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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4 주일2부예배

< 주일 2부 예배 >

일시:  2014년 8월 24일

제목 :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신앙생활

말씀 : 사도행전 13:44-52

설교 : 오승주 목사



2014-08-24 주일2부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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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다시보기 http://vimeo.com/104216066




가스펠교회 주일2부예배 20140824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 교회의 정체성

 

여러분은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부산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동기들이 80명 정도였습니다. 그 중에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목회자들이 나와서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오늘날 교회는 이 정체성에 관해 아주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거짓으로 얼룩졌다는 말, 또 세속화되었다는 말은 겉모양의 문제가 아닌 이 정체성이 흐트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는 것은 성경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요약한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모토입니다. 이 중에서 첫 번째 모토인, ‘오직 성경은 나머지 모토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종교개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 오직 은혜로 구원받고, 따라서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진리를 바로 성경 안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직 성경의 주된 점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약속이 성경 안에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통해 성령은 우리의 사고와 삶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시작합니다. 나아가 오직 성경이라 함은 하나님 말씀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점차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은 우리 사회에서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세속화라 합니다. 세속화된 사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적으로는 유익할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부적합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말씀이 중요하다고 의지하는데 사회적으로는 말씀이 부적합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면 전부 개인의 판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점차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주변 세상만큼이나 세속화된 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세상의 목소리보다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의 완전성은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충분성 앞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 수 있을까?’라고 합니다. 누가 그럽니까? 교회, 그리스도인이 그렇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_요한복음1:1-4’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붙잡는 자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을 내던진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개혁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동기부여는 되고 자선사업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해답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축복, 답은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어.’라고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고 잘 사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니 성경을 내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일어난 역사는 그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어그러진 세대에서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있습니다.

. 생명의 말씀을 가진 그리스도인

 

그런 말씀을 기준삼아, 아니 생명삼아 그 험한 산맥을 넘고, 질병을 넘고, 모진 환경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에 갔으니 그곳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소망하고 바라는 바울의 믿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너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발전된 세상에서 이 오래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자가 없다고 생각 합니다. 뛰어난 문화시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부끄럽다 생각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_사도행전13:44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자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최첨단이 될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갈급해 질 것입니다. 처음 생명의 말씀을 전한 이후 다음 모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온 시민이 거의 다 모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비시디아 안디옥에 유대인들이 매일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읽었는데 왜 그들은 말씀에 갈급해 있었을까요?

그것은 사도바울이 가진 말씀은 같은 말씀이 아닌 생명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전달했겠습니까? 그가 그 말씀을 방해하였던 사람이었고, 또 그 말씀이 각인되어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는데 13년이나 걸렸으며, 그것 때문에 모든 세상적인 명예와 부를 포기하고 험한 산맥을 넘어 전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다 가진 것 같으나,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 같으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2. 유대인인의 방해와 저주_사도행전13:45-46

그런데 누가 방해합니까? 유대인이 방해합니다. 당연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인 것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같이 기뻐해주고, 신나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 교회 아니라고, 우리 교단아니라고, 내가 전도 안하고 다른 전도했다고 방해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 교회의 수준입니다.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왔음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순한 동기로 살아가는 종교인들은 그것을 싫어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마음이라면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그런 모습을 저주해버립니다. 바울이 보기에 우스운 것입니다. 얼마나 웃기면 원래 이 복음은 너희에게 전해주러 온거다. 그런데 너희가 받지 않았는데 이리 나오냐? 그럼 이방인에게 전해주겠다.’ 이런 것입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방해를 하거나, 비방한다고 우리가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바른 교회가 되고,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어 바른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계속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3. 믿기로 작정된 자_사도행전13:47-48

 

그런데 반드시 믿기로 작정된 자가 있습니다. 아마 바울은 그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방인 중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긴 여행을 하게 하신 이유이자 섭리입니다. 타우르스 산맥을 넘게 하시고, 질병으로 이유를 만들어주신 인도하심입니다. 우리는 낙심하거나, 흥분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신앙생활하면서 당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변화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있습니다. 그 섭리하심의 끝에 있는 것이 믿기로 작정된 자입니다. 그곳에 생명을 살려야할 예비 된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기로 작정된 자를 보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그런 자들을 만나는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며 복음전하는 신앙생활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신앙생활

 

그런 비밀을 가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쫓겨났는데 말입니다. 결국 쫓겨나서 이고니온으로 가면서 발에서 티끌을 떨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곳에 제자를 심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제자입니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제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내고서 떠난 이후 비시디아 안디옥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곳에 생명의 말씀이 심겨 결국 교회가 세워집니다. 저주와 재앙이 떠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많은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무리 막아도, 아무리 방해해도 생명의 말씀은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신앙생활은 소유가 아닌 버림_사도행전13:50-51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떠나는 모습에서 신앙생활은 소유가 아닌 버림임을 보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곳에서 충분히 자신들의 권리와 부당함을 반박할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었을 텐데 쫓아내니 그냥 이유 없이 갔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곳을, 혹은 그곳에서의 역사를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전해 변화된 사람이 있다면 귀하지만, 내 것은 아닙니다. 개척멤버가 교회를 세워 귀하지만, 내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소유개념을 가지기 시작하면 반드시 타락하게 됩니다. 그것이 중세교회였습니다. 그것이 현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이라 생각하는 순간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백성을 내 성도, 내 소유라 생각합니다. 기쁨과 성령충만이 목적이 아니고 자꾸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미련이 남고, 미련이 생기니 욕심과 원망, 더 나아가 맹세와 복수심까지 생겨납니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은 새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저 또한 이 부분에서 많이 속기도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노력, 내 의를 기억하려 합니다. 주님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저는 단순히 목사이상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영적인 지도자이며, 주님의 종으로 이 복음을 이 세대에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제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갱신하고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기쁨과 성령충만의 비밀이 날마다 있어야 합니다. 그 이외 사람이라든지, 단체라든지, 조직과 같은 다른 것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주님이 창조주이십니다. 우리가 버릴 때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계속해서 버리고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2. 신앙생활은 주님의 청사진 속에 살아가는 것_사도행전13:51

신앙생활은 주님의 청사진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 사람을 이고니온으로 인도하십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을 가진 두 사람을 향한 모든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인도함을 받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며, 나누는 삶이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할 인도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청사진이 구원받은 모든 자녀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총론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청사진을 찾고 인도받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역시 말씀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 말은 미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광주에서 부교역자생활을 12년 가까이 했습니다. 사실 떠날 때 아쉬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인정도 받고, 자리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떠나려 하니 아까운 것입니다. 복음의 씨앗을 뿌려놓아 자라고 있는 제자들도 있었고, 시스템을 만들어 세워진 현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것이 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결단할 때 말씀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 말씀이 시대를 향한 축복의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제 힘과 경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교회와 역사를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련을 확 사라졌습니다. 전혀 아깝지도 아쉽지도 않습니다.

 

3. 나의 기쁨은 무엇인가?

 

바울과 바나바가 떠난 이후 비시니아에 남은 제자들에게 탄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오늘 이 질문으로 강단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진짜 기쁨은 무엇입니까? 요즘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인간의 말과 소리로만 요란한, 즉 속 빈 깡통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니 더 시끄럽습니다. 그러니 더 포장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대학생 때 머리를 물들이고 청바지에 주름을 잡아 입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력이 없으면 그렇습니다. 실력이 있으면 힘이 있고, 조용합니다. 삶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누리는 사람은 불평과 원망이 없습니다. 환경 탓, 상황 탓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새 인생이 되었는데 감사하기에도 모자란 인생입니다.

왜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이럴까? 교회가 왜 이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기쁨, 주님의 말씀으로 내 영혼이 변화되는 기쁨을 매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묵상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냥 시간을 때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영혼이 소성케 되는 시간을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누고 전하시기 바랍니다. 해야 나눌 수 있습니다. 해야 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알고 그 먼 거리를 간 것입니다. 그 기쁨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니 유대인들의 방해가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그것을 모르면 자꾸 되는 척, 하는 척, 있는 척 해야 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잘 되지 않을 때는 이야기하고 서로 기도하면 됩니다.

사도바울이 평생 인도받은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_마태복음28:18-20’

 

주님 우리가 주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완전하며, 충분하며, 지금도 내게 생명을 주고, 이 세상을 살릴 정확무오한 말씀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 말씀으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해주세요. 세상의 것은 잠시 쾌락을 주지만,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기쁨임을, 세상의 것은 잠시 잠깐이지만 성령의 충만은 영원한 축복임을 알아 우리의 신앙생활이 세상의 빛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