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2014-06-01 주일 1부 예배

< 주일 1부 예배 >

일시:  2014년 6월 1일

제목 : 하나님의 위로로 살아가는 성도

말씀 : 마태복음 5  : 4

설교 : 오승주 목사


2014-06-01 주일1부예배.hwp




아래 링크를 통해 음성메시지 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https://db.tt/ipIF96wg


아래 링크를 통해 영상으로 메시지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http://vimeo.com/97023155



가스펠교회 주일1부예배 20140601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 눈물이 사라진 시대

 

답답하고, 짓눌리고, 쫓기는 분위기속에서 하루하루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잠시나마 숨을 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웃음거리를 찾아 헤매는 듯합니다. 크게 한번 웃으면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버리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이면 그저 웃기 위해 이런 저런 농담을 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입니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웃음은 더 없이 좋은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인들이 지나칠 정도로 심각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더욱이 눈물, 애통과 같은 말은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단 눈물, 애통과 같은 단어가 주는 무게감 때문에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많은 역설이 있지만 이 구절이야말로 가장 역설적인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 안에는 눈물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홉 가지 정도 있는데 그중에 예수님이 직접 사용하신 애통이란 단어는 강도나 농도에 있어 최상급에 속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앞에 두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 애통입니다. 가족들의 죽음 앞에 가슴으로 우는 모습이 애통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그런 사건이 평생 몇 번밖에 오지 않는데 예수님께서 매일 애통하며 살라고 하신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을 매일 잃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통하는 영혼의 탄식을 애통으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심령을 비웠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는 애통이 따라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반세기 전 만해도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한 마디로 애통하는 공동체였습니다. 너무 가난하고 전쟁으로 상처만 남은 그때에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예배당에만 모이면 울었습니다. 자기 죄를 놓고 통곡하고, 예수 믿는 않는 식구들을 위해 통곡하고, 나라의 죄를 짊어지고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회에 다녀오면 눈이 붓도록 울었습니다. 마룻바닥에 눈물이 고일만큼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린 선조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 위로를 통해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위로를 맛보기 위해 더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위로가 대한민국에 임하고 그들의 가족들에게 임했습니다.

물론 우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마른 눈을 가진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보다 젖은 눈을 가진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때의 교회에 비해서 애통하는 눈물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눈물이 메말라 버린 것 같습니다. 웃음이 복음으로 들리고, 웃기는 설교가 복음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요즘은 목회자들을 위한 유머설교 세미나 같은 것들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웃으면 분위기가 좋아질 것입니다. 실컷 웃고 나면 스트레스도 사라질 것입니다. 웃는 것보다 우는 것을 좋아하면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는 눈물이 메말랐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외면해버립니다. 내 인생에 심각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덮어버리려 합니다. 그렇게 웃고 떠드는 것은 우리의 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울고 싶지만 누구 앞에서 어떻게 울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울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_19:12’

 

. 네 눈물을 보았노라_이사야38:5

 

왜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이사야 38:5에 보니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눈물을 보았다고 하십니다. 무슨 눈물일까요?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울어야 할까요?

 

1. 나를 위한 눈물

 

자기 죄를 놓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애통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무슨 눈물을 흘려야 하냐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언적인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보시고 무조건 죄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지 실제로 나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의 작업장에서 부패한 몸을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 열 번 아니 백번도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의 유혹이 쉴 새 없이 파고드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신은 성령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죄도 없고 회개할 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애통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죄의 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죄를 다 용서하셨으므로 웃으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단호하게 말씀하고 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_요한일서1:8’

 

우리 모두는 울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애통하는 것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보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이 시대에 성도들은 회개기도라면서 몇 마디의 말로 때우고는 자기 죄가 다 용서받은 것처럼 다닙니다. 가슴에 진정으로 회개하는 심령이 자리 잡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보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나는 저 사람보다 깨끗하게 살아.’라고 하고 있습니까? 완전 틀린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가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자신의 추악함을 늘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심령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애통할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몰라서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가까지 모시고 살며 내 모습을 늘 말씀 앞에 정돈하기 때문에 애통하고 눈물 흘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_시편51:17’

 

하나님은 상한 심령으로 나오는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애통은 상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통회하고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눈물을 하나님이 위로해 주셔서 평안과 기쁨, 만족의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위로입니다. 이것이 없으니 교회를 다니면서 늘 불안합니다. 자리 때문에 불안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서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늘 비교하고, 늘 평가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이 주님의 위로 속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위로 속에 있으면 남과 비교하지 않게 됩니다. 평가하지 않게 됩니다. 마음에 평안이 넘치게 됩니다.

 

2. 세상을 위한 눈물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위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며칠 전에 예루살렘 성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감람산에 앉으셨습니다. 한참동안 성을 내려다보시는 주님의 얼굴위로 굵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몇 번 우셨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때 흘리신 눈물은 애통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성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튼튼한 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어두움의 권세가 뒤덮고 있는 악한 성이 되었습니다. 40년 후에 그 성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아시고 흘리신 눈물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에 보면 주후 70년 로마 티토황제의 예루살렘 포위와 함락은 처참했습니다. 교만이 하늘을 찔러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예루살렘 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포위로 인해 먹을 것이 없어 아이들을 몰래 잡아먹을 정도였습니다. 함락된 후에는 로마 군인들이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갈라 죽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고 모든 성곽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아있지 아니할 정도로 무너져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아시고 애통의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바울 역시 애통해 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_빌립보서 3:18’

 

세상에 좋은 것이 너무 많아 복음이 필요 없다고 하는 세상을 보며 가슴이 아파 바울이 눈물 흘리며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그 어느 시대보다 악하고 더럽고 음란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세상에 보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세상을 위한 성도의 눈물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눈물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3. 이 땅을 위한 눈물

 

선진국에서도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면 잘 마시지 않는 최고급 양주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가 어딘 줄 아십니까? 50%가 넘는다고 합니다. 술 먹는 것이 죄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주가 투표하는 날인데 사실 누굴 투표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투표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차선책이라도 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정치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양심은 없어지고 돈 벌기에 급급하여 온갖 타락문화를 만들어내는 어른들 앞에 우리 아이들은 과연 누구를 존경하고 자랄까요? 이 땅에 하나님의 위로가 사라졌습니다.

이 땅에 소망이 있다면 이 나라의 죄를 나의 죄처럼 여기고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있다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문제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울지 않고 너무나 뻔뻔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주시려는 위로의 복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후대는 저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누가 본다고 하는 척, 있는 척, 되는 척하는 성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해 이 땅을 두고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가정이 살고, 우리 자녀가 살며, 이 나라가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여 주님을 온전히 모시고 살아가며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여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에 천국이 임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흘러넘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이 땅의 죄를 덮어줄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임입니다. 그 사랑으로 이 땅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진정한 애통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_베드로전서4:7-8’

 

. 하나님의 위로로 살아가는 성도

 

성경 속에서, 혹은 시대 속에서 찾지 않아도 가까이에서만 찾아도 되는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에 양화진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은 선교사님들의 무덤입니다. 그곳에 묻혀있는 분들 가운데 무어(S.F.Moore)선교사님이 있습니다. 1892, 32세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은 무어 선교사는 현재의 명동 롯데호텔자리인 곤당골에 새문안교회에 이어 두 번째 장로교회인 곤당골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예수학당을 열어 조선인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학당의 학생들 가운데 봉주리라 불리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은 백정 박 씨의 아들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고 이름도 없던 백정이었습니다. 어느 날 봉주리로부터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무어선교사는 백정 박씨를 문병하였고 그 때 의사였던 에비슨선교사를 데리고 가서 백정 박씨를 치료하게 했습니다. 후에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한 에비슨 선교사는 당시 고종황제의 주치의였습니다. 선교사가 수차례 치료한 끝에 백정 박씨는 깨끗하게 완쾌되었고 사람들이 인간취급 조차 안하는 자신을 무어선교사와 왕의 주치의가 관심을 가지고 치료해준 것에 감격해서 곤당골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무어선교사는 환대하면서 박성춘이란 이름까지 지어주고 세례를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인 박성춘으로 인해 곤당골교회에 난리가 났습니다. 양반교인들이 백정과는 함께 예배드릴 수가 없다며 무어 선교사에게 백정을 내보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무어선교사는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만류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양반 교인 대표가 무어선교사를 찾아와 자신들의 자리는 예배당 맨 앞쪽으로 별도로 마련해주고 백정은 뒤로 앉게 하면 교회에 나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어선교사님은 교회에서 그런 차별은 있을 수 없다면 거절하였습니다.

양반들이 모두 곤당골교회를 나가 양반을 위한 홍문동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일로 가장 난처한 사람이 백정 박성춘이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었고 성도들이 전부 나가버렸기 때문입니다. 박성춘은 그 때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기도하고 자신과 같은 백정들을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수원까지 내려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어선교사님입니다. 저 같으면 양반들이 교회를 떠날 때 본국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과 함께 양반들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정말 애통해 한 것입니다. 결국 홍문동교회의 양반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무어선교사에게 되돌아왔습니다. 결국,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양반과 백정이 함께 장로가 되어 보편적인 교회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백정이라는 신분이 해방을 받고 대한민국은 큰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는 복음을 전하던 무어선교사님은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 46세의 나이로 숨지고 선교지인 대한민국 땅에 묻혔습니다.

이번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란다고 생각합니다. 햇빛만 계속해서 쏟아지면 중동처럼 사막만 남을 것입니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비가 쏟아 질 때 생명의 환희가 일어납니다. 인생의 진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 바람이 몰아칠 때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눈물이 없는 인생도 사막과 같을 것입니다.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데 그 복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사랑하는 가스펠 성도여러분, 우리가 누구 앞에서 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이니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이 눈물로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로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이 애통한다면 우리 가족, 이 땅,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정죄는 사람을 당장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눈물에는 영원한 위로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_로마서7:24’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_고린도후서4:16’

 

그 대단한 사람이 날마다 이 고백을 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애통이 시대를 바꾼 것처럼 가스펠 교회 안에 애통이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과 교회, 우리가 가슴에 담은 그 현장에 넘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