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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4-06-22 주일 1부 예배

< 주일 1부 예배 >

일시:  2014년 6월 22일

제목 : '긍휼'로 살아가는 성도

말씀 : 마태복음 5 : 7

설교 : 오승주 목사


2014-06-22 주일1부예배.hwp



음성 다운로드   https://db.tt/P9raoeC8

영상 다시보기   http://vimeo.com/98836837


가스펠교회 주일1부예배 20140622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 하나님의 동일시 사랑

 

긍휼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하는 긍휼이라는 말은 그 깊이와 넓이가 완전히 다릅니다. 긍휼이란 흘러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한없이 약하고, 악한 사람들을 대할 때 보여주시는 태도입니다. 성경에서 긍휼은 인자, 자비, 사랑, 불쌍히 여김, 민망히 여김 등으로 번역되는 만큼 폭넓고, 심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긍휼을 인간을 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태도라고 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동일시입니다. 동일시라는 말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면서 도와주려는 행위정도일 것입니다. 가난한 집의 아이에게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차를 타고 가서 돕는 다면 그 아이는 상실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가며 도움을 준다면 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동일시는 완전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완벽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완벽하게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 실제로 우리와, 인간과 동일시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이 성육신은 하나님의 긍휼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_빌립보서 2:7-8’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과 특권을 다 포기하셔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바로 저와 여러분을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우리는 죄와 저주,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종의 형체로 오신 것입니다. 사실, 복음은 세상의 어떤 논리와 지식으로도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교생활을 한다고 복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예배, 새벽예배, 금요예배를 빼먹지 않는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주님의 사랑, 즉 긍휼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와 같이 되셨으며 또 우리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긍휼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_에베소서2:4’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시험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그것이 동일시 사랑이며 곧 긍휼입니다.

목사로서 신학생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신학과정을 마치면 목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목사가 되었지만 목회를 하지 않는 분들만 서울에 5만 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서 교회에 온 성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여 목회자의 권위와 교회의 대중화만 위하고 있다면 진정한 목회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긍휼함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완전하게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긍휼이 여기는 자가 긍휼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 긍휼이 필요한 세상

 

세상은 지금 긍휼이 필요로 합니다. 다시 말해, 긍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긍휼을 알고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교회이고, 성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긍휼이 사라졌기 때문에 긍휼이 필요한 세상인 것입니다.

 

1. 고통 중에 있는 세상

 

몇 년 전 기사에 실린 내용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장모군은 선천성 판막증이라는 일종의 심장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병으로 몸이 많이 허약했고 그로 인해 다른 학생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악용하여 그 반에 있는 5명가량의 아이들이 그 학생을 1년 가까이 괴롭힌 것입니다. 나중에 밝혀진 내용을 보니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걸핏하면 외딴 곳으로 끌고 가서 두들겨 패고, 라이터 불로 손을 지지고, 심부름 시키고 제대로 못하니까 군대에서도 볼 수 없는 원산폭격 같은 것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 아이 부모님이 몸에 멍이 들어오는 아이가 수상해 일기장에 죽고 싶다, 건강했으면 싸우기라도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죽고 싶다고 써놓은 것을 보고 수상해 경찰에 신고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5명의 아이들의 대답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냐고 하니 그 아이가 고통을 못 이겨서 비명을 지를 때 쾌감을 느꼈다고 했으며, 그가 심장이 안 좋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인간성 파괴니, 상실이니 고상한 말로 떠들었지만, 사실 이 사건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점점 더 비정하고 잔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은 실례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_로마서 3:10-18’

 

하나님을 떠나 사는 그들의 삶이 그토록 안타까운 것은 비단 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요? 돈이 너무 많아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들이, 연예인으로 호화롭게 사는 그들이, 좋은 나라에 태어나 그것이 축복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 후대들이 왠지 위태롭게 보입니다. 지금 세상은 고통 중에 있습니다. 막연한 이야기 같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서 좋은 것, 돈과 명예, 이익만 쫓아가는 그들의 길의 끝을 알기에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아간들 그들의 끝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2. 긍휼보다는 율법 또는 신비

그런데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입니다. 교회가 긍휼보다는 율법과 신비에 빠져 있습니다. 긍휼의 은혜가 아닌 겉모양과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교회와 신자들로 인해 세상은 병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한국교인들을 세 가지로 특징 지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한다고 합니다. 둘째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셋째로 돈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사람들 가운데 그것이 인간의 종교심 일뿐 성경이 요구하는 참 믿음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로마카톨릭에는 카스트라토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여자 음성으로 노래하는 남자 가수를 일컫지만 원래는 소년 시절의 미성이 성인이 된 후에 변치 않도록 거세당한 남자 가수를 일컫는 용어였습니다. 소년들의 노래는 천사 소리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소년의 음성은 사춘기가 되면 변성기가 오기 때문에 굻고 강하게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좀 더 아름다운 노래를 바치기 원했던 로마 카톨릭 교황청은 1562년 소년 합창단원들을 거세하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거세라면 절대 권력자인 왕이 자신의 여자들을 건들지 못하도록 궁중 남자들의 남성을 지워버린 내시를 연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미개한 궁중에서나 가해지는 줄 알았던 거세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자행된 것입니다. 1903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금지되기까지 카스트라토는 무려 340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세당한 소년의 수가 얼마나 많았을 지는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습니다. 과연 거세당한 그 소년들의 찬양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소년의 미성에만 집착하시는 분이라면 애당초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변성기를 허락하셨을 까닭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소리마저도 어른이 되면서 함께 성장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귀한 자식을 성 불구자로 만드는 폭력은 누구를 위함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인간 자신들이 원하는 노래를 듣기 위함이었을 따름입니다. 그것은 허울 좋은 종교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웃사랑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인간에 대한 폭력은 언제든지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비단 로마 카톨릭 뿐일까요? 지금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만족시키는 율법과 신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식당에 갈 때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식당은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니면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교회에서 걸어놓은 액자입니다. 저는 제 모습에서 그런 모습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필요하면 언제든지 하나님마저 외면하는 자기중심적인 종교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 ‘긍휼로 살아가는 성도

 

1.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은혜

 

어제 양화진에 다녀왔습니다. 조만간 여러분과 시간을 내어 도시락 싸들고 소풍으로 가보길 원합니다. 그곳은 사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미지의 땅인 아프리카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무덤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만큼 150년 전의 우리나라는 미지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선교사님, 의사, 교사, 심지어 사업가까지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러 들어왔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니 아무런 이익도 없이 말입니다. 어떤 가족들은 온 가족이 들어와 함께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생 한글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 이곳에 왔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의료기술을 연마해 가족과 함께 다시 들어온 의사. 이분들의 묘역을 하나하나 보았습니다. 예전에 왔을 때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묘역을 돌아보며 과연 나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나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생긴 기념관안에서 영상을 보는 데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그들의 인생가운데 빛 비추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부랑자로, 알콜중독자로, 가정의 이런 저런 문제 있는 사람에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에 접속되어 영원을 누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에 접속된 사람들만 이 어둔 세상 속에서 세상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고, 영원을 지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산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상금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셈하심을 바라보고 이 땅에 기꺼이 그 받은 은혜를 나누러 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 모욕을 당하고, 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온갖 질병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던 것은 받은 은혜가 훨씬 더 크고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묘역을 보면서 그분들에게도 감사했지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분들 역시 하나님께 상급을 받아 천국에 계실 것이기에 불쌍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받은 은혜가 너무 큰데 그것을 나누며 살지 못했습니다. 내 인생인줄 착각하고 내가 잘해서, 내가 열심히 해서 얻은 자리인양 그것으로 자랑하고 남을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삶은 내 힘이 아닌 것입니다. 매정하고, 잔인하고, 더럽고, 악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긍휼을 베푸는 성도로 살아야 합니다. 긍휼은 흔히 오해하듯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은 헬라어로 엘레에오라고 합니다. 이는 구체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이를테면 누군가 힘들어하면 말을 걸어준다거나 손을 꼭 잡아준다거나 혹 자신이 지닌 무엇인가를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행동이 긍휼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순교한 선교사님들도 역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처럼 긍휼을 베푸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대체 이 세상 그 누가 한 시간인들 바르게 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삶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새롭게 될 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_마태복음6:14’

 

2.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_에베소서4:25-32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병든 자, 장애인, 세상에서 버림받고 천대받은 죄인들, 귀신들린 자와 같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생애 사역동안 주로 그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그런 자들이 더욱 많습니다. 돈이 많고 건강해서 그런 사람들이 없어 보이지만 육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 캄캄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긍휼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하든, 돈을 벌든, 아니면 공부를 해서 국가에 봉사를 하든, 혹은 무엇을 하든 그 마음으로 하시길 바랍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입니다. 이것은 특급신분입니다. 성도가 수준을 무시하고 살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제복의 수준을 다하지 못하면 이 땅에 문제가 옵니다. 경찰이 타락해서 어둠과 손을 잡고,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자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한다면 문제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완전히 최고의 신분입니다. 그런 신분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면 이 땅은 사단의 놀이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더불어 불쌍한 저들을 건질 방법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으며, 그 말씀으로 우리 인생을 늘 점검하고 갱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 받은 인생입니다. 우리는 늘 새로워야 합니다. 늘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없기에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여기심을 받는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믿는 자라고 하면서 심지어는 중직자라고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조금 시스템이 잘 갖추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쓰임받길 원합니다. 교회가 거대해져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로마카톡릭교회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학생들이 일제히 방학을 했습니다. 서울에 있든, 시골에 가든 방학동안 최선을 다해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허투루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인생으로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_에베소서4:31-32’

 

주님 죄인된 우리를 위해 긍휼을 베풀어주신 한없는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날마다 그 은혜를 묵상하며 우리 역시 긍휼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비록 작은 일 같고, 비록 작은 수고 같지만 그것이 이 땅의 어둠을 몰아내는 주님의 빛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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