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9일 1,2부 예배
본문: 출애굽기 5:1-23
제목: [모세 5] I Can't
찬송: 337(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1. 제사(예배)를 드리러 간다고?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지시로 어떻게 보면 순진하게 바로에게 가서 곧바로 말씀을 전합니다. 과연 이들은 정말 하나님의 사랑하고, 하나님의 온전히 섬기는 믿음으로 바로에게 갔을까요?
그들은 바로를 만납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요. 사흘길쯤 가서 하나님께 예배할 것인데 허락해주세요.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실은 바로 왕에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부탁하는 현실입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_출애굽기 5:1’
아마도 우리 모두가 이런 현실을 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회사에, 자녀들에, 경제에, 은밀한 죄에, 혹은 취미생활에 예배 드리도록 부탁해야 하는 현실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스스로 예배할 수 없는 완전한 애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담장 넘어 뻗은 나무로 인해 얼마나 고센땅에서 신나고 즐겁게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왜 이들은 애굽의 노예가 되었을 까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_출애굽기 5:2’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주소입니다. 400년을 함께 지냈는데,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아니 사흘만 시간을 달라, 예배하고 오겠다고 통사정을 해야하는 현실입니다. 제가 느낄때 성경을 통틀어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기력하고 비참할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때 보십시요. 3절 하반절에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러니까 모세와 아론의 입장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말인가요?
2.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바로 왕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 바로 왕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최고의 문명이었고, 따라 올 수 없는 압도적인 나라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해도 비교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바로 왕은 당연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대했습니다. 바로 왕의 이면에 가지고 있는 탐욕과 교만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바로 왕은 히브리 노동자들이 사흘동안 자리를 비우면 얼마나 큰 경제적 손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무려 60만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우면 당장 건설해야 할 제국이 올 스탑될 수 있고, 또 애굽 사람들이 그 대신해서 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크나큰 손실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_출애굽기 5:3a’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_출애굽기 5:4’
그래서 바로 왕은 생각할 가치도 없었습니다. 두 노인이 와서 하는 말이 별 볼일 없게 생각했고,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사실, 모세와 아론은 그렇게 생각해도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했다는 것은 바로 왕의 큰 실수가 분명합니다. 바로 왕의 대답은 어쩌면 가장 합리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간다고 하는 것도 게을러서 그런 것이다 라고 합니다. 너희가 지금 제대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나 하러 간다고 말하느냐! 이거죠. 세상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스라이팅을 하고, 올무에 묶어버립니다. 돈 더 벌어야 하고, 더 공부해야하고, 더 행복한 삶을 위해 취미생활해야 하고, 더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 성공할 수 있는데...예배라니!!! 그깟 예배 드리면 떡이 나와 돈이 나와! 이런 말을 바로 왕이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동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겨우 먹고 사는 것 정도입니다. 광야에서 이 먹고 사는 것을 그리워했잖아요. 구원보다 천국보다 노예로 평생 살면서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완전한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_출애굽기 5:8b-9’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정신적, 육체적, 문화적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바로 왕은 그들에게 소리를 질러서 예배하러 가지 못하도록 노동을 더 무겁게 합니다. 원래는 짚을 주고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제는 짚도 주지 않습니다. 짚을 구해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양의 벽돌을 만들어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_출애굽기 5:15’
너무 힘들잖아요. 더 바빠지고, 더 분주해지고, 더 힘들어집니다. 예배 드리러 간다고 말을 했을 뿐인데 아니 그것도 자기들이 말한 것이 아니고 모세와 아론이 와서 말했을 뿐인데, 자기들의 삶의 패턴이 무너지니까 바로 왕에게 찾아갑니다. 아니 하나님께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왕에게 찾아가 부탁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보십시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찾아가서 도움을 구합니다. 어찌된 일인가요? 바로 왕에게 ‘한번만 봐주세요. 다시는 예배 드리러 간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_출애굽기 5:20-21’
심지어 바로 왕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모세와 아론을 만나는데, 그들을 저주합니다. 심지어 여호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이제 상관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들 삶의 편리함을 위해 사용하는 수준입니다.
“당신들 때문에 바로 왕에게 우리가 죽게 생겼소! 그러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재앙을 내려주길 원하오”
사랑하는 가스펠 성도 여러분! 이게 신앙생활이라면 우리는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애굽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있는 백성의 삶이 아니라 바로 왕이 여호와는 도대체 누구냐! 할 정도의 완전하게 실패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이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예배가 있었을까요? 그들에게 기도가 있었을까요?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었을까요? 우리는 내일 네팔과 인도에 비브릿지 대표이신 이상용장로님을 보냅니다. 장로님도 사업을 하셔야 하고 가정이 있으시고 바쁜 일정이지만, 오로지 시간과 물질을 헌신하여 약 10일동안 센터들을 방문하고 교육하고 새로운 학교들을 후원하기 위해 관계자를 미팅하고 오는 일정입니다. 비행기 타는 시간만 25시간이 넘습니다. 너무 감사하게도 우리 성도님들은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지난 1주일 동안 목표했던 700만원의 후원금이 다 들어왔습니다. 아이들 연필을 선물해주신 성도님도 계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직접 가보신다면 정말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게 되고, 우리 강팍한 마음들이 눈녹듯 다 녹아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갈 수 없잖아요. 우리가 직장때문에 돈때문에 가정때문에 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대신 가시는 분들을 위해 이 기간동안 금식하고 기도하고 후원해주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하나님은 네팔과 인도뿐만 아니라 내 삶에도 내 직장에서도 내 가정에서도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걸 잊어버리면 정말 우리 자녀들 때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냐! 도대체 왜 그딴 예배나 하러 가느냐! 일이나 해라! 내가 밥줄께 내가 돈줄께! 바로 왕의 교만함이 사로잡을 것입니다.
3. 모세의 간절한 부르짖음
이때 모세가 깨닫습니다. 모세는 쉽게 생각하고 말씀을 전하면 바로 왕이 보내주겠지! 사흘 길만 다녀오면 되는데 라고 계산하고 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가나안인데, 하나님의 뜻은 온전한 구원인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가 벌을 받을까봐 그것만 한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하나님은 모세를 기도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I Can't
주님! 저는 못하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와 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저는 못합니다.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가 진짜 기도해야 할 제목이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이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바로 왕에게 가서 덜 힘들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기도하러 오면, 예배하러 오면 큰일 날 것처럼 우리의 신앙이 약해진 것입니다.
그래도 모세는 하나님앞으로 갔습니다. 결론을 아시겠지만, 하나님이 승리를 모세에게 주시잖아요. 여러분이 기도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앞에 온전히 복종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 세우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_출애굽기 5:22’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면 제멋대로 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고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지 않았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한 세상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두려워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 공부도 좋습니다. 저도 우리 아이들이 훌륭한 사람, 돈 많이 버는 사람, 성공한 사람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예배 가르치지 않으면 아니 정확하게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지 않으면 결과는 오늘 본문과 같습니다. 평생 애굽을 위해, 바로 왕을 위해 벽돌이나 만드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원을 위해 살아보지 못하는 것은 정말 끔찍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면 세상으로 흡수되버립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책도 읽고 지성인으로 깨어 있는다고 해도 안됩니다. 거대한 세상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내 마음대로 살지 않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지 않고 우리가 오늘 처럼 예배하고 금요기도회 와서 기도하고 매일 나눔터에서 성경읽기 서로 권면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야 우리가 세상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파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쪽팔리게 맨날 기독교인들이 타락하고 변질되고 불신자보다 더 음란하고 더 기회주의자처럼 살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그렇단 말이예요.
주님 저는 못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합시다. 여러분! 온전히 예배생활 회복하세요. 주일에도 1,2부 예배 다 드리고 가세요. 왜요? 말씀 한번 듣고 기억도 못하고 사는 것보다 두번 세번 듣고, 또 그렇게 힘을 얻어서 사는 것이 훨씬 좋은 거예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헛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더 성실하고, 더 깨끗하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더 간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하고 성공합니다. 그리고 예배자의 끝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예배자가 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가 쉽지 않습니다. 광야에 가서 예배 한번 드리겠다는 데 그것도 세상은 허락을 하지 않아요.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란 사실을 기억하고 이번 한주도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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