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세
Merry Christmas
너무 기쁜날이예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날이죠!
한국 교회사에 보면 감동적인 실화가 진짜 많거든요. 전국 김제에 금산교회 1908년도에 세워진 교회예요. 남녀 차별이 극심하던 시절이잖아요. 제가 다녀왔는데 교회가 ㄱ자 교회예요. 서로서로 못보고 목사만 보는 거예요. 참 여러가지로 모자란 시절이었습니다. 그교회에 조덕삼이란 분이 이었었습니다. 엄청난 부자예요. 그런데 그 교회에 이자익이라는 머슴이 먼저 다녔어요. 그런데 문제는 장로를 세우는데 이자익이 먼저 된 거예요. 요즘도 그럼 시험들겠죠. 그런데 그 시절에 조덕삼이 건축도 해주고 다해준 거죠. 그런데 그런 교회의 어려운 이야기를 듣고 조덕삼성도가 이야기한거예요. 이자익장로님이 집에서 머슴이지, 교회에서는 신앙이 좋은 분이 장로해야 한다고 잘 모시겠다고 한거예요. 다음에 장로가 당연히 되었는데 그때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진거죠. 이자익장로를 신학교를 보냅니다. 모든 학비 경비를 다 지원하고 나중에 신학교 졸업하고 오는데 금산교회 담임으로 모십니다. 저는 이자익목사님이 나중에 총회장을 세번이나 역임했는데 그분도 귀하지만, 조덕삼장로님이 얼마나 귀한가요. 도대체 예수님을 만나면 무엇때문에 이렇게 변화되고 새사람이 될까요.
요즘 한국교회가 반쪽으로 나뉘어졌다고 해요. 좌파니 우파니 서로 패가 갈려서 싸우고 있다고 해요. 그런데 교회가 그런 곳인가요? 교회는 세상에서 이름 많이 알려진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이, 건강한 진보와 건강한 보수가 함께 연합해야 하는 곳 아닌가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연합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모세는 40년 궁중생활을 마치고 일단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를 자임하다가 자신의 민족들에게 거절당한 후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다시 40년 양치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참 고달픈 인생 아닌가요. 하나님이 왕궁에서 자라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살려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인정해주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모세도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랐어요. 마음만 앞선 거예요. 그래서 방법이 경직되고,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따듯한 사역이 아닌거예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니까요. 그게 오늘 날 교회의 문제이기도 해요.
그렇게 쫓겨난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40년을 성실하게 삽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이 드디어 만나주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_출애굽기 3:1b-2a’
*호렙산=시내산(현재명은 모세의 산, 해발 2285m)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_출애굽기 3:4b-5’
여러분 하나님의 소명을 어떻게 분별하고 받을 수 있나요?
1) 모세는 광야에서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칩니다. 그 말은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해서 성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출애굽기 18:3-4에 보시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게르솜(나그네) 둘째는 엘리에셀(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두 아들의 이름으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삶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비록 모세는 궁중에서 도망쳐서 광야에서 나그네가 되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감사하는 계절을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다시 올때까지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마치 조덕삼장로님처럼 말입니다.
2) 깨어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성실함은 모든 인생에 보편적인 요구입니다. 그런데 왜 성실한 사람들이 소명을 가지지 못할까? 그것은 일상성에 빠져버린 나머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삶을 변화되어 성실하게 직장생활하고 가정을 돌보는데 나중에는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장에 가정에 빠져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_마태복음 24:42’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_마태복음24:38-39’
예수님은 깨어있으라 경고하십니다. 장가들고 시집간다고 하나님을 향해 닫혀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 믿고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소명이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로 사는 동안 얼마나 이리저리 방황했는지 모릅니다. 뭐가 목사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저에게 영적 개방성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항상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어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게 됩니다.
3)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진지한 응답입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_출애굽기 3:4b’
40년 동안 그의 일상이 성실함과 동시에 깨어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에 이렇게 응답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정도가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_출애굽기 3:6b’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경외함으로 인해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 엎드린 것입니다.
사실 40년 전 모세는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족들에게 보이콧을 당하고 바로에게 쫓기고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 생활 40년을 하면서 자신감을 거의 상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모세를 부르실까요? 모세 자신도 이해가 안되어서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셨음에도 못한다, 안한다, 나는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_출애굽기 3:11’
그의 나이가 80세가 되었습니다.
2. 80세가 된 모세
D.L. 무디 목사님은 모세의 일생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1) 자신을 굉장한 존재로 착각한 시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때 굉장한 응답이 아니라 진지한 응답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굉장한 대단한 응답을 받고 싶은데 하나님은 진지한 응답을 원하십니다. 진지한 관계, 진지한 자세, 이런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우리 스스로 굉장하다 생각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2)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시절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훈련시키십니다. 연단시키시죠. 왜냐하면 사랑하시고 당신의 동역자로 함께 하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대부분 여기서 도망갑니다. 진지하지 못해요. 신앙생활이 대부분 굉장한 것만 바라고 살았기 때문에 여기서 다 걸립니다. 머리만 커지고 말만 많아지고 남들 이야기나 하지 하나님과 진지한 대화를 못해요. 그렇게 신앙을 배우지 못해서 그렇죠. 모세가 미디안에서 깨달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깨달은 거예요.
3) 하나님께만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는 시절입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는 거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것 처럼 하나님은 내 백성을 구원하는 일에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엄청난 실제입니다. 그걸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3.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_로마서 3:28’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믿음은 원인이나 결과가 아닙니다. 구원은 조건을 만족시키려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_로마서 5:8’
아브라함 이야기죠. 믿음이 좋아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은 편들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 곧 편들어주는 것입니다. 믿음이나 은혜라는 단어로 설명이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오기 전 창세기(1-11장)는 인류가 죄로 실패한 이야기뿐입니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복을 말하십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빌립보서 말씀은 공포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을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학교 안가고 낚시해서 고기 한마리 잡아왔는데, 아버지에게 드리면서 아버지 건강하세요 하면 언제 이런 거 가져오랬어?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신앙입니다.
로마서 7:21-24에는 ‘내 지체 속에는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로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십니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선언까지 하십니다.
구원을 얻으면 새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 생명, 세상, 그러니까 더이상 사망이 없고, 사망의 자리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그 자리로 가는 것이 빈번합니다. 바울이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자꾸 선언하고 선포합니까? 거기서 나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5:55-58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가 자라며 신앙의 성숙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실패와 절망을 겪지만, 그것이 인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시는 의지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기른다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설교자도 성경에서 자라나는 과정이 있음을 해석해 내지 못하고,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도 늘 비관적으로 생각하여 외면해 버리거나 사유하기 귀찮아하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습니다._박영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소명을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귀찮고 하기 싫은 신앙생활을 이겨내시길 축복합니다. 내 안에 상처나 세상의 기준으로 경직되지 마시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은혜로 유연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십시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반드시 빛과 소금이 되는 자리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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