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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6 주일 1부 예배

< 주일 1부 예배 >

일시:  2014년 1월 26일

제목 :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말씀 : 여호수아 4:19-24

설교 : 오승주목사



2014-01-26 주일1부예배.hwp



아래 링크를 통해 음성 메시지를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db.tt/PtrnCbkq


아래 링크를 통해 영상으로 메시지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http://youtu.be/BSM-gDTItmI



Ⅰ. 불안이 영혼을 잠식할 때

어떻게 하면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전달 하는가?가 우리의 목표이다. 그러나 현실은 사실 그렇지 않다. 이 문제는 교회사를 두고 있는 끊임없는 갈등일 것이다. 구약에도 마찬가지로 오실 메시야를 알고 있지만 실제 삶은 불안과 염려가 엄습해와서 무너질 때가 많다. 실제 우리 인생은 불안이 영혼을 잠식할 때가 많다. 어쩌면 그게 당연할 수도 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낙천적인 성격이다. 밝은 편이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바라본다. 하지만 제 안에도 불안이 있다. 예상한대로 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그게 우리의 삶이다. 어떤 철학자는 우리의 인생이 좌절의 벽의 삶이라고 한다. 좌절이 계속 되는 것이다. 기대한 일들이 펼쳐질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상황이 어려우면 누구든지 그 상황에서 희망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지인이나 친구들의 도움도 들리지 않는다. 궁지에 몰리면 사람들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게 된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그것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괜찮지만 죄인들, 불신자들이 형통한 것을 보면 더욱더 궁지에 몰리게 된다. 분명히 하나님을 모르는데 형통한 모습을 보면 우리를 더 낙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회의감을 가지고 궁지에 몰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이 우리가 풀어가야 할 이 시대의 숙제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대부분 이렇게 궁지에 몰릴 때 하나님 말씀마저도 멀리한다. 하나님을 떠나버린다. 그러나 말씀을 떠나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처럼 안타깝고 어리석은 것이 없다. 그런 곤경에 처할 때가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축복의 때인 것을 몰라서 그렇다. 그 단계를 거쳐 하나님이 주인 되는 삶으로 가는 기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반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말씀을 멀리한다. 복음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 직장, 경제 문제로 궁지에 몰린다. 그리고 그게 말씀을 듣는 것,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말한다. 그래서 이중생활, 삼중생활을 한다. 겉모양과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이 다르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다. 이를 다 뛰어넘어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기 바란다. 지난 주 말씀처럼 마음의, 불신앙의 요단을 건너기 바란다.

마음의 요단, 불신앙의 요단을 건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회개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_잠언 23:17-18’

이 맛을 보기 바란다. 가스펠교회 성도들이 이 축복을 받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다. 알파와 오메가인 하나님이다. 창조주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다.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우리의 미래가 끊어지겠는가? 죄인의 형통은 잠시잠깐이다. 이를 보고 낙심해 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는가?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_ 요한복음3:18’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아 심판에서 제외된 자들이다. 천국의 시민권을 소유한 구원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삶의 작은 문제에 낙심해 있다면 사단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할 때가 기회이다. 그 단계를 뛰어넘기 바란다. 요단을 건널 기회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뛰어넘지 못하고 광야생활을 했다.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가라 하셨지만 불안하니 가지 못했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은 것이다. 늘 원망과 불평 속에 살았다. 그래서 40년을 약속의 땅을 가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우리는 이런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 우리에게 불안이 엄습하는가? 마음의 요단을 건너버려야 한다. 신앙생활을 새롭게 하기 바란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요단을 건너서부터 시작된다.

Ⅱ. 언약궤중심의 진을 치며

1. 말씀이 들린 다는 것

우리 교회가 붙잡아야 할 방향은 1부예배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2부 예배에서 실제적인 방법을 얻는 것이다. 이를 체험하고 실제 적용하는 것은 금요예배이다. 실제 기도하는 시간이다. 이 세 예배가 하나의 예배로 돌아갈 것이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우리 신앙의 방향, 물줄기를 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고 힘이 들어서 한숨을 돌리기 위해 길갈에 진을 쳤겠는가? 일주일 동안 묵상을 했다. 단순히 쉬기 위해 진을 쳤겠는가? 그것도 맞지만 더 큰 의미가 있다. 삼백만 대군이 강을 건넜기 때문에 쉬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멈추라고 하신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여유가 필요하다. 한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에 말씀을 청종했다. 그 시간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믿는 자의 여유이다.

우리는 행복을 쫒는데 신기루를 쫒는 것 같다. 욕망이 끝이 없는 것이다. 고등학생때는 대학에만 가면, 대학에 가서는 빨리 대학생활이 끝났으면, 군대에 가서는 제대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했다. 전도사만 되면 원업이 사역을 하겠다고 했다. 전도사가 되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래서 목사가 되면 될 줄 알았는데 그러니 결혼만 하면 된다고 한다. 지금은 아이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을 한다. 그 이후에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생길 것이다. 인생이 끝없는 신기루 같다. 우리의 삶은 오늘이 중요한데 오늘이 없다.

저와 여러분은 영적인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쳤는데 언약궤를 중심으로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했다. 여호수아가 말씀을 청종하고 여호수아가 받은 말씀을 온 백성이 기다렸다. 언약궤를 바라보고 귀히 여기는 삶이 복된 삶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다른 것을 섬기지 말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요구하고 계신다. 그것 하나만 요구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바라보라는 것이다.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고 인생가운데 말씀을 청종하기 원하신다. 우리는 우리 속에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길갈에 첫 진을 쳤다. 우리는 신앙생활 가운데 언약궤를 중심으로 한 쉼이 필요하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말씀이 들리는 가 이다.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은 코너에 몰려있고 곤경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위기이고 흉년에 든 것이다. 여러분을 외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의 기준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가이다. 예배시간에 듣는 것이 아닌 삶에서 듣는 것이다.

욕심으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면 그 책임은 결국 나에게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환경, 부모님을 원망한다. 여러분이 결혼, 직업, 인생에서 말씀이 들리는 선택을 하기 원한다. 모든 인생의 선택이 말씀이 들리는 선택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 속에 장래가 있겠고 내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차이점은 말씀이 들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괴로우면서도 무언가 있을 것 같아서 계속해서 쫒아가지만 그곳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돈이 많다고 밥을 10공기씩 먹을 수 없다. 돈이 많아 집을 10채씩 가지고 있어도 실제로 전부 다 누릴 수는 없다. 우리는 돈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죽지만 돈은 영원히 존재한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인데 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이 들릴 때부터 다른 역사가 시작되었다.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_골로새서 2:21-23’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은 실제적으로는 유익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인가 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_신명기6:5’

2.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멸시받는 땅에 살고 있다. 교회들이 너무 많은데 대한민국에 크리스쳔들이 천만명이 넘는다고하는데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도 실제로는 말씀이 멸시받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가? 경건한 척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너무 지식이 많아서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이 많아서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고 있다. 그게 한국교회의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할 때 신학교에서 배웠던 것들 까지도 내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엎드린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라고 하는데 제 속에 좋은 설교를 해서 성도들을 따라오게 해야지라는 동기와 싸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하는데 성도들을 책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가로막지 않을지가 고민이다.

우리가 경건하지 않기 때문에 봉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헌금을 조금 하기 때문에 곤경에 처하는 것이 아니다. 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고난과 곤경에 들게 하는가? 말씀을 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 하나뿐이다. 말씀을 멸시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사람,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녀들을 그냥 두지 않고 그치지 않는 고난으로 말씀을 듣게 하신다. 그치지 않는 고난으로 말씀을 듣는 자리로 인도하신다. 그것이 택하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C.S. 루이스라는 목회자는 고통은 귀먹은 사람의 마이크라고 했다. 한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고통이 찾아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이 말도 들리지 않고 내 속의 원망만 나오게 된다. 그 고통을 피해서 가는데 더 큰 고난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된다. 그게 선택받은 자의 인생이다. 그것을 잊지 말아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고통의 끝까지 가보겠는가? 흉년의 끝까지 가야 하겠는가?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여호수아 처럼 승전가를 부르고 갈렙처럼 하나님 앞에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것이 우리교회의 색깔이다. 우리가 많은 사역을 해야 겠지만 한 가지 꼭 해야 할 일을 뽑는다면 말씀중심의 신앙생활일 것이다. 말씀을 떠나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잘못된 결정으로 내 가정과 자손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그 뿐만이 아니라 진을 쳤다. 말씀을 듣기 위해 멈춘 것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엄청난 증거를 얻었다. 요단이 갈라지고 요단강이 말랐다. 3백 만명이 건너는 동안에 요단이 흐르지 않은 것이다. 그 동안 하나님이 물줄기를 막은 것이다. 건너고 난 후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신나고 들떠 있을 법도 하지만 말씀 앞에 다시 서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요단을 건넌 것, 기적이 일어난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 기적의 이후에 말씀 앞에 다시 선 것이 대단한 것이다. 신앙은 그래야 한다. 우리는 그 응답을 두고 축복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응답을 받는 곳이 교회이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이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_베드로전서1:23’

Ⅲ.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1. 교회는 보혈의 공동체입니다.

요단을 건너면서 하나님이 시키셨다. 열두지파가 돌을 집어서 갔다. 나중에 사람들이 묻거든 요단을 건넌 것을 말해주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길갈에 진을 치고 열두 돌을 세웠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단을 건넜다는 증거를 의미한다. 우리도 어제, 오늘 수련회의 증거로 사진을 남겼다. 그것이 증거이다. 구원받은 증거를 확실히 가져야 한다. 여러분은 요단을 건넌 증거가 있는가? 그것을 자부심으로 가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요단을 건넌 증거를 갖지 않고 있다.

교회는 보혈의 공통체이다. 누구라도 공동체를 떠나서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나홀로 신앙은 결코 균형 잡힌 신앙생활이 아니다. 말씀을 떠나면 흉년이 오고 고난이 올 것이나. 그나마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다. 영적인 계보를 가진 저와 여러분은 보혈의 증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의로운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의 모임이다. 은혜로 힘을 얻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손을 잡아주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겠는가? 보혈의 증거를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나중에 중직자가 되어 이를 잃어버리면 무엇만 남는가? 교권만 남고 율법만 남는다. 지식과 경험만 남는다. 목회자는 야망을 위해 설교를 하게 된다. 교회가 보혈의 공동체 힘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구원 받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_고린도후서2:15’

2. 한 사람의 믿음으로 많은 사람과 가정이 살아납니다.

서로가 설리고 떨리고 기대하는 만남으로 만나더라도 최악의 만남이 될 수 있다. 저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을 걸지만 만남이후 최악이 되는 경우들을 봤다. 우리는 만남으로 그런 상황이 오면 상대방을 탓한다.

하지만 저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저를 만나는 사람이 천국에 초대되도록, 그 복을 나누는 만남이 되도록 기도한다.

어떤 부모, 어떤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거기에 100% 만족 할 수 없다. 저는 여러분이, 구원의 증거를 가진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호수아 한 사람이면 하나님께 충분했다. 진을 치고 열두 돌을 세우라고 했다. 여호수아가 홍해를 건너게 하신, 요단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고,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겠다는 것이었다. 그 한사람 때문에 온 자손이 복을 받았다.

가장은 쉬운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잘 해야 하는데 보통 보면 믿음이 제일 없다. 그래서 아버지들이 많아지면 은혜 받을 수 있는 모임을 하고 싶다. 한 사람의 증거를 붙잡은 믿음이 가정과 가문을 살릴 수 있다.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래서 저는 기도한다. 저 때문에 가문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 환난을 당하고 원통한 자들이 교회에 가득차기를 소원한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증인이 되기 바란다. 소외받은 분들이 교회에 가득차기 바란다. 제가 제 힘으로 도울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의 원리는 먼저 구원받은 우리를 통해 도우시는 것이다.

힘든 자들이 와서 보혈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간증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광야에서 살다가 요단을 건넌 체험이 있는 사람들이 감사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주일날 가득차길 원한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마음이 비워져서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삶이 복된 삶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증거로 세울 것이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_히브리서6:19-20’

Ⅳ.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을 건넌 장면이 상상이 되는가? 여호수아는 체험을 했다. 여호수아의 가슴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삶을 선택 했을 때 주는 응답을 체험했다. 요단을 건넌 이후 갈등하지 않았다. 단 한번도 no를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굴곡진 신앙생활이 아닌 넘어서서 신앙생활을 하기 바란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기 바란다.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의로운 사람이다. 죄책감이 시달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아직도 시달리고 있는가. 벗어나고 건너기 바란다. 왜 하나님이 돌을 주으라고 하셨는가. 구원의 증거를 가지고 승리하라는 것이다.

’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게 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_여호수아4:24‘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가 증거, 간증을 가져야 한다. 무엇때문인가?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을 들고 기념하라고 하시는가? 우리는 왜 간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우리 속의 거룩한 증거를 가지고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우리의 끝이고 결론이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증거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받는 교회가 맞다면 하나님께서 완벽한 증거를 주실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손이 강하게 하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역을 위해 생명의 말씀이 흘러들어가는 시스템을 준비하려고 한다. 그것이 가스펠 미션홈이다. 우리의 미션홈은 무슨 미션홈인가? 다른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핵심은 말씀을 간증하는 것이다. 말씀이 들리는 삶을 간증하는 미션홈이 될 것이다. 매주 강단을 통해 말씀을 나누는 포럼을 통해 그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하나님 말씀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모임이 될 것이다. 다시말해 여러분의 은혜가 충만한 모임이 되고 있으면 누가 오더라도 은혜를 받는 모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다. 살리는 동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말씀이 들리고, 그 증표를 가지고 있으면 오게 되어있다. 그들은 지금 벌벌 떨고 있기 때문이다.

‘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_사도행전26:18a'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다.

이번 주는 명절이다. 큰 의미가 있나? 많은 분들이 좋은 마음으로 가지만 싸우고, 이기심에 헐뜯고, 부모님을 원망하고, 그리고 결국 믿음까지 포기하고 우상숭배에 빠진다. 말씀이 들리는 사람은 보혈의 증표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한 믿음의 배려를 한다.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한 배려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내하기 위한 배려이다. 그래야 살기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미션홈을 준비하는 것이다. 명절동안 섬김과 사랑으로 진짜 승리하길 바란다.

[적용]

1. 말씀이 들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 말씀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라.

2. 교회의 본질은 보혈의 공동체이기기 보혈의 증표를 가지라 -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라

3. 한 사람의 믿음이 가정과 가문, 나라, 미래를 살린다. 믿음의 결단을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