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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8-07-01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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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1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나를 살리는 회개

본 문 :

마가복음 14:66-72

오승주 목사

 

. 소원이 아니라 은혜를 따라_시편1:1-6

 

지그 지글러가 기록한 정상에서 만납시다에서란 책을 보면 인생은 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서점에 나와 있는 수많은 성공학, 처세술, 자기계발에 관한 책들이 다 그런 맥락이며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책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지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은 정상이 보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끝이 안보입니다. 인생은 어느 것과 같습니까? 산은 대게 길이 정해져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길도 없습니다. 산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만 광야는 그렇지 않습니다. 산은 변하지 않을 수 있지만, 광야는 수시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산에 오를 때는 혼자가도 되지만 광야는 결코 혼자 갈 수 없습니다. 결혼하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대학에 합격하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이지만 대학생활은 광야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이지만, 키우는 것은 광야입니다. 광야를 산에 오르는 것처럼 사니 인생이 힘들고 너무나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왜 힘들었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도 세상에서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산에 오르는 사람들처럼 살려고 했습니다.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했습니다. 단체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목회도 산에 오르는 것이라 이해한 것입니다. 그것이 사탄이 목회자에게 주는 유혹인지 몰랐습니다. 목회는 광야를 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니 목사의 목표가 예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의 목적이 산에 오르는 것과 같으면 열심히 하면서도 마음은 메마르고 지치고 원망만 커지고 경쟁심과 교만과 열등감이 계속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의 목적이 예수님과 친밀해지는 것임을 깨달으니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광야는 혼자 갈 수 없습니다. 서로 도우며 함께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한 몸이고 천국까지 함께 가야할 이들인데 경쟁하면 되겠습니까? 정상에 먼저 오르려고 싸우면 되겠습니까? 인생은 성공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기다리며 매일 순종하며 묵묵히 광야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살기가 너무 힘들고 좌절감, 실패감, 열등감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광야를 걷는 것처럼 살아보기 바랍니다. 광야에서는 복을 구하지 않고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금은보화가 아니라 생수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집이나 은금이 증식되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는 만나를 내려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장마 비가 아니라도 이슬 같은 은혜에도 감사합니다. 인생이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발버둥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깨달아지면 왜 24시간 예수님과 동행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왜 성경을 반드시 읽으며 매일 묵상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왜 교회 공동체에 꼭 속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왜 서로 말씀으로 사랑하고 은혜를 나누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간 길을 이해하게 됩니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전부 자기 생각이 맞고 자기 경험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광야를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전부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옳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옳다고 고백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_시편1:1-3’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따라, 우리의 소원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천국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천국이신 주님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놀라운 것은 교회에서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목적을 달성하거나 달성하지 못하거나 그렇게 교회를 떠납니다. 그 이면에 무서운 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데 만나지 못하고, 천국을 봐야 하는데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지식이 되고 관념이 되어버렸습니다. 다들 천국 따위라고 생각합니다. 천국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천국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광야를 지나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광야를 굳이 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매주 예배 드릴 이유도 없고, 말씀을 따라 살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저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면 더 이상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고, 대제사장들의 무리들이 그랬습니다. 신앙은 소원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어쩜 이것이 이렇게 어려울까요? 사탄이 이것만 결사적으로 막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다윗은 광야를 거쳐 진짜 복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_시편16:2’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그 은혜를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 베드로보다 못한 나

 

여종 하나가 와서_마가복음14:66-67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_마가복음14:66-67’

 

예수님이 잡히니 여종까지도 힘을 얻어 기세가 등등합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받지 못한 그들은 그저 수군거리기 좋아하고, 소문을 퍼다 나르기 좋아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등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일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인지 묵상하지도 않습니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삶에 묵상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살던 대로 살아갑니다. 왜 속국이 되었는지, 왜 자기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사는지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교지도자들이 만든 거대한 헤롯 성전이 마치 자기들의 신앙인양 착각하며 사탄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여종이 베드로를 지목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입니까? 그래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지 않고 그를 멀찍이 에서라도 지켜본 수제자 베드로 아닙니까? 그런 그가 당황합니다. 순간 믿음이 아닌 예수님을 부인하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왜 베드로가 중요한 순간에 당황했을까요? 그의 삶에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없었고, 그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지 않고 졸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저와 여러분에게 그런 순간이 얼마나 많을까요?

 

2. 베드로의 부인_마가복음14:68-70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_마가복음14:68-70’

 

베드로는 그 여종과 사람들을 피해 앞문까지 피해갔습니다. 자리를 신속하게 옮겼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주님께 피해야 하는데 베드로처럼 세상길로 피할 생각만 합니다. 위기만 모면하려고 합니다. 그게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이 더 커보였기 때문입니다. 고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지요? 다른 여종이 와서 더 무시합니다. 이 여종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말합니다. 갈릴리 예수보다 더 비천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순간의 위기를 위해 믿음이 아닌 선택을 하면 더 잘될 것 같지만 무시를 받습니다. 거기서도 베드로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보고 그 사람이라니요! 예수님을 무시하는 세상에 동조해 베드로마저 엉겁결에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두려울까요. 네 그럴 만도 합니다. 광야를 가야 하는데 산에 오르려는 습관 때문입니다. 정상을 가지 못할까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내가 복된 자인데 전혀 당당하지 못합니다. 비위맞추고 불신자처럼 생색내고 있으니 매력도 없고 무시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저 여종에게 무시 받을 자가 아니잖아요. 수제자인데 어떤 매력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끄럽기만 합니다.

 

3. 저주까지 하며 부인한 나_마가복음14: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_마가복음14:71’

 

이제는 그들이 베드로의 말투를 보고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아차립니다. 다시 말해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거기서라도 사실대로 고백해야 할 텐데 이제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그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에이 목사님 우리가 이렇게 까지는 안 합니다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습니다. 말로만 저주하지 않았고, 맹세하지 않았지 제 삶에 그렇게 살았던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우리는 쉽게 예수님을 배신하고, 쉽게 예수님을 모른 다 맹세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이 만든 산의 정상에 오르려고 예수님을 외면하고, 예수님이 오실 가나안을 외면하고 살잖아요. 그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을 무시하고 살잖아요. 내 것을 잃어버릴까 조마조마하며 살잖아요. 세상에서 외면당할까 그것을 두려워하며 살잖아요.

. 나를 살리는 회개_마가복음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_마가복음14:72’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러니 그가 돌아설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부인했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그렇지요? 그것이 생각났습니다.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냥 울지 않았습니다.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를 변화시키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언제 그런 회개가 될까요? 말씀이 기억날 때입니다.

 

1. 사랑의 중보_이사야60:2,53:4

예수님이 지금도 사랑의 중보를 하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선택하셨습니까? 왜 그 길로 가야만 할까요?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_이사야60:2’

 

어둠이 땅을 덮었기 때문입니다. 캄캄함이 만민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뭔가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한다 해도 마다하고, 축복한다 해도 마다합니다. 그저 광야생활이 매력이 없어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저 산꼭대기 정상에 올라야 속이 시원합니다. 교회도 그렇게 타락했습니다. 성전하나 지으면 또 뭔가를 만들어냅니다. 그거 만들어서 성도들 으쌰 으쌰 해야 합니다. 그거 안하면 프로그램 좋은 데로 가버릴까 목사들도 두려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신을, 세상을 거대하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둠이 덮은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_이사야53:4’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어서 우리의 죄악을 위해 죽으시는데 그것을 저주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그렇습니다. 그 여종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사장, 서기관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 때문이라 칩시다. 여종이 뭐가 잃을 것이 있다고 예수님을 그렇게 욕되게 했을까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고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종도 사랑하셨습니다.

 

2. 은혜의 싸움_요한복음8:32,1:9,1:5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_요한복음8:32’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도록, 끊임없이 진리를 전하도록 교회와 성도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_요한복음1:9’

무엇이 진리입니까?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진리입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진리 하나만 깨우치면 될 텐데 그걸 모릅니다. 왜 광야를 가야 합니까? 이 예수님이 오시는 땅, 가나안을 바라보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세상에서, 교회에서 광야를 살아내는 것은 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이 빛이 우리 자녀에게 임하도록, 이 빛이 세상에 임하도록, 이 빛이 교회에 임하도록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_요한복음1:5’

어둠을 주고, 캄캄함을 주는 존재가 있습니다. 마귀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마귀의 종노릇하고 살았더니 빛이 비추니 너무 밝다고 치우라 합니다. 여종에게 빛이 비추는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 치우라 합니다. 심지어 빛과 함께 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외면합니다. 다 어두우니, 다 죄인들이니, 다 타락하니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 길인지 분별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싸우셨습니다. 그들과 같이 칼과 총으로 싸우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셨습니다.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우셨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을 은혜라 합니다. 우리는 은혜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3. 믿음의 반격_누가복음22:61,갈라디아서2:20,베드로전서5:7-9,시편1:1-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_누가복음22:61’

 

이제 우리는 믿음의 반격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냥 죄에 속수무책 당하라고 십자가를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세상의 논리와 이론에 살아가라고 말씀을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누가복음에도 나와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 했습니다. 베드로를 보셨다 했습니다. 예수님이 정신이 있으셨겠습니까? 심문을 당하고 사람들이 침을 뱉고, 손찌검을 당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멀찍이 따라왔던 베드로를 지켜보고 계셨다 합니다. 저는 예수님처럼 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성인군자라도 되면 좋은데 저도 마음이 이상할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이 왜 나한테 저렇게 하지?' 그런데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묵상하면 그 마음이 바뀝니다. 이상하지요? 성령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마음이 바뀝니다. 그 시간에 내 고집도 꺾이고, 내 자아도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은혜가 필요하고, 긍휼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말씀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보십시오. 그것을 두고 못내 마음이 아파 통곡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살려야 합니다. 어둠과 캄캄함에 있던 내가 예수님의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_갈라디아서2:20’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보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더 커 보이고, 육이 더 커 보인다고 죄가 더 대단하게 보인다고 말씀을 외면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지요. 부자 청년이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조금도 망설임 없이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_베드로전서5:7-9’

 

이 말은 십자가의 길이 진정한 축복의 길임을 분명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복 받으려고, 잘 되려고,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진정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니 이미 충분히 행복해진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사실 받을 축복은 다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영생을 얻었고, 죄 사함을 받았고, 의롭다 인정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이 마음에 오셔서 영원히 동행해 주시니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좀 더 가지고 사는 것은 주셔도 그만 안주셔도 그만입니다. 세상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기심과 욕심, 혈기와 음란함으로 인한 내적 고통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광야의 길,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은 몸도 온전히 변화되고 죄에 대하여 완전히 승리하려 거룩한 본성이 회복되는 날이 오기를 갈망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삶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가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부터 꼭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실 묵상의 시간을 가지셔야 합니다. 마귀의 일을 대적할 깨어있는 묵상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살리는 회개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 크게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었네요. 세상이 말하는 산의 정상에 오르면 그것이 행복인줄 알았습니다. 그 정상에 오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주님을 외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쩔 수없이 주님을 부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길을 가는데 거추장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세상이 너무 대단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잖아요. 지금도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정말 멋지고 아름답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돕고 계시잖아요.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우리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빛을 비추어주셔서 알게 해주셨습니다. 마귀가 주는 세상살이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깨닫도록 오늘도 말씀을 듣는 시간, 그 말씀을 내게 적용하는 시간을 통해 나를 살리는 회개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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