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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주일 2부 예배

< 주일 2부 예배 >

일시:  2014년 2월 9일

제목 : 기적의 시작

말씀 : 사도행전 3 : 1-10

설교 : 오승주목사



2014-02-09 주일2부예배.hwp



아래 링크를 통해 음성 파일을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db.tt/NMFYJjcu


아래 링크를 통해 영상으로 메시지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http://youtu.be/ZRZnXCx05Jc


오전예배는 여호수아, 오후 예배는 사도행전, 금요예배는 시편을 통해 인도 받고 있다. 시간이 나면 말씀을 미리 읽어보고 인도받으면 좋겠다. 이제 교회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말씀에 예민하고 저 부터도 민감하다. 설교를 많이 준비하다 보니 헷갈리는 것도 같다. 말씀을 준비하고 자다 새벽에 일어났다. 사도행전 말씀은 저에게도 꿈이고 비젼이다. 제 안에 그런 사모함이 있는 말씀이다. 오후 예배를 놓치는 분들이 있다면 이 말씀을 놓치지 않고 인도 받을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Ⅰ. 우리 삶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가?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묵상을 했다. 제목을 정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런 기적을 포기하고 살아갈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이야기를 하면 고등학생 때를 이야기 한다. 많은 친구들을 전도하고 병원전도를 통해 말씀을 전하던 기억이 가득하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없어졌다. 그런 현장을 사모하고 있다. 그래서 행정적인 마무리 이후 심방을 하면서 이런 응답이 일어나기 기도한다.

이것을 포기하고 살게 되면 성령께서 역사하실 이유가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사실 이 당시 초대교회는 그 시대 그 지방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지금처럼 교회가 이상한 문제를 일으켜서 나타나는 관심이 아니다. 싸움을 통해 나타난 이슈가 아니다. 완전 뜨거운 관심사였다. 사람들이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진짜 부활 하셨데, 예수가 그리스도래. 저 사람들을 봐, 얼굴이 저렇게 밝아졌다. 핍박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소문들이 돌았을 것이다. 그들의 삶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기도 하고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단지 말씀을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회개 했을 뿐이다. 하나님 말씀을 나누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역사들이 일어났다.

Ⅱ. 앉은뱅이가 일어나다.

1.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앉은뱅이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가? 어떤 기적을 소망하고 있는가? 지난주 나눔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것이 진짜 기적일 것이다. 오늘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첫 개인 사역이다. 그런데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이다. 절망 속에 빠져 있던 앉은뱅이이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그런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은 두 다리로 걷게 만드셨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슬픈 운명이고 안타깝다.

저는 3세계 현장에 가서 그런 아이들을 보면 처음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여기 태어나지 않은 것에, 내 자녀가 아닌 것에 감사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안타까웠다. 앉은뱅이도 그런 운명인 것이다.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늘 누군가에게 부담인 인생이었다. 누군가를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절망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성전 미문에서 멀쩡한 사람들이 지나는 것을 보며 열등감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부모를 원망했을 것이다. ‘왜 나는 앉은뱅이로 태어낫는가’라고 분노가 가득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열등감과 분노가 남도 사랑할 수 없게 했을 것이다. 우리도 그런 분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피해의식을 가진 앉은뱅이가 인생의 목적도 없었을 것이다. 대충 굴러가는 대로 살았을 것이다. 게으르고 나태한 인생을 살아도 누구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무슨 행동을 해도 저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인정했을 것이다. 자기 자신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앉은뱅이를 조명하면서 왜 하필이면 초대교회의 첫 개인 사역에 하나님이 앉은뱅이를 만나게 하셨을까 생각해 보았다. 멀쩡한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에게 하는 말씀일 것이다. 제 모습을 보았다. 나는 영적인 앉은뱅이가 아닌가? 나는 앉은뱅이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모든 사람들이 영적인 앉은뱅이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결코 빠져나가 힘이 없다. 그래서 겨우 할 수 있는 것은 구걸해서 입에 풀칠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분노도 원망도 참았을 것이다. 철학, 종교, 정치, 교육이 앉은뱅이를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런데 영적인 것은 더욱 그렇다. 영적인 앉은뱅이는 다른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포기하고 살았다.

새가 하늘을 날아야, 물고기가 물속에 살아야 행복하도록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야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는데, 하나님을 떠나서 저주, 재앙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모습을 보면서 꼭 광야의 백성처럼 영적인 앉은뱅이가 아닌데 영적인 앉은뱅이처럼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정말 그리스도를 만나면 꿈이 생기고 비전이 생기고 새 삶이 시작된다. 절망 속에 빠진 앉은뱅이, 벗어날 수 없는 인생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베드로와 요한이 찾아왔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지만 중요한 것이다. 고등학생 때 병원에 가서 수백명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중 복음을 듣는 사람은 소수이다. 그 소수를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_사도행전4:2’

2. 벗어날 수 없는 인생

질병, 사업의 어려움, 관계문제, 상처 때문에 주저앉아 벗어 날 수 없다고 은연중에 마음 깊은 곳에 앉은뱅이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은 분명히 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받아들일 때 변하기 시작하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운명, 사주, 팔자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변화될 수 있다.

저는 복음을 받고 생각도 바뀌었다. 마음도 바뀌고 성령이 임하니 제 환경, 상황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바뀌었다. 우리는 원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도 모르게 세상 풍조를 따라 살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그렇게 사는 것을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앉은뱅이가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인 것이다.

오늘 가스펠교회의 가족 여러분은 여러분을 살린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기 바란다. 그리스도를 인생의 중심으로 모시기 바란다. 매일 해야 한다. 저는 아침마다 고백한다. 오늘도 내 삶에 오셔서 내 주인이 되어 주시고 오늘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다. 오늘 그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기 바란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_에베소서2:1-2’

3. 절망에서의 구원

절망 속에 빠져있는 앉은뱅이가 구원을 받게 된다. 구원의 역사는 반드시 사람을 통해 일어난다. 그것이 미련한 전도의 방법이다. 앉은뱅이가 구원을 받고 다리가 나은 것 뿐만 아니라 인생의 문제가 해결 된 것이다. 얼마나 기뻤는지 쉴 새 없이 걷고 뛰었다. 인생의 문제,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된다. 성령이 임하면 남에게 부담 주는 인생이 하나님께 찬양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된다. 과거에 메이지 않기 바란다. 과거의 상처가 여러분을 옭아매지 않기 바란다.

이런 사역이 초대교회만 가능한 것인가? 길거리에 있는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성경은 그런 걸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지금도 이런 기적은 가능하다. 영적인 앉은뱅이와 같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면 살게 된다. 그것이 기적중의 기적이다. 그것이 반드시 베드로와 요한처럼 그리스도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앉은뱅이를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바란다. 우리 주변에 영적인 앉은뱅이, 불신자들이 있다. 답도 모르고 이유도 모른다. 왜 불화가 계속되는지 모른다. 마치 이 앉은뱅이와 같다. 희망이 있는 것 같으나 희망이 없다. 저와 여러분이 여기서 벗어나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한다.

Ⅲ.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으로 바뀌다.

1. 기도의 사람

사실 앉은뱅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다. 어찌 이들이 이렇게 변화되었는가? 예수님을 부인한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화되었는가? 제가 입장을 바꿔서 보니 3천 제자가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인데 구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가는 모습에 놀랐다. 제 9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간 것은 유대인의 전통이다. 하루 세 번 의무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유대인의 전통이다. 오후 세시에 기도를 해 본적이 있는가? 저는 해 본적이 없다. 다들 그 시간에는 일을 하고 있다.

지역별로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예전에 스페인에 갔을 때 오후 2시 3시에 낮잠을 자는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에 기도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다. 이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3천명의 사람들이 돌아오게 한 대단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고 두려워했다. 그런데 교만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기도생활을 지속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면 우리는 뜨겁게 신앙생활을 한다. 그 성령이 식어서 신앙생활이 멈추는 사람을 보았다. 우리 입장에서 신앙생활은 ‘기도생활이 되고 있냐, 되지 않고 있냐’ 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기적은 아무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가’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가’ 이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이 사도행전 1, 2장 역사 속에서 3장을 시작하면서 굳이 제 구시 기도시간에 라고 하셨을까? 여러분은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가? 세상을 살며 어려움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는가? 기도생활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가능하다. 부지런해야 할 수 있다. 영적으로 게으르면 할 수 없다. 성경이 기도에 관해 얼마나 이야기 하는지 알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기적을 준비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의 미래는 항상 영적인 사건이 예비 되어 있다. 그래서 영적인 흉년의 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로 하나님이 준비시키신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이다. 남들이 볼 때는 운이 좋아 보일 수도 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로 준비하고 있었음을 아신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사건을 주시고 기적, 응답을 주신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응답되는 일일 뿐이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_사도행전3:1’

이 말씀을 듣고 떠올라야 하는 것은 ‘나는 언제 기도하지?’이다. 그리고 이를 미션홈에서 나누어야 한다. 그게 묵상이다. 안되는 사람은 도와야 한다.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2.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

역사가 일어나는 사람일수록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데 제 경험에는 이상하게 그렇지 않다. 그 분위기에 취하게 된다. 제가 그랬다. 남이 알아주고 역사가 일어나면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 생색을 내게 된다. 내가 열심히 했더니, 기도했더니, 하고 이상하게 정죄가 나오게 된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전체를 보려 한다. 무엇보다 기도의 시간을 가지고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사역을 하면서 역사가 일어나면 흥분하여 성령의 인도를 못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오늘 기도하러 올라가는 장면은 귀한 장면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니 기도하러 가다가 앉은뱅이가 보이는 것이다. 늘 보았을 텐데 오늘은 달리 보인 것이다. 과연 베드로와 요한이 그 전에 앉은뱅이를 보지 못했을까? 늘 보았을 것이다.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라면 직장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 중에 앙숙이 사람들이 있는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 구원의 계획 속에 있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것이 달라져야 한다. 기도의 사람은 다르다. 매일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은 생각, 행동, 말이 다르다. 주변의 전도대상자를 두고 기도하고 있다면 반드시 시간표가 보일 것이다. 문이 열리지 않고 역사가 없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못 받고 있다는 말이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_사도행전3:4-5’

앉은뱅이는 생각지도 못했다. 동전이나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줄 것이 생긴 것이다. 성령을 체험하고 말씀을 청종하고 인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을 소유했다. 그래서 사도행전1, 2장의 말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누구를 만나도 그 만남에서 이 생명을 줄 수 있을 것이다.

3. 복음의 사람

베드로는 돈 몇 푼을 주는 사람이 아닌 복음의 사람이었다. 복음을 선포했다. 그 말은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교회는 돈 몇 푼을 주는 곳이 아니다. 우리도 이런 사역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앉은뱅이처럼 은과 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참 착각한 것이다. 교회는 돈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복음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는 사람이 필요하다. 돈에 노예가 되어 우정, 사랑도 팔고 노예가 되는 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도 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초대교회 이후 복음화가 끝나고 중세시대가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신학자가 이렇게 썼다. 초대교회 때는 은과 금은 없어도 걸으라고 선포할 만한 능력이 있었지만 오늘날 은과 금은 우리에게 있지만 나사렛 예수의 능력은 잃어버렸다고 썼다. 초대교회가 얼마 지나지 않은 시대이다. 꼭 지금과 비슷하지 않은가?

가난하고 힘든 사람에게 돈을 주면 해결이 되는가? 앉은뱅이에게 돈을 주면 그 날은 행복할 것이다. 순간적으로 감사도 회복되고 성령이 충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날 또 구걸하러 나와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핵심사명인가? 교회는 자선단체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곳이다. 현장, 가정,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우리가 교회인 것이다. 이 사명이 방해된다면 다른 것을 하면 안된다. 자선사업도 해서는 안되고 NGO사역도 하면 안된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하지 못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돈을 주면 가난한 사람들이 해결되지 않는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구걸하는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지게 된다.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저는 겉으로 신경 쓰는 척 하지만 가족들의 문제에 걱정이 되지 않는다. 남들이 저에게 2년만 지나면 마흔 살이라고 한다. 저는 안타깝지 않다. 솔직히 빨리 가고 싶다. 천국에 가기 때문이다. 제 진짜 신앙은 그렇다. 저는 이 사역이 복음 때문에 즐겁지만 진짜 행복하지는 않다. 진짜 행복은 은혜 받을 때이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가. 이 천국을 모르고 지옥으로 가게 될 영원한 앉은뱅이가 될 가족들, 3세계, 소외계층 때문이다. 우리가 그래서 나그네 길을 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물댄 동산과 같다고 한다. 하나님을 만나면 완전 다른 삶이다. 영적 축복이 있는 삶이 된다.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선포할 수 있기 바란다. 복음을 전해주라는 말이다. 낮아짐으로, 섬김으로 겸손으로.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서 해야 할 유일한 사명이다.

‘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_사도행전3:6

Ⅳ. 영적인 부흥의 시대가 도래하다.

저는 사도행전 2장까지가 부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 때 비로소 영적인 부흥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작은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가스펠 교회 부흥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여러분이 이런 만남이 삶 속에 있을 때 시작된다. 교회가 프로그램을 통해 부흥하는 것이 부흥이 아니다. 이런 만남이 진짜 부흥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이다. 부모님, 친구, 좋은 상사,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만 통해서도 어두운 인생이 변할 수 있다. 저는 전도자를 만난 것이 정말 감사하다. 전도자를 만나 그 길을 따르는 것을 정말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제 모교회에서 박이석 목사님을 만난 것도 인생에 손꼽을 수 있는 감사한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 진짜 중요한 만남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근본을 바꾸는 만남이다. 저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인생의 가치관, 목표, 살아가는 이유가 바뀌었다. 저는 세상의 것에 관심이 없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면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 진짜 관심은 다른 곳에 있다.

오늘 앉은뱅이는 40세가 넘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뛰고 찬송하니 사람들이 놀랐을 것이다. 우리의 사역 속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앉은뱅이의 삶에서 일어나서 뛰고 찬송하며 간증하는 삶이 일어나기 바란다. 과연 이 앉은뱅이가 40년 동안 단 한명에게라도 소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소망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다.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이면 우울증, 불면증, 수많은 질병, 귀신이 쫓겨 나가는 역사가 일어나는 시대이다. 정말로 그렇다. 우리가 귀를 닫고 마음을 닫고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중국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제가 중국 교회의 금요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금요철야예배를 4시간을 드렸다. 2시간을 설교를 하고 2시간을 기도회를 했다. 제가 가서 특별히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매주 하는 것이었다. 그 속에 있는데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성도 한 명 한 명을 위해 기도한다. 심지어 한국에 있는 기관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정말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그러니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복음 받은 것이 너무 감사해서 복음 받은 날에 영적인 생일이라며 선교사님을 찾아왔다.

교회는 이 사역이 핵심사역이다. 이것 때문에 찬양도 하고 방송팀도 있어야 하고 제직회도, 공동의회도 해야 한다. 이 핵심사역이 없다면 나머지 것들은 필요 없는 것이다. 이 사역은 만남에서 일어난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초대교회는 이 사역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영적인 추수가 시작되었다. 이 영적인 추수를 준비하기 바란다. 그것이 기도생활, 성령의 인도, 복음의 역사이다. 영적인 추수꾼으로 살아가기 바란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냥 설교를 준비한 것이 아니다. ‘제 인생의 하프타임이 끝나고 후반전을 시작하는데 저를 만나는 사람이 생명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_사도행전3:10’

이런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_이사야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