹고 결국 하나님의 아들들이 탄생하게 되는 성도의 신앙 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잉태한 여인이 열 달 동안 뱃속의 아이에게 모든 영양분을 다 빼앗기고 열 달 후에 아이를 출산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씨가 여자를 잡아먹고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해산의 고통이라는 것이 반드시 따라오게 됩니다. 옛 사람인 여자는 원래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만 존재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 온 새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만을 위해 살던 옛 사람 여자의 삶을 주장하기 시작하십니다. 여자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거룩과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던 옛 사람 여자가 이제 사랑하고 용서하며 인내하고 온유한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상은 여전히 자신들만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러한 옛 삶에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어찌 쉬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삶을 고난, 고통, 환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고 심지어 그러한 성도의 신앙 여정을 해산의 고통이라고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_디모데전서2:15’

 

성도인 여자들은 정절을 지키고 믿음을 발휘하며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게 됩니다. 그게 성도가 신앙생활을 통해 배우고 구현해 내야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마치 해산하는 것처럼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여자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받은 성도는 그 속에 잉태된 생명의 씨에 의해 반드시 그러한 해산의 고통을 방불 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처럼 여자의 삶에서 아들이신 예수의 삶으로 바뀌어 가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력을 공급받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이며 그 분이 나의 주장과 나의 소원과 욕심을 꺾으시고 나에게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나오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나의 안에 풍성히 자리 잡을수록 옛 사람 여자가 그만큼 더 많이 죽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성도들은 더욱 더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남자의 삶으로 바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남자답게 강건 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_고린도전서16:13-14’

교회야, 성도들아 어서 어서 여자인 옛 사람의 삶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남자다움을 발휘하라 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는 자꾸 아들의 삶, 남자의 삶 속으로 성숙되어져 가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산의 고통을 통과하며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과 내 이웃을 위해 낮아질 수 있는 자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진짜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생명나무의 길_창세기3:24,요한복음14:3-6,마가복음15:37-38,히브리서10:19-20,미가2:13

 

하나님께서 하와를 저주하시면서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더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여자들이 해산하는 고통을 통해서 생명의 존귀함을 알게 되듯이 여자인 성도들이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입는 생명의 여정 속에서 해산의 고통을 느끼며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하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하시겠다는 회복의 메시지가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 속에 해산의 고통과 같은 고난이 없으면 그건 뭔가 이상한 것입니다. 여자들이 아이를 낳으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지요? 우리는 그 비명을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제 절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지 않겠습니다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회복의 메시지는 계속해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는 장면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분명 여인의 후손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들을 쫓아내실까요? 거기에 하나님의 회복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내어 쫓고 그 생명나무실과로 가는 길을 불 칼과 그룹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십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_창세기3:24’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게 되면 영생을 하게 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실과는 모든 인간들을 영생과 영벌로 나누는 예수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무죄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왕 노릇하며 영원하고 영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자가 생명나무실과를 먹게 되면 죄의 결과인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는 상태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지옥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굳이 그들을 그 곳에서 쫓아내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무리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어 보냈다. 쫓아내셨다라고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강제로 쫓아내셨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나무실과를 없애 버리지도 않으시고 그 나무로 향하는 길도 없애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단지 그 길에 불 칼과 그룹들을 두셨습니다. 그 것은 누군가는 반드시 그 길을 통과해서 생명나무실과로 가게 될 것임을 암시해 주고 계십니다. 그룹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은 그 길이 열려있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_요한복음14:3-6’

 

주님은 당신이 생명이시고 당신이 그 생명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들로 막혀진 생명나무의 그림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리게 될 생명의 길에 관한 은혜의 복음을 미리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삶을 몽땅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그 분이 품으신 모든 죄인들을 거룩한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 그룹들을 통과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휘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찢겨짐으로 그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룹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위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_히브리서10:19-25’

 

그렇게 생명나무실과로 가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열리게 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을 믿는 자들만이 그 열린 길을 통과해서 생명나무실과를 따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여시는 분이 먼저 그 길을 앞서 올라가고 하나님께서 먼저 선두로 행하실 것이라 예언을 한 것입니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가시리라_미가2:13’

 

. 은혜가 회복된 삶_창세기3:24, 11:2, 13:11, 3:5, 22, 요한복음5:39, 히브리서10:19-2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_창세기3: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_창세기3:22’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의지해서는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생명나무실과를 먹고 아들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채워지게 될 때 그 아들의 생명의 씨가 우리 옛 사람을 먹고 우리가 하나님 같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 같이는 저주받을 자들의 외식으로서의 하나님 같이가 되는 것이고 성경은 그 것을 가리켜 자기 의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 같이 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채워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고 하나님 같이로 변화하게 될까요? 말씀과 기도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은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_요한복음5:39’

 

성경은 모두 예수에 대해 증거 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채우는 길은 그 예수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절대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채워질 때 우리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이렇게 말씀을 공부하는 데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하나님 같이외식과 만용이 되는 것이고 축복의 땅도 저주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저주의 땅에서 다시 불러들이십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 저주의 땅에서 다시 축복의 땅으로 쫓아내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쫓아내다라는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하나님의 백성들만 예수 안으로 들어가 그 예수가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셔서 그들의 부끄러움을 무죄한 짐승의 가죽으로 가려 주신 날을 심판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모든 인간들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 심판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입니다. 바로 그 은혜의 십자가 이야기가 창세기 3장의 대주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심판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못 배웠어도 조금 가난해도 조금 못 생겼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심판의 자리를 벗어난 그 사실이 우리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만드는 것이고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고 기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은 자들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무시할 수 없고, 정죄할 수 없으며, 용서하지 못할 것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위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_히브리서10:19-25’

여러분도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 어디로 건짐을 받은 것인지를 수시로 확인하시고 세상이 여러 가지 문제로 여러분을 낙담시키려 할 때 세상을 비웃어 줄 수 있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곤란케 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주일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11-11 주일예배  (0) 2018.11.11
2018-11-04 주일예배 (전체영상)  (0) 2018.11.04
2018-10-28 주일예배 (전체영상)  (0) 2018.10.28
2018-10-28 주일예배  (0) 2018.10.28
2018-10-21 주일예배  (0) 2018.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