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
일시: 2014년 5월 30일
제목 : 영혼을 소성케 하는 말씀 묵상
말씀 : 시편 19 : 7-14
설교 : 오승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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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교회 금요예배 20140531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Ⅰ. 양치기 소년, 다윗
다윗은 어릴 때 양을 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낭만적일 듯하고 멋져 보일듯하지만 가장 힘든 직업이었습니다. 제가 살았던 시골집의 바로 옆에는 목장이 있습니다. 여름이면 벌레들과 냄새 때문에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목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소에게 메여 어디 놀러 가지도 못합니다. 소를 들판에 풀어 놓으면 피리를 불며 지낼 수 없습니다. 다윗의 직업은 누구든지 하기 싫어하는 그런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알았던 다윗은 그 현장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계획을 본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더 나은 생활을 원합니다. 더 나은 단계의 생활을 원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단계와 지금의 생활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희망적이고 꿈이 있는 것 같지만 현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우리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되었음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현장에서 말씀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생명을 살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기루를 쫒고 있습니다. 그것이 올바른 삶일까요? 저녁이 되면 집에 돌아가지만 하루 종일 중요한 일들을 할 때 그 일이 소중하기에 ‘집에 가야겠다’, ‘다 때려치우고 집에나 가야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녁이 되고 가야할 때가 되면 집에 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그런 곳입니다. 우리의 보금자리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과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외면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 곳에서 주님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꿈과 기도제목이 아닌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며, 소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생각과 삶을 바르게 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은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현장에서 구원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곳에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었지만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누린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하고 있으니 현장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대충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기독교인인척하고 신앙인인척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신기루를 쫒지 않고 지금 현장에서 하나님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평생 격정의 시기를 보내고 왕으로 험난한 언약의 여정을 가는데 큰 체험과 발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모하고 계십니까? 지 주님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있는 그 현장에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_시편78:70-72‘
Ⅱ. 그가 묵상한 하나님의 말씀
다윗은 어린 시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빠진다면 묵상이 아닌 명상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것입니다. 다윗이 어렸을 적에 누렸던,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때, 이제 막 주님을 만나 가장 행복했을 때 어떤 비밀을 가졌는지 봐야하겠습니다.
1.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
다윗은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인생이 흔들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의 사람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늘 신앙생활을 단계나 목표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적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대한 내 설계와 세상의 기준으로 짜인 그림 속에서는 말씀이 절대적인 답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무엇입니까? 말씀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말씀은 생명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소홀이 여깁니다. 아니, 믿지 않습니다. 그저 시간을 때우거나 혹은 한 구절 위로를 받으려고 읽는 좋은 묵상집 정도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이 내게 완전한 답이 되어야 하는 시간표가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 사단의 최대 전략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신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우리의 삶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사라지고 말씀이 끊어지면 개인도, 교회도, 시대도 어둠과 재앙에 덮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단순히 ‘주일날 예배드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도로 부름을 받은 저와 여러분이 말씀이 인생의 답이 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건입니다. 말씀이 들리고, 말씀이 사모가 된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다른 인생이 될 것입니다. 말씀이 완전하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십니까? 말씀 앞에 우둔함을 인정하고 말씀의 흐름 속에 우리 인생을 맡긴다면 지혜롭게 되며 마음이 기쁘게 될 것이며 무엇보다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_시편19:7-8’
2.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말씀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예배가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예배가 안되어진다면 말씀에 대한 답이 아직 나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답이 확실하다면 여호와를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_시편19:9-10’
다윗이 광야에서 아무것도 없고 지쳐 있을 때 송이꿀로 연명했습니다. 이 송이꿀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더 달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회사에서 승진하거나, 대학에 합격하거나, 어떤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 아닌 지금 당신의 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하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그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미래, 조건, 물질이 하나님 앞에 필요할 까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시고 다윗 역시 광야에서 훈련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어릴 적에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최선을 다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최고의 축복으로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승승장구할 수 있는 환경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광야생활로 이어졌습니다. 다윗은 그 광야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예배하였습니다. 그의 광야 초기의 시편은 전부 원망 같은 것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적들에게서 구원해달라고 하는 기도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고백은 주님 자체였습니다. 똑같이 어렵고 힘든 광야생활이었지만 고백이 달라졌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하시나요? 더 나은 상황일까요? 더 나은 자리일까요?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제가 원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당신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경배의 대상이 올바르길 원하십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럴 때 일어나는 기적들, 역사들은 흑암이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3. 말씀을 기준으로 사는 삶
그래서 다윗은 광야에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_시편19:11’
하나님 말씀으로 경고를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 오직 하나님께 상 받는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 삶이 얼마나 좋은지 아십니까? 저는 아직 완전하게 그런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순간순간 화나는 일, 잘 풀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속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제 삶이 바꾸려 합니다. 그전에는 제 삶이 제 것이었기 때문에 순간마다 화가 나고 속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 삶이 주님의 삶입니다. 그 때 오는 평안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대단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못 만나게 한다면 그것은 저주와 같습니다.
제가 가르쳤던 제자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그 친구가 모시던 교수님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450억짜리도 국책 사업도 따내고 사람도 좋고 완벽해서 그 친구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갈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말기 암으로 쓰러졌습니다. 제가 그 교수님을 만날 예정입니다. ‘당신 참 복을 받았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없어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면 어떠하겠습니까? 당신이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천국과 지옥, 영적인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지금 복음을 만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면 당신의 남은인생이 한 달이던 일 년이던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이 잘 바뀌지 않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준입니까? 그것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주님과 함께 하는 행복을 맛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식으로만 주님이 함께하시고 임마누엘이라고 하지만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평생 주님이 함께하는 진짜 행복을 맛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환경을 바꾸어야 하며, 늘 상황을 좋게 해야 하며, 늘 단계를 밟아 성공해야 한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조금만 더 모으면, 조금만 더 나아지면’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때 은혜 받을 것입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주변의 영혼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 기준을 찾으셔야 하고, 그 기준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가치 있게 됩니다.
Ⅲ. 다윗의 기도와 묵상
시편은 참 중요한 묵상입니다. 우리는 묵상을 오해합니다. ‘이렇게 해야 해, 저 사람처럼 해야 해, 저 방법이 좋아.’라고 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묵상을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환경이 다 다르니 묵상이 같을 수 없습니다. 묵상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말씀도 소중하고, 주님과 기도하는 것도 소중하고, 주님의 사명, 즉 우리에게 맡겨진 소임도 소중해 집니다.
1. 회개하는 삶
그래서 회개는 주님과 방향을 맞추는 것입니다. 방향이 틀렸을 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자꾸만 하나님의 방향과 다르게 가면 안 되니 하나님이 문제를 주셔서 회개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구원받기 위해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우리는 가난한 심령이 되도록 회개하는 삶이 되어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우리의 허물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말씀으로만 회개가 가능합니다.
저는 한국교회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사모하고 주님을 사랑해서 시작했는데 결국 시간지나 응답받고, 축복받아 대단한 자리에 대단한 사람으로 세워지니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려 하기에 문제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항상 가난한 심령입니다. 항상 죄인입니다. 우리는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우리의 허물을 회개할 수 없습니다. 말씀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경배의 대상이 바뀌면 안 됩니다. 회개하는 자가 없는 시대에 회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주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여 죄를 깨닫고 벗어나려 애쓰는 것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_시19:12’
2. 영혼을 소성케 하는 기도와 묵상
우리의 영혼이 소성케 되는 것은 기도와 묵상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해야 하는 것이 기도와 묵상입니다.
우리는 다른 동기와 목적 앞에서는 최선을 다합니다. 심지어 좋아하는 여자만 생겨도 그렇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_시편19:14’
우리 입술의 말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 입의 말이 곧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하루 종일 하는 말이 모두 기도인 것입니다. 저는 기도의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그런데 기도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아무도 모릅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드려지는 마음이 되기 위해 묵상하는 것입니다. 묵상의 목적은 나를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드리는 것입니까? 다 드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삶, 내 인생을 드리는 것이 묵상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지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안함이 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하고 계십니까? 왜 여러분의 삶에 평안, 감사가 없을까요? 우리 삶을 하나님 앞에 정돈하고 회개하기 바랍니다. 아는 척, 되는 척이 아닌 기도와 묵상이 시작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