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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4-06-08 주일 1부 예배

< 주일 1부 예배 >

일시:  2014년 6월 8일

제목 : 온유의 힘

말씀 : 마태복음 5  : 5

설교 : 오승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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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교회 주일1부예배 20140608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 온유의 오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 즉, 여덟가지 복중에 한국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오늘 나옵니다.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땅을 좋아 합니다. 부동산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땅은 가지고 싶지만 온유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에게 온유라는 단어 자체가 호감을 주지 못합니다. 온유라는 단어는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뜻합니다. 이런 성품의 소유자를 우리는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단정지어버립니다. 성격이 부드러워 남에게 싫은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해서 무슨 일을 맡겨도 안심이 안 되는 사람,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온유하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는 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사회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냉엄하게 적용됩니다. 이기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고 쟁취하지 못하면 가난한 자가 됩니다. 사람들은 남을 이겨야 내가 살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모르지만, 남에게 약하게 보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겉치레가 심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상처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부드러운 성격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후천적인 성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해주시고 애통하게 해주십니다. 그 후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형성시켜주시는 성품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래서 오늘 온유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가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어서 온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_잠언16:32’

 

. 온유의 힘

 

온유는 굉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떠들면서 인기를 끌었던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니체입니다. 그는 오늘 본문을 두고 예수님께서 말한 온유는 약자의 덕, 노예의 덕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면서 초인의 정신을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온유로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초인의 정신을 가져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상을 맹신했던 사람 중 한명이 히틀러입니다. 그는 광기어린 전쟁으로 파멸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남을 이기고 짓밟고 살면 행복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온유가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세상과 결별하여 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까? 온유해야 하기에 그냥 참고 살라고 하는 것입니까? 전 그것은 잘못 해석한 것이고 잘못 가르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로 사신 예수님은 인류를 사랑하셔서 희생하여 영원히 승리자로 경배와 찬양을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누구의 말이 진리입니까? 그렇다면 온유하다는 것을 무슨 말일까요?

1. 하나님 앞에서

 

내가 온유한지, 그렇지 않은 지는 하나님 앞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인물이 많지만 대표적인 인물이 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은 당시 동방의 최고 부자였습니다. 엄청난 재산, 10남매나 되는 자랑스러운 자녀들과 사랑스러운 아내, 남부러울 것 없는 생의 모든 즐거움을 다 누리면 살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완벽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도 아니고 아무런 원인이 없었습니다. 몸에 병까지 들어 가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기와조각으로 온몸에 피가 흐르도록 긁어야 하는 비참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하나님을 저주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였다고 했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항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_욥기1:20-22’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겉옷을 찢는 것은 유대인들이 회개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욥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의 온유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고개를 쳐들고 따지고 싶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개하는 자와 같이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이것인 진짜 온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크신 사랑으로 영원한 저주인 지옥과 죽음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인생이 되었는데 조금만 잘못되어도 하나님을 떠나거나, 종교를 바꾸거나 그럽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안다면 성실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소망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또 억만 죄악가운데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간 욥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욥이 온유할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잃은 것의 몇 배를 보상받았습니다. 결국 실패자가 아니요 승리자의 인생으로 하나님을 이처럼 섬긴 자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2. 사람 앞에서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향해 어떤 마음,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도 중요합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잘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대적하거나 비난 하는 자들을 대할 때는 어떻습니까? 그 마음가짐과 태도를 보면 그가 온유한 자인지 아닌 지 알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는 자신을 가리켜 온유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_민수기12:3’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 중에 가장 온유한 자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모세는 400년이나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서 수백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시내산까지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를 인도하셨기에 그의 권위는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과 누이인 아론과 미리암이 결탁해 백성들을 충동질하여 모세를 대적하고, 인신공격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에디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느냐?’ 성경은 그의 아내가 구스인이라 밝히는 데 구스인은 흑인입니다. 그래서 에디오피아의 혈통을 가진 것이라 추측합니다. 무려 수십년이 지난 이야기를 꺼내서 모세를 모함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어떻게 모세만 지도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만나를 주셨기에 저 사람 혼자 우리를 인도하게 둘 수 없다.’라고 선동하였습니다.

모세가 화가 날만 했을 것입니다. 형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모세 정도면 벌을 내리던지 복수를 하던지 했을 힘이 있었을 텐데 성경에 보니 그는 잠잠하였습니다. 한마디 대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이 불쌍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 무지한 백성을 살리는 것임을 알았기에 그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언약의 길을 가는데에 있는 사단의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모함하고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자손들을 저주하면서까지 심한 욕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꾸도 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목적이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목적이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그래서 스스로 온유한 자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3. 성령의 열매

 

온유라는 것은 스스로 참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도를 이야기하면서 온유를 거론하였습니다. 격렬한 분노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의 중간이 온유라고 하였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힘이 없는데 온유한 체 하는 것은 약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온유하다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나 어른이 온유하다 하면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직업과도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목사가 온유하다 하면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진에서 싸우는 장군이 온유하다 하면 감동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온유는 스스로 갖출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내가 약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해야겠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철저하게 나를 다스리심으로써 드러나는 것이 온유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은 온유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분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사람들이 나사렛 촌놈이라 조롱했지만 화를 내시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연약한 자를 도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는 화를 내셨습니다. 성전에 가서 예배드려야 하는데 그곳에 있는 장사치를 보고 화를 내셨습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보시면서 화를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온유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그들과 같이 사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온유할 수 있습니다. 그 온유는 때론 이상하리 만큼 복음을 위해 참고 견디며 절제하지만 때론 정말 이상하리 만큼 싸우고 분노합니다.

저는 늘 웃습니다. 그것이 온유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웬만하면 참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친구들이 때려면 맞았습니다. 제 몸에 싸울 줄 몰라서 그랬을까요? ‘나중에 저 친구들 전도하려면..’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데 지금 싸우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 이렇게 어린 나이에 생각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시잖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화를 낼 때가 있습니다. 렘넌트들이 답답하게 신앙생활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모욕 할 때는 화가 납니다.

이번 주에 선거가 끝났습니다. 사실, 저는 깜짝 놀란 것이 아직도 금품수수 같은 불법행위를 하는 정치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더 심했지 않습니까? 네거티브를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자리에 오르면 다 해결되기 때문에 법을 조롱하고 온갖 탈법행위를 저지르면서도 당선만 되라 하는 식의 풍토입니다. 저의 와이프가 특이하게 투표를 하였습니다. 저의 집 앞 횡단보도에 불법으로 선거유세차를 주차하고 유세하는 사람들은 찍지 않았습니다. 도로의 코너에 차를 세워 교통법규를 어긴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곳에 차를 주차하면 벌금을 내야 하는데 그분들은 몇일동안이나 그렇게 했는데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정치풍토를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젊은이들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계에 진출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만있거나, 침묵하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_갈라디아서5:22-23’

 

.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땅

 

온유의 시작은 가정에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사역자들이 하는 말이 결혼생활에 있어서 제일 어려운 문제가 부부사이에 상존하는 분노라고 합니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분노가 남편의 마음, 아내의 마음에 계속 떠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노를 얼어붙은 분노라고 합니다. 얼어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서로 날카로워지기도 하고 갈등이 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독한 말로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가정이 싸우고 깨지며 자녀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기도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온유이기도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마음에 모시어 자신들의 감정을 잘 다스려 달라고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이 평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복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가정에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거나 하나님 앞에서가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복음화가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주인으로 모시고 인도받는 사람에게 온유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그 온유는 남에게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아니고 내게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온유한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자녀입니까? 부모입니까? 오늘 말씀에 온유하면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시편 37편을 인용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편 37편을 읽으면 온유한 자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주시리로다_시편37:3-4’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_시편37:11’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 하나님의 선을 행하는 자, 하나님의 시간표를 먹을거리로 삼아 사는 자를 말합니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땅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인 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총이나 칼로 땅을 빼앗을 수 있겠지만 결국 스스로 몰락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유업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유업은 유산입니다. 상속받는 것입니다. 싸울 필요도 없고 빼앗을 필요도 없습니다. 남의 것을 탐낼 이유도 없습니다. 이 땅은 영적인 땅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하면 처음에는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경쟁에서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온유한 남편은 아내를 땅으로 얻습니다. 온유한 부모는 자녀를 땅으로 얻습니다. 온유한 목회자는 성도를 땅으로 얻습니다. 온유한 가정은 행복한 가정을 땅으로 얻습니다. 온유한 자가 되면 이 땅을 얻게 됩니다. 순교자들이 온유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성령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땅이 그들이 원한대로 복음의 땅이 된 것입니다. 정말 온유하면 심령에 기쁨과 감사의 땅을 얻게 될 것이며, 천국복음을 소유하였기에 초월된 자유를 땅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축복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을 비난하고 헐뜯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 온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여러분의 땅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교만한 자들이 결코 맛 볼 수 없는 방식으로 깊이 행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자에게 주시는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원래모습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시 자신을 위해 화를 내지 않기 바랍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 예수님처럼 화를 내기 바랍니다. 악에 대하여 말입니다. 그것들과 대할 때 누구보다 강자로 대하길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온유한 자입니다. 우리는 그냥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의 복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의 도를 지키고 그를 바라고 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 땅, 즉 영적으로 황폐한 땅이 복음의 땅이 되는 축복을 그들을 통해 우리를 통해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곳이 우리가 바라보는 제 3세계이고, 소외계층이며, 엘리트현장입니다.

 

주의 복음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_시편37:22’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_시편37:34a'

 

주님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여 사는 인생이 되어 온유한 자로 살길 원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땅 나의 가족, 친구들, 이 땅과 이 세대를 복음으로 얻길 원합니다. 나로 인해 그러한 땅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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