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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주일 1부 예배


2015-11-15 주일 1부 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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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_마태복음12:18-21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_마태복음12:18-21’

어제는 프랑스 파리에서 큰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무고한 시민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테러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입니다. 그 일에는 사람들이 무관심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가정의 파괴로 고아가 된 아이들입니다. 어제 강남 보육원에 다녀왔습니다. 가서 보니 전부 물질적인 도움을 주면 끝이라 생각하고 그저 물품을 구입하여 보내고 생색내는 사람들뿐이랍니다. 그 아이들을 사랑해주고, 섬겨주는 단체가 없다 합니다. 교회들도 그런 식으로 온다합니다. 예산을 편성해서 돕고 마는 것입니다. 그거라도 있으니 감사하지만, 그 아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왜 존재할까요? 교회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이미 교회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교회를 다니면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아서 그런지 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목사로써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는 솔직히 마음이 무겁습니다. 과연 교회를 이방인들이, 불신자들이 교회를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바랄까? 그들이 그리스도인을 바라보면서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신다는 데 우리는 과연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Ⅱ. 계속 되는 악순환

1.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_마태복음27:27-30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_마태복음27:27-30’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되는 악순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한번 거짓말을 하고, 한번 죄를 짓고 나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이야기를 했음에도, 분명하게 보여주셨음에도 예수님을 향한 모욕이 더 심해집니다. 보통 분노는 낮은 자존심이 원인이라는 주장이 학계의 정설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로이 바우마이스터 교수가 ‘위협받는 자부심 이론’을 제안하며 이를 반박했습니다. 그는 부모가 자녀를 오냐 오냐 해서 자녀들의 자존심을 키워 놓았더니,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거나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폭력을 휘두르더라는 겁니다. 히틀러나, 후세인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고등인종이라는 자부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모욕과 조롱을 당하면 뚜껑이 열립니다. 그래서 너 죽고 나죽자고 달려듭니다.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의 계략에 백성들마저 그렇게 멈추지 못했습니다. 이젠 그런 분위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자신들이 심판자인양 흥분하였습니다. 교회에도 이런 분들이 종종 있지요. 마치 자신만이 신앙이 제일 좋고, 자신만이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내가 하면 성령의 인도고, 다른 사람이 하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남을 헐뜯고 비난합니다. 자신을 살리려고 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살리려고 진리를 외면합니다. 그 일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2. 계속되는 육신적인 일_마태복음27:32-36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가게 하였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나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_마태복음27:32-36’

그들이 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육신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신앙이 아니고 믿음이 아니고 육신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골고다에 세워야 하는데 그럴 힘이 없어 보이니 모든 것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이익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멈추지 못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육적인 수단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주의를 끌어 교회에 오면 그 사람들을 묶어두도록 더 육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사람들이 아닌 육신적인 자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떻게 되지요?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참으로 그리스도를 원하고 그분으로 변화되길 원하고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집니다.

저는 그것이 목회자의 죄라 생각합니다. 회심한 사람들, 거듭난 사람들 그들은 예배를 원하고, 은혜를 원합니다. 변화를 원합니다. 한명의 청년이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저의 설교를 듣는다 합니다. 살 것 같다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닙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 교회는 말씀을 전하지 않나요? 아니랍니다. 지금 이런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매끄럽게 부드럽게 일이 잘 진행되는 것이 중요한가요? 그러면서 우리는 수많은 영혼들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두고 봅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아닌 육신적인 것을 주려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3. 죽음의 십자가_마태복음27:39-42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_마태복음27:39-42’

예수님은 죽음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구약 성경 내내 예언된 말씀입니다. 그들이 그 말씀으로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예수님은 그 말씀의 성취자셨습니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었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인내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견디고 참는 것도 싫습니다. 쾌락과 순간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필리핀에 갔더니 스타벅스에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다 가난한 줄 알았더니 이렇게 비싼 커피를 어떻게 마시나 생각했습니다. 유학하는 친구들이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들은 어차피 돈을 모아도 희망이 없으니까 그날 벌어서 그날 쓰는 것이 문화라고 합니다. 늘 제도 탓만 하고, 부모 탓만 하고, 자기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나 신세한탄만 하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 탓만 하지 세상의 빛으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교회가기 싫습니다. 아니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들어야 구원을 받든지 말든지 하지요.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든지 말든지 하지요. 그 과정을 다 생략하고 그저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려는데 어떻게 하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제일이라고 해놓고 뒤에서는 쾌락을 탐하고, 온갖 종류의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재앙이 왔을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재앙이 왔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수도 없이 말씀하셨고, 수도 없이 그들을 용서하시려고 인내하셨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Ⅲ. 생명의 십자가

1. 죽어야 사는 십자가 신앙_마태복음20:25-28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_마태복음20:25-28’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죽어야 하는 십자가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려면 반드시 자아가 죽어야합니다. 그 안에 비밀이 있습니다. 죽음의 십자가처럼 보이지만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아는 성도는 다릅니다. 왜 말이 많은지, 왜 다툼이 많은지 십자가를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전에 정말 어려운 지역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과 하루 밤을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환경이 너무 좋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질문을 한 가지 했습니다. ‘선교사님, 이곳에서 사역하면서 뭐가 제일 두려우세요?’ 제가 거기에 하루 밤 머물면서 모든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질문을 한 것입니다. 선교사라는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위험하기도 했고, 너무 고달프기도 했고, 질병의 위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선교사님의 답변이 늘 마음에 있습니다. ‘질병의 문제, 목숨의 문제, 심지어 경제문제 그런 것은 선교사로 떠나올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준비시켜주셨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단 한가지만큼은 너무나 두렵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때가 가장 두렵습니다.’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두렵다는 말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해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주님의 임재가 떠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실제로 목회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대상은 주님의 임재가 떠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모르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은밀한 죄, 혈기, 미움, 싸움, 거짓말 등을 함부로 합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고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임재가 떠나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임재가 언제 임할까요? 십자가의 사랑, 그 은혜를 알고 자아가 죽을 때 임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노회에 참석을 합니다. 노회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참석하는 곳이라 전혀 싸울 일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치고 박고 싸우지 않았지만 얼굴이 벌게지고 고성이 오가고 삿대질을 하고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다툼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렇게 싸우다가 목사안수식이 중간에 있는데 목사 되는 분들의 가족들이 오고 안수식을 할 때 다 같이 찬송도 부르고 주여 하고 기도도 하고 안수도 하고 후배목사들에게 복음을 위해 살라고 설교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수식을 끝내고 또 모여서 회무처리를 하는데 또 싸웠습니다. 저는 속으로 눈물이 나왔습니다. 저만 은혜 받느냐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지식적으로 압니다. 실제적인 체험이 없습니다. 아니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가족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고, 그러면서 관계가 회복되길 바라고, 그러면서 내 사업과 학업이 잘되길 바랍니다.

2. 예수님을 믿는 이유_마태복음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_마태복음23:37-39’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걸 모르기 때문에 육신적인 방법만 계속 바꾸어가면서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어리석었던 것은 그들이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억울했겠지요. ‘하필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선택해서 이렇게 예배만 드리고 살아야해? 이렇게 말씀 안에서만 살아야해? 답답해.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답답해.’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몰래 재물신을 섬겼고, 세상의 쾌락을 탐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내가 잘못하면 그런 목회자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전혀 삶에 감사가 없고, 찬송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 수도 없이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은 천국을 믿는 다는 말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밖에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부활도 믿는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삶이 어떻게 바뀌겠습니까? 그걸 모르고 교회를 다니니 결국 찾아오는 영적인 공허함은 해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진실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분명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신앙생활을 하게 될까요?

3. 십자가를 따르는 신앙생활_마태복음13:44,22:29-32, 고린도후서5:13-19

십자가를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_마태복음13:44’

천국을 발견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이것은 여러분의 집과 재산을 팔아 헌금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비유입니다. 천국을 발견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_마태복음22:29-32’

그런 자들은 살아있는 자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삶에 죄가 있는데 죽어있는 사람처럼 괜찮으면 안 되겠지요? 내가 예배가 안 되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죽은 사람입니다. 살아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항상 살아있어야 합니다. 육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살아있는 사람은 늘 배가 고픕니다. 아프면 병원에 갑니다.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되면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예배를 늘 드리게 됩니다. 교회는 시스템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초대교회나 우리나라 초창기 때 시스템이 있었습니까? 오직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아 살아나니 그 사람 자체가 시스템이 되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삶이 변화되어 모여서 기도했고, 서로 섬겨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했습니까? 영원을 살렸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_고린도후서5:13-19’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 안에 모든 답이 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 삼으셔야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세요. 우리 삶에 예수님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지요? 그러니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육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멈추십시오. 여러분 삶을 세상에 맡기지 마세요. 말씀에 맡겨야 합니다. 연약한 자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교회는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죽는 것 같으나 절대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십자가를 지셨으나 어떻게 되셨지요? 우리는 그 비밀을 가졌기에 우리 삶에서도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내 가정을 살릴 수 있고, 내 현장을 살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요? 그런 자들이 있을 때 교회는 살아날 것입니다. 목회자가 제일 먼저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중직자가 먼저 그래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살리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 참된 감사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참 감사한 날에 이웃을 도울 수 있는 바자회를 개최합니다. 우리가 죽어 저들을 살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주님 이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 교회들을 바라보고 구원의 소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태 육신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었고, 육신적인 방법으로만 교회를 운영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육신적인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들이 죄를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의 십자가처럼 보이지만, 결국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십자가임을 깨닫게 해주세요. 그 십자가를 붙잡고 우리의 작은 삶의 살아 불신자들에게 구원의 소망이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세요. 그렇게 십자가 인생은 얼마나 복된지 알 수 있도록 오늘 우리의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