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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4-07-06 주일 1부 예배

< 주일 1부 예배 >

일시:  2014년 7월 6일

제목 : 화평케 하는 자

말씀 : 마태복음 5 : 9

설교 : 오승주 목사


2014-07-06 주일1부예배.hwp




음성 다운로드 https://db.tt/ZLPiig8S

영상 다시보기 http://vimeo.com/100015887



가스펠교회 주일1부예배 20140706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 ‘그리스도인으로 회복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실 때 대통령이나 사장이나 목사나 집사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51~2절에 보니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라고 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되면 좋은 대통령도, 좋은 사장도, 좋은 목사도, 좋은 집사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겉모습은 분명히 사람인데 성경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3:10~12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인간은 에덴동산의 타락이후, 외형으로는 사람됨을 그대로 갖추고 있지만 인간성은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조금 도덕성을 많이 갖춘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결국 인간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죄로부터, 사단으로부터, 지옥과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범죄로 말미암아 잃었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참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도 되지만,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디옥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전혀 다른 사람, 정말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만나고 보니 그들은 하나님이시요 또 참 사람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달랐습니다. 세속의 것이 아닌, 세상의 것이 아닌 영원을 바라보았고,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지금 기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는데,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려면 화평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안디옥 성도들의 비밀이 이 말씀이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_로마서14:17-19’

 

저는 가스펠 교회의 성도님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여러분의 현장에 있길 원합니다. 가능하면 교회의 프로그램들은 최소화 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처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목회자로써 보람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늘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고 그들에게 주님을 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교회를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최고의 일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만 이 땅에 소망이 있습니다.

 

. 화평케 하는 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목적에 두어야 할 것은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점검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화평케 하는 자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을 찾게 되었습니다.

 

1. 생명을 가진 자

 

먼저는 생명을 가진 자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생명성을 가진 자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의 법칙을 알고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하루를 잘 살아봐야지.’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표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하루를 죽었다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산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10년이든, 20년이든 혹은 몇 개월이든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 프랑스의 작은 지하차도에서 영국의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와 이집트출신의 재벌의 아들 도드 파예드가 벤츠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즉사하는 사고가 났습니다. 사실 그 작은 지하차도에서는 교통사고가 날만한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세계 최고의 재벌과 최고의 명예를 지닌 여인이 즉사할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죽음이 그들에게 비수처럼 꽂힐 줄 알았다면 도드 파예드가 그날 내쉬었던 숨을 다시 들이쉬지 못할 줄 알았다면 그들은 그날 밤 리츠 칼튼 호텔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이 있고, 젊음이 있었지만 죽음은 남의 이야기 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죽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망각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매일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사는 존재입니다. 죽음을 모르면 매일 죽겠지만, 우리는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의미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 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 죽음이 느껴질 때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느껴지면 그제야 점쟁이를 찾고, 종교를 찾습니다. 그곳에 답은 없습니다. 답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을 생각한다면, 또 이 땅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한다면 매일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가진 사람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로마의 핍박이 극에 달했을 때 초기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키려 카타콤에 들어갔습니다. 카타콤은 우리말로 지하묘소입니다. 우리나라 묘소와 다르게 그들의 묘소는 지하 4-5층까지 만들어졌는데 흙이 응회질이었기 때문에 그런 구조의 묘소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런 응회질이 공기가 닿고 세월이 흐르면 돌처럼 굳어지는데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썩은 물을 완벽하게 흡수한다고 합니다. 악취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 묘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몰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무슨 메시지입니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주일에 예배를 드릴 때마다 시체를 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누울 것이다. 내게도 언젠가 저 시간이 비수처럼 다가올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원형극장의 사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온갖 핍박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죽음이 올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은 것입니다.

2. 사랑을 가진 자

 

화평케 하는 자는 사랑을 가진 자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품어줍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구한말에 한국에 와서 선교사역을 하면서 대한제국멸망사라는 책을 쓴 헐버트 선교사님은 그의 책속에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을 당할 때는 영혼숭배자, 즉 미신적이 된다. 따라서 어느 한국인의 종교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가 고난에 빠졌을 때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살펴보면 된다.’ 정말 맞는 말이고 탁월한 분석입니다. 고난에 빠질 때 보면 무슨 종교든 상관없이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문제가 올 때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나누고 싶은 것은 유교도입니다.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 유교도라고 합니다. 유교의 교리는 힘없는 자가 힘 있는 자를 섬기는 제도입니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보호해주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힘이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섬겨주는 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담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저 친구가 너무 싫어요. 저 친구가 하는 것, 저 친구가 가는 모임은 하기도 싫고, 가기도 싫어요.’ 그렇게 이야기한 친구는 렘넌트중의 렘넌트였고 그 친구는 이제 막 예수를 믿은 새신자였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자들이라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자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공자의 사랑으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랑으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랑을 가진 자만이 화평케 할 수 있습니다.

3. 애통을 가진 자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반드시 애통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 애통을 가진 자가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그 애통이 없으면 절대 화평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애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난 말씀을 통해 애통을 묵상했습니다.

신학자 지오반니 빠삐니가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속에서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많고 많은 곳 중에 더러운 말구유에 태어나셨는가?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외양간에 태어나셨던 것은 그곳이 그분이 이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깨끗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답입니다. 세상, 인간은 겉으로만 깨끗해 보일 뿐 실상은 짐승의 외양간, 곧 말구유보다 더 더럽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십 년을 살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영원을 몰라 이익과 유익함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모으고 또 모읍니다. 많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지만, 사실 다 오물이 되고 다 쓰레기가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 곧 애통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봉사는 봉사를 하는 것 같으나 자기를 위해서,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통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다운 것입니다. 남을 도우며, 남을 섬기며,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애통은 참 봉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애통을 가지고 봉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구유보다 더 더러운 세상의 한 부분을 나의 애통으로 정화시켜 가야 합니다. 그것이 빛의 삶이고, 소금의 삶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_마태복음20:28’

 

4. 성실을 가진 자

 

화평케 하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것이 성실입니다. 다시 말해 성실은 진실함이고, 정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이는 곳만 깨끗하게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은 너무 더럽다고 합니다. 그것이 선진국과의 차이라고 합니다. 저는 성실에 대해 할 말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성실하지 않는 다면 결국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대한민국은 부정투성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어느 한 곳도 정직한곳이 없습니다. 미국, 호주, 유럽 등 많은 나라들이 한국 사람들이 정직하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친절하고, 잘 웃지만 막상 이익과 손해 앞에서는 돌변한다고 합니다. 유럽은 대중교통의 표를 검사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런데 불시에 검사를 하는데 가장 많이 걸리는 민족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정치든, 경제든 그렇습니다.

저는 복음이 우리의 삶으로 나타난다고 확신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교회는 떠들지 않아야 합니다. 대신 조용히 여러분의 삶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그것은 열심히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가 절대 아닙니다. 주님을 모신 자는 성실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스펠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목적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교회일이든 세상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임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5. 겸손을 가진 자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화평케 하는 자는 겸손을 가진 자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로 주님을 만나고 엄청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엄청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겸손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을 만나지 못했거나, 심지어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어떤 상태에서 구원받았는지, 어떤 상태에서 주님이 만나주셨는지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잊으니 교회가 수준을 따지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오는 것을 꺼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겸손은 가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은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앞에 겸손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겸손한 사람이 권력을 가져야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권력의 청지기로 주님의 뜻에 맞게 권력을 사용할 것입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한 자가 재물을 가지면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청지기로 그 재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용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사실, 그리스도인은 화평케 하는 자인데 우리 사회, 가정, 내가 있는 그곳에 주님으로 화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저는 실수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제가 학교사역을 할 때 아이들을 데리고 설악산을 등반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바쁘니 학교의 선생님에게 그곳을 답사해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반대길로 내려가기로 했는데 그분도 설악산을 갔다 한쪽길만 가보고 그 길로 내려온 것입니다. 정상까지는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려가다 보니 길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걸어갈 수 없어 기어서 큰 돌들을 넘어가야 했는데 문제는 어두워지니 한발자국도 못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구조대를 불러 겨우 내려갔습니다. 저는 그날 하나님 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생명도 가졌고, 사랑도 가졌으며, 애통한 마음도 가졌고, 또 성실과 겸손으로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가야할 길에 대한 인생 계획서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않으면 내 가장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의 진리의 여정을 안내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방해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_찬송412

 

그래서 저는 화평케 하는 자의 5가지의 특징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영성입니다. 영성은 내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 속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2.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_베드로전서2:9’

 

화평케 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은 기이한 빛으로 이 세상에서 즉 여러분의 모든 처소에서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여 세상과 사람답지 못한 그네들에게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주님 저희가 말로만 그리스도인이었지, 생각해보니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있는 곳에, 우리가 만나는 자들이 주님과 화평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 용소해주세요. 이제 다시 화평케 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주님 없어 불안과 염려, 근심과 영적인 고난 속에 있는 그 사람들과 삶에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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