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2014-01-26 주일 2부 예배

< 주일 2부 예배 >

일시:  2014년 1월 26일

제목 : 우리가 어찌할꼬

말씀 : 사도행전 2:37-42

설교 : 오승주목사



2014-01-26 주일2부예배.hwp



아래 링크를 통해 음성 메시지를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db.tt/tt2MknUy


아래 링크를 통해 영상으로 메시지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http://youtu.be/39MAV9Ib0Ys




 Ⅰ. 말씀이 들리면 회개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사도행전을 설교하는 것은 목회자에게 많은 부담이다. 이런 역사를 믿고 기대하며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듣고 들려져서 성령의 역사가 체험되는 삶이 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어려워 질 수 있다는 부담감이 목회자에게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저의 역할인 것 같다.

사실, 엄청난 메시지들이 쏟아지는 시대에 다 쫒아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렘넌트들을 많이 봤다. 알겠는데 갭이 큰 것이다. 현장을 정복해야 하겠는데 현실은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설교를 하면서 이런 마음들을 나누길 원한다. 진짜 역사, 세계복음화가 무엇인가? 지난주 이번 주 말씀을 통해 찾아야 한다. 말씀이 들리는 것이다. 이번 주 한 주간 여러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병들어 있는 것이다. 말씀이 들리면 살아나기 시작한다. 설교를 들으라는 것이 아니다. 하루 종일 말씀을 틀어놓고 있으면 들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라도 발버둥을 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겠지만, 본질적으로 말씀이 들린다는 것은 삶이 돌아선다는 것이다. 진짜 말씀이 들릴 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칼로 베임을 당하듯이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위장한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다. 끊임없이 위장하고 숨긴다. 창3의 원죄를 지은 인간이 처음에 자신을 숨겼다. 누구에게로 부터인가? 하나님에게로부터 숨기려 한다. 우리 자기의 길로 가는 인생을 숨기려 한다. 그런데 숨겨지지 않는다. 자기 안의 더럽고 추악한 것들을 숨기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평안, 안식은 없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안식이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기 때문에 행복할 수가 없다. 두려움만 있다. 그리고 다른 것으로 메꾸려 한다. 절대 메꾸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말씀이 들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식과 위장이 통하지 않는다.

가끔 우리 집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냐? 어떻게 오늘 설교를 듣는 데 내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듣는다. 제가 그 집을 도청하거나 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하셔서 말씀이 들린다는 증거이다. 어떨 때는 말씀이 인생관을, 가정생활을, 양심과 행동을 찌른다. 내 마음속에 있는 미움, 분노, 질투심를 찌르기도 한다.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영혼의 정곡을 찌르기 때문에 정신 번쩍번쩍한다. 하나님은 말씀에 반응하길 원한다. 어떤 반응인가? 오늘 본문처럼 ‘우리가 어찌할꼬’의 반응이다..

설교가 좋다 나쁘다를 평가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생활이 아니다. 초대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못박고 조롱하고 죽인 예수가 하나님이셨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절망의 순간이 소망의 순간으로 바뀐다. 복음은 그런 것이다. 가장 절망의 순간에 소망의 길로 인도하신다. 말씀은 그런 것이다. 구석에 몰려있고 흉년의 때인 것 같고 불안한 것 같은데 그 때 말씀이 들리면 소망이 생긴다. 영적으로는 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자신의 자존심으로는 응답을 받을 수 없다. 내 자존심으로 하나님 앞에 싸우면 응답을 받을 수 없다. 내 힘으로는 내 인생을 경영할 수 없다. 사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 하다. 우는 사자처럼 찾고 다니는 사단을 우리는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 삶을 인도하도록 내려놓아야 한다. 나를 하나님께 맡겨 놓아야 한다. 살아있는 말씀은 행동하게 하고 다른 삶을 살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_히브리서4:12-13’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가 다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가 죄 속에 있어 구석에 몰려 절망의 순간에 스스로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면 그것이 소망의 시작이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시작하기 바란다. 내 삶이 왜 이렇기, 왜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지 않지‘ 라고 하는 것이 소망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고 계신다.

Ⅱ.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베드로가 복음의 메시지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했다. 이 때 베드로가 지체 없이 구원의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오늘 확인 할 것은 네 가지 구원의 필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을 무조건 영접시키는 것을 탈피하길 바란다. 스페인에 캠프를 갔는데 200여 명이 가서 3일간 천명 이상이 영접을 했다. 그런데 몇 년 후 가서 보니 오히려 더 성도의 수가 줄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때가 되면 병원전도도 하고 노방 전도도 할 것이다. 진짜 사랑한다면, 정말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내면에 이를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베드로는 그들이 해야 할 것을 지체 없이 이야기 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1. ‘너희가 회개하여_사도행전2:38a'

회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회개가 감정이라면 문제가 있을 것이다. 진짜 회개의 뜻은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집나간 탕자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죄인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자복하는 것에서 구원이 시작된다. 내가 사단의 종노릇하고 있는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그 실체를 보이게 된다. 그 때 부터가 구원의 시작이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깨닫는 것이 아니다. 반성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자살을 하기도 한다.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십자가로 돌아서는 것이다. 회개는 우울한 것이 아니다. 소망의 하나님, 희망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반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죄하면 안된다. 죄를 깨닫고 소망이 보이는 것이 회개이다.

2.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_사도행전2:38b'

세례는 회개의 외적 표현이다. 사실 세례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기독교 역사에서 이슈이다. 어떤 곳에서는 물만 뿌리면 된다, 많이 뿌려야 한다, 몸이 담겨져야 한다라고 한다. 시애틀에서 침례교회에 갔었는데 교회 안에 욕조가 있다더라. 욕조 안에 들어갔다 나오는 세례를 한 달에 한번씩 한다. 목사님께 침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그게 사실 중요하다. 그래서 교단이 나누어 졌다. 교리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실 신앙을 외형적인 것에 의미부여를 많이 한다.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교회에서 일을 많이 하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 마음이 시원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소용없다. 우리는 진짜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한다. 베드로가 기가 막힌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부 외형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 세례이다. 예수님은 믿고 싶은데 세례를 받지 않는 다는 것은 사랑하는데 결혼하지 않는 다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장로교로 보내셨으니 세례를 받으면 된다. 침례교단으로 보내셨으면 침례를 받으면 된다. 그게 하나님의 섭리이다. 중요한 것은 죄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가겠다는 결단이다. 외적인 결단의 표시도 중요한 것이다. 결혼식을 왜 하는가? 결혼을 가족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을 결단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_로마서6:3-4’

새로운 생명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 세례의 의미이다. 구원의 중요한 의미 이다. 세례의 자체 의미가 굉장히 중요하다.

3. ' 죄사함을 받으라_사도행전2:38c'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한 용서이다. 99%의 용서가 아니다. 50%의 용서가 아니다. 50%의 노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죄는 세 가지가 있다. 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자범죄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범죄를 이야기 하고 이 죄를 회개한다. 그러나 지난 설교시간에 이야기하는 두려움, 불안함은 하나님을 떠난 원죄에서 나온다. 그것뿐만 아니라 부모로부터 오는 죄도 있다. 마치 빚과 같은 것이다. 죄가 대물림된다. 해결할 길이 없다. 그런데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히 해결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확신도 없다. 그런데 성경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믿기만 하면 되는데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밀어 주신 손을 잡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영원한 천국기록에서 내 죄의 기록이 영원히 지워지는 것이다. 죄사함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사단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단의 조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 죄사함의 소식이 알려주는 것이 복음이다. 죄 때문에 사단의 종노릇을 해야 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선포하고 안내하는 것이 복음이다.

4. '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니리_사도행전2:28d'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물 세례보다 중요한 것이 성령세례이다. 성령이 임하였을 때 평안함, 감동, 충만함, 자신감은 체험하지 못하면 설명할 길이 없다. 저는 이 충만함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복음을 받으면서 했다. 3박4일을 울었다. 울어서 체험 했다는 것이 아니다. 기뻐서 운 것이다. 하나님이 충만하게 임하는 것을 느꼈다. 그 감동은 체험하지 못하면 설명할 길이 없다. 그 비밀을 가진 자가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있는 것이다. 그 비밀이 없이 살아가니 세상에 눈치 보이고 치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데 속고 사는 것이다. 복음을 자신의 경험과 지혜로 가둬놓지 말기 바란다. 하나님이 역사하도록 비워야 한다. 맡겨야 한다.

Ⅲ. 하나님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베드로는 청중들에게 회개할 것을 강하게 이야기 했다. 하지만, 정죄하는 것이 아니었다. 결코 질책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분들은 말씀을 하면서 정죄를 한다.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 본인이 더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선포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_이사야60:1’

1.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_사도행전2:40a'

베드로에게 빛이 임했기 때문에 담대하게 이 복음을 이야기 한 것이다. 여러 말로 확증하여 권하여 이른 것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구원의 팔은 매우 넓다. 우리는 감히 정죄를 하지만 하나님은 정죄가 없다. 그 아들을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으니 누구든지, 얼마듡, 언제든지 오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은 구원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고 기준을 정한다. 저 사람은 흉년이 계속 있어야겠는데 라고 악한 생각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팔은 상상할 수 없다. 베드로에게 이것이 임하니 간절함에 여러 말로 확증하여 이른 것이다. 한번으로 설명이 되지 않으니 여러 비유를 들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한 것이다. 이게 베드로의 마음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구원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정에서 일어나기 바란다. 그래서 이 마음으로 전도해야 한다. 청중들이 복음을 듣고 결단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베드로가 원했을 것이다. 복음을 체험하고 베드로가 안타까웠을 것이다. 하나님께로 이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진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다.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임한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이런 마음이 생긴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있었다. 모두들 비슷한 것 같다. 그러나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나 저나 여러분이나 다 똑같다. 그래서 먼저 구원을 받은 것이다. 복음은 정죄가 아니다. 야단치고 위협을 하는 것이 아니다. 중직자가 되어서 그러지 않기 바란다. 자꾸 야단치고 정죄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랑해주고 하나님의 애통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복음은 탕자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저도 가족들이 모이면 부모님과 싸운다. 어머니께서 혼자 김장을 300포기를 하신다. 그리고 연세가 많이 드셔서 손맛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누나들이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러면 어머니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머라고 한다. 어머니는 그런 소리를 듣고서도 다음에 또 김장을 한다. 아마 돌아가실때까지 할 것이다. 그게 부모님의 사랑인 것 같다. 누나들에게도 똑같이 늙게 된다고 그러지 말라고 한다. 복음을 듣고 난 후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된다. 베드로가 그러한 마음이었다. 오늘 베드로는 이 영혼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길 원하는 안타까움에 여러 말로 확증하고 권하여 이른 것이다.

2. '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_사도행전2:41a'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그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학자들은 많은 수가 모여 있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는 3천명이 복음을 받았다. 동시에 그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고 현장으로 돌아가서 전하여 이루어 진 것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 장소에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생명을 얻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소외계층, 3세계현장, 엘리트 현장에 구원받을 사람들이 반드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나오는 간증에는 힘이 있다. 내가 더듬으며 대충 이야기해도 복음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해외에서 많이 보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종이를 보고 전도를 하는데 울면서 영접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성령이 임하시니 베드로를 통해서 3천명의 제자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 마음을 가지시기 바란다.

여러분은 말씀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말씀을 나누어야 한다. 말씀을 들으면 살아날 사람이 예비되어 있다. 교회안에 있는 제자는 말씀이 들리는 사람이다. 전도를 잘하는 사람이 제자가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안들려도 전도 잘하는 사람이 있다. 전도를 잘하는 사람은 끝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말씀이 들리는 사람은 끝까지 간다. 전도는 그 결과이고 응답일 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다. 시스템도, 건물도 말씀이 중심이어야 한다. 생명의 말씀이면 전부 살아나게 된다. 가스펠교회는 말씀이 풍성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현장에서 말씀이 풍성한 미션홈을 이루어져야 한다. 말씀을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흉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말씀을 듣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위로, 칭찬으로는 잠시 잠깐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

Ⅳ. 가스펠 미션홈 - 생명의 말씀을 나누는 축복의 통로

그래서 가스펠 미션홈을 두고 기도한다. 생명의 말씀을 나누는 축복의 통로이다. 말씀을 받아 회개가 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에게 감사가 흘러나온다. 그것이 포럼이다. 흘러나오는 감사가 포럼이고 간증이다. 그 감사는 자신을 낮추는 감사이다. 진짜 변화되면 자랑할 것이 없다. 말씀을 자랑하게 된다. 나를 자랑하지 않게 된다. 나를 자랑하는 사역자는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안타까움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니 구원을 받으라고 말했다.

생명의 말씀을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바란다. 누구에게든지 나누는 통로가 되기 바란다. 이 말씀이 이 사람에게 맞을까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 사람이 변화될 시간표에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 강단에서 복음이 은은하게 스며들 수 있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 누가 듣더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말씀이 되길 기도한다. 그래서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 바란다. 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현장이 살아나려면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시스템을 위해 본격적으로 기도하고 마음에 담고 시작하기 바란다. 서울과 경기도에서 모임을 시작할 것이다. 그곳은 정체된 모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불신자들이 오는 문이 될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품어주는 사랑의 센터가 될 것이다. 그 미션홈의 주역이 되기 바란다.

우리는 오늘 진정한 회개를 알고 하나님 말씀으로 늘 새롭게 되도록 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대부분 말씀을 듣지 않는 신앙생활을 한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다. 전통,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돌이키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신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베드로처럼 통로가 되기 위해 담대히 쓰임을 받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인도하고 계신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_마태복음18:20’

두 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다. 혼자서는 쉽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이면 가능하다. 한명이면 충분하지만 이는 다른 관점이다. 어떻게 3천 제자가 일어났는지 다음 주에 살펴 볼 것이다. 우리가 사도행전의 역사를 그림 그리고 가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심을 체험하고 가야 한다. 이 성령의 역사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차분하게 하나하나 점검해 가는 것이다. 정확히 인도받아 갈 것이다. 지역의 미션홈도 정확하게 인도 받을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그릇이 준비되고 정확하게 순종할 때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를 받기 위해 여호수아는 멈추었던 것이다. 그 시간이 삶에 있어야 한다. 그 시간이 예배시간이다. 이 예배시간을 놓치면 되겠는가?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예배를 놓치면 다 놓치는 것이다. 이 공동체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없는 예배는 죽은 제사이다.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새 땅을 향해 가는데 기도해 보기 바란다. 누군가를 정죄하고 비판하기 전에 ‘어찌할꼬’가 되면 하나님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그게 가정을 변화시킨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말씀을 가지고 큰 힘을 얻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