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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 주일 2부 예배

< 주일 2부 예배 >

일시:  2014년 8월 3일

제목 :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 : 사도행전 13 : 4-12

설교 : 오승주 목사



2014-08-03 주일2부예배.hwp




가스펠교회 주일2부예배 20140803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 예수님의 방법

 

오늘 본문에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그들의 수행원인 요한으로 이루어진 전도팀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구브로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구브로는 오늘날 키프로스 섬으로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이 전도팀의 리더였던 바나바의 고향을 첫 번째 전도지로 선택하신 것은 예수님의 일관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까?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처음부터 제자들을 땅 끝까지 보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다음, 그들로 하여금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의 증인된 삶을 다시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의 고향입니다.

다메섹도상에서 바울을 부르신 주님은 바울이 즉각, 전도자로 살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무려 13년이나 다소에서 칩거하게 하신 후에 안디옥교회 공동목회자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런데 다소는 바울의 고향입니다. 오늘 전도팀을 만드신 후에 주님은 직접 인도하셨는데 하필 구브로가 그 첫 번째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일관된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고향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반드시 자신의 고향, 다시 말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사역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들 앞에서는 나의 꾸민 연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부터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어야 언제 어디서나 참된 전도자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봐야 합니다. 왜 많은 교회들이 선교를 하고, 봉사를 하고, 수많은 집회와 모임들을 하지만 세상은 변화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연기가 아니라, 주님을 본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못한다면 교회는 계속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_마태복음9:35’

 

.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고향 즉,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통로로써 살아야가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1.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_사도행전1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구브로에 가서_사도행전13:4’

이 말씀은 여러 가지 상황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전략적으로 두 사람을 통해 전도여행을 가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지난주에 살펴본 안디옥교회의 상황이 배경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교회가 올바른 교회로 세워진다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이루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동기로 교회의 전략을 짜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인 성도가 주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변화되어지고 모인다면 당연히 성령의 보내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가 끝날 때마다 파송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매주 순례자의 인생입니다. 순례자의 발걸음입니다. 매주 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현장을 보았다는 것이며, 그 현장에 대한 답을 말씀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나바를 그리고 바울을 그리 준비시키시고 보내셨습니다. 저는 정말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매주 예배가 끝나면 말씀으로 서로 포럼하고 각자의 현장으로 파송되는 응답을 꿈꾸고 있습니다.

 

2. 유대인 거짓 선지자_사도행전13:6-7

 

바나바와 바울은 구브로 섬의 첫 번째 기항지인 살라미를 떠나 그곳에서 약 180Km 떨어진 서쪽 항구 바보로 갔습니다. 바보에는 구브로 섬을 통치하는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고, 당시의 총독은 서기오 바울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그곳에서 유대인 마술사 바예수를 만났는데, 그는 총독의 최측근이었습니다. ‘마술사라 번역된 헬라어 '마고스'는 박사, 마법사, 무당, 점성술사 등의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바예수는 마술을 행하면서 점을 치는 일종의 점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시대를 호령하던 로마총독의 옆에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그를 거짓선지라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자칭 바예수라 하였습니다. 바예수는 여호수아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 구원자의 아들이라고 사칭하던 인간입니다. 권력자인 총독이 그를 옆에 두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최첨단 시대인 지금도 선거철만 되면 유명한 점쟁이 집은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그뿐 아니라 대기업이든, 유명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모두 점쟁이를 가까이 합니다. 이것이 구브로의 문화였고, 지금 대한민국의 문화이기도 합니다. 아마 여러분의 삶의 터전에 계신 불신자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미래가 불안하고 영원한 세상을 알지 못해 점쟁이를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그가 총독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_사도행전13:6-7’

 

 

3.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_사도행전 13:7

 

본문에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 지혜 있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지혜는 아닐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다()신을 섬겼고, 구브로 역시 온갖 잡신을 섬기는 우상의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 들어나 보자 이런 지적 호기심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기야 어떻든 상관없이 바나바와 바울은 총독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얼마나 기쁨이 컸을까요? 바로 그 일을 위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기에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우리 현장이 그런 현장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왔을 때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갑자가 복병이 나타났습니다. 그 복병은 다름 아닌 거짓선지자 바예수입니다.

 

이 마술사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_사도행전13:8’

 

엘루마는 마고스의 외래어 곧 헬라어였습니다. 자신을 과신하기 위해 외래어까지 동원해서 자신을 높였습니다. 그런 그가 총독에게 말씀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유는 결코 총독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이권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영적으로는 사단의 역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총독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고 있는 마술사는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 자들이 여러분의 현장에 얼마나 많은지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족, 복음듣기로 준비된 영혼들이 모두 그들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를 주목하고_사도행전13:9-12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즉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 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_사도행전13:9-12’

바울이 그를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를 영적인 힘으로 꺾어버렸습니다. 방금 전까지 구원자 예수를 사칭하던 그가 자신을 인도해줄 사람을 찾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사단을 섬기고, 사단에게 사로잡힌 자들은 결국 이렇게 됩니다. 그들이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듯하나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목격한 총독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증거를 주신 것입니다. 증인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바울이 성령이 충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굉장히 추상적입니다. 거룩하게 살거나 헌금을 많이 하거나 예배를 빼먹지 않는 것이 성령충만이 아닙니다. 성령은 누구에게나 함께 하십니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10년이 넘는 동안 그의 고향 다소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두고 수도 없이 도전하고 또 도전하여 오늘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유대인인 그가, 핍박자였던 그가 수도 없이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어 그리스도인으로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기까지의 과정이 오늘 본문에 비로소 들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육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충만하기 위해 13년동안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가 총독을 살리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더불어 점쟁이 손에 갇힌 총독의 영혼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지니고 있음이 곧 성령충만일 것입니다. 저는 일주일을 살면서 저 사람이 안타깝다는 마음이 항상 들지는 않습니다. 그 마음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 삶의 현장으로 파송 받아야 할 것입니다.

 

1. 삶에 대한 성령충만

 

오래전에 신문에 실린 모 그룹 회장에 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산부인과 의사였던 그가 그룹의 대표로 취임하여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만약 우리 그룹이 없어진다면 이 사회가 대체 무엇을 아쉬워할까?’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그룹이 존재하는 이유를 명확히 안 것입니다. 기사는 그런 그의 질문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그 질문이 아직도 뇌리에 있을 만큼 오래 동안 저의 질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써 많은 고민을 해야만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은 안디옥교회의 파송된 제자라는 것은 그들 역시 오랜 시간 말씀으로 삶을 변화시켜 그들 고향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만큼 삶에 대해 응답을 받은 제자라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쓰임 받은 삶인지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내 삶이 없어진다면 이 사회가 도대체 무엇을 아쉬워할까? 성령충만이라 함은 추상적일 수 있지만, 우리 가스펠 가족들은 이 질문으로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내 삶이 없어진다면 이 사회가 대체 무엇을 아쉬워할까?’

 

2. 그리스도인의 성령충만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인인 저와 여러분이 이 사회에서 없어진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도 교회가 필요 없다고 하는 저들의 외침에 단순한 조직체인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한 우리에게 책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성령충만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교회 다니는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인 내가 없어진다면 이 사회가 대체 무엇을 아쉬워할까?’

 

3. 가스펠교회의 성령충만

 

오늘 말씀의 결론은 안디옥교회처럼 성령충만한 가스펠교회가 되고자 하는 비전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작은 가스펠교회가 이 사회에 주님의 사랑과 생명의 말씀, 즉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통로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각자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경우 세상이 무엇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지닌 사람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음을 세상이 아쉬워하는, 그런 사람이 되길 원치 않으십니까?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 없어질 경우, 세상이 무엇을 아쉬워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교회가 없어짐으로 인해 세상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말씀이 전달되는 그리스도인이 모이고 파송되는 것을 볼 수 없음을 아쉬워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는 바울과 같은 전도자가 되도록 오직 말씀과 기도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우리의 현장에서 주님의 사랑과 생명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스펠교회가 없어진다면 이 사회가 대체 무엇을 아쉬워할까?’

 

주님 주님의 방법이 지금 내가 있는 나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응답받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곳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성령충만함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보게 하시고, 살리게 하옵소서. 우리가, 우리교회가 이 땅에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