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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5 주일 2부 예배

< 주일 2부 예배 >

일시:  2015년 04월 05일

제목 :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말씀 : 욥기 42:1-6

설교 : 오승주 목사


2015-04-05 주일2부예배.hwp



음성 다운로드 http://bit.ly/1axoURy

영상 다시보기 https://vimeo.com/124135704



[mix]00021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 욥이라 하는 사람_욥기1:1-5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성경을 읽는 것, 기도하는 것, 교회 다니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궁극적으로 신앙생활은 그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면 다음세대에 문제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세대에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요? 신앙을 어떻게 전달해 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부활절이지만 과연 부활의 신앙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될까요?

많은 교회들은 이미 시스템이나 사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들이 지쳐 포기할 때 교회는 심각한 위기가 올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여러분은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예배면 충분하다는 교회가 존재할까요? 구원받은 성도라면 예배하나면 충분해야 합니다. 예배가 가치가 없게 될 만큼 많은 프로그램이 교회 안에 있다면 잘못된 교회일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역시 세상의 좋은 것을 많이 봐서 교회 안에도 그런 것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자신의 현장과 자신의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활절 경배와 찬양을 준비하면서 내년에는 정말 더욱 경배와 찬양이 되어지길 기도합니다. 그것은 목회자인 저나 성도인 여러분이 신앙을 가질 때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욥을 보려 합니다. 그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우스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_욥기1:1-5’

 

욥은 항상 완벽했습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까? 어느 정도 완벽했습니까? 그의 자녀가 행여나 범죄할까 자녀들이 잔치를 하면 기다렸다가 성결하게 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 완벽한 시스템입니다.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역시 그것을 쫓아갑니다. 그 대단함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내 주변에 사람들을 잃어가고, 내 인생에 예수님은 사라져가지 않았는지 질문해보고 싶습니다.

 

. 귀로만 들었던 주님

 

1.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_욥기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_욥기1:20-22’

 

욥을 시험하였습니다. 사탄의 시험이기도 하였지만, 내심 하나님도 그걸 원하셨습니다. 그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갔을 때 그는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거나 범죄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왔지만 그 완벽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머리털을 밀고, 겉옷을 찢고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여기에서 우리의 모습을 깊이 봅니다.

욥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 욥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윤리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과응보가 가지는 보응의 원리, 권선징악으로 대표되는 윤리적 가치,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샤머니즘이 그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벗지 못한 채 신앙인이라면서도 우리는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권위나 의지나 계획을 도외시할 때가 참 많습니다. 스스로 세운 이상이나 자신의 의나 윤리적 관점을 신앙의 핵심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이해했거나 소원한 것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여 성경과 다른 종교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매달림으로써 참으로 헛된 고생을 합니다. 우리는 이 고민을 애써 다른 것으로 메우려 합니다. 어떤 문제가 올 때 '훈련을 받지 않아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기도하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도망감으로 자신을 깨고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가는 깊은 답을 얻는 것은 외면하려 합니다. 늘 이렇게 도망가고 변명하는 자리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2. 하였더라면_욥기3:1-10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_욥기3:1-6

 

욥은 자신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그가 가졌던 종교심, 행위 때문에 괴롭다는 표현을 하나님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라고 합니다. 그는 예배는 드리고 찬송은 하였는지 모르지만, 중심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 아니냐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짜 구원받은 것이 분명합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 분명하십니까?

욥기서는 사탄의 떼어내는 것과 하나님의 붙드심과의 싸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단의 떼어내는 싸움은 욥기 2장이 끝이고 3장부터는 전부 하나님이 붙드는 싸움입니다. 욥의 한탄으로부터 시작해서 친구들의 충고, 답변, 논쟁, 끝없는 어떤 불평이든 억울함이든 호소든 다 하나님이 욥을 붙잡는 행위이자 사랑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깨달아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깨달아 낙오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겉모양 바꾸기에 급급하고, 그저 삶을 바꾸기에 급급하나 실상은 피와 살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울고, 웃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고, 실패와 회개를 수도 없이 반복하여 하나님의 붙잡힘 속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우리의 것, 세상의 틀 안에서 신앙마저도 기준을 세워 지키려 하고 그것이 무너지면 곧 하나님이 없는 듯 달아나려 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라고 말합니다.

 

3. 의로운 욥_욥기31:9-12,16-17,24-30

 

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면 내 아내가 타인의 맷돌을 돌리며 타인과 더불어 동침하기를 바라노라 그것은 참으로 음란한 일이니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니 나의 모든 소출을 뿌리째 뽑기를 바라노라_욥기31:9-12’

 

욥은 여전히 의롭습니다. 욥이 욥기서 전체를 관통해서 자꾸만 불평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모르느냐?’입니다. ‘너희는 내 친구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온 것을 모르느냐?’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불평인지 몰랐습니다. 욥기서를 묵상하다 보니 이것이 욥의 근본적인 불평이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내가 열심히 살고 착하게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욥은 모든 것에서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의로움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의로움 말입니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_욥기31:16-17’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 만일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뜨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 맞추었다면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 실상은 나는 그가 죽기를 구하는 말로 그의 생명을 저주하여 내 입이 범죄하게 하지 아니하였노라_욥기31:24-30’

 

자신은 금과 은을 바라본 적이 없으며 마음이 유혹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것 자체를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 욥에게 하나님은 고난을 주어 그것마저도 내려놓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한결같이 쌓아가는 의와 우리의 율법 등이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쉽게 아니라 하고, 쉽게 맞다 라고 합니다. 전부 내 틀이고 내 기준이 아닙니까? 바리새인들이 범하였던 오류이고 어쩌면 우리가 범하고 있는 오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씀 앞에 그 무엇이 기준이 될 수 있겠습니까?

 

.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1. 오직의 신앙_욥기42:2-4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_욥기42:2-4’

고난과 고통 속에서 욥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욥을 붙잡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붙잡아줄 능력이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다 돌볼 수 있는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붙잡습니다. 그것을 놓치면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욥은 그걸 놓치지 않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신앙기준으로 욥을 평가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분법의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낮과 밤에서의 밤, 예를 들어 형통과 고난에서의 고난, 예를 들어 축복과 저주에서의 저주, 이런 것들이 없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있어야 할 것이라고 답하기 때문에 욥기서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인과응보식 논리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 고난을 통해 욥은 고난을 통해 자신을 바라봤지만, 점차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참된 가치입니다. 그저 이분법의 논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동반자로 세움을 받은 인간의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여 우리가 항상 주문처럼 외우는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로 살아가는 의미를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룰 테니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달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외면하지 말고 말입니다. 우리는 쉽게 외면하려 합니다. 밤을 외면하고, 고난을 외면하고, 저주를 외면하려 합니다.

 

2.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할 때 _욥기42:5-6

 

내가 누께 대하여 귀로 들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_욥기42:5-6’

 

욥이 드디어 깨닫습니다. 그렇게 의로웠던 욥이 한 번도 주님을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바라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신앙은 무엇입니까? 믿고 각오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우리의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의 자리를 책임지고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창조물의 주인으로 모든 것을 회복해 가시는데 우리를 통해 하시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하루 주님의 통치 안에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하나님께만 그냥 다 맡기고 착하게 살다가, 휩쓸렸다가 좀 잘못된 것 같으면 기도했다가 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자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부모, 스승이 세웠던 교회가 이제는 좀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고통 받는 이들에게 다만 위로를, 다만 평안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더욱 힘을 내고 열심을 내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목적하신 길이요, 우리가 가장 인간다워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회개입니다. 그저 내가 가진 잘못된 삶의 틀을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그것을 티끌이라 여기고, 그것을 재로 태워 그 가운데서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3.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_욥기42: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_욥기42:10’

 

저는 이 말씀이 욥기서의 주제 되는 구절이라 생각했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그럴 때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좀 더 주님과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저 이유 없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이 아닌 한 영혼을 사랑하셔서 그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난한자와 병든 자를 고치시고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을 붙들고 계셨던 주님을 말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함부로 주님의 사람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함부로 다른 사람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그의 마지막 회개입니다. 용서, 사랑,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교회가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할 수 있다 없다 라고 단정 짓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욥기를 묵상하면서 느꼈던 모든 것을 가슴에 담고 여러분과 함께 갈 수 있길 바랄뿐입니다.

 

주님 부활의 날에 우리에게 신앙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어지러운 시대에 수많은 현상들을 바라보지 말고 내 자신을 통찰하여 경배 속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게 되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내 인생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믿음의 한주가 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