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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9-01-27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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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7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기근이 아닌 나의 주님을 따라

본 문 :

창세기 12:7-20

오승주 목사

 

. 은혜가 멈추면 하나님께 우리 삶도 멈춥니다.

 

우리 삶에 은혜가 멈추면 하나님께 우리 삶도 멈춥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항상 은혜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하찮게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은혜 받았으니 이제 열심히 세상에서 성공해보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에서 점차 멀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별일 없습니까? 생각대로 성공하고 부자도 되고 그렇습니까? 놀라운 것은 하나님도 그 삶에 더 이상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상관이 없다 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떠나십니다. 그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공해서 하나님께 잘하겠다, 성공해서 예수님 잘 믿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엄청 위험한 말입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어디 소풍이나 캠핑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세상의 종노릇하면서,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면서, 점차 천국에서 멀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기쁨, 그 안식, 그 찬송과 경배를 잃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 믿음이 기근을 만나다.

 

아브람의 믿음과 시작_창세기12:7-9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_창세기12:7-9’

 

믿음을 따라 먼 길을 왔는데 기근이 웬일입니까? 믿음으로 떠난 이 길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어쩌면 시험인지도 모릅니다. 믿음의 관문. 제대로 믿어보겠다고 이 길을 갔는데 왜 기근을 만납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믿음을 결정했기 때문에, 이때까지 살아왔던 패러다임을 버리고 이제 말씀을 따라, 정반대로 살기로, 낮선 방식으로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이때까지 겪지 못했던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기근은 아브람에게 첫 번째 관문입니다. 굶지 않을 때는, 기근이 없을 때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기근이라는 것이 오면 내가 지금 무엇을 의지하는지 드러납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기근은 돌이 떡이 되라고 하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럴 능력이 있지 않느냐? 왜 쓸데없이 굶고 있느냐? 만지는 것마다 금이 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사느냐 라고 유혹할 때 예수님은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라고 증명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림길에 섰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기근입니다. 다시 먹고 살 수 있는 풍요의 땅을 선택하지 않으면 나 혼자 죽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을 선택합니다.

 

2. 기근을 피해서 간 아브람과 하나님의 간섭하심_창세기12:10-2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_창세기12:10’

 

현실에서 만난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은 굉장히 합리적으로 찾아옵니다. 애굽을 선택해야 하는 현실에 마주한 것입니다. 굶어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애굽 땅이 가까이 오면 가까이 올수록 더 큰 걱정이 몰려옵니다. 기근 때문에 찾아간 애굽 땅에 갔는데 더 큰 걱정이 생깁니다. 살겠다고 택한 길이 죽음의 두려움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토록 아름다워 결혼했던 사래가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의 미모 때문에 죽겠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혼자 불신앙의 상상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기껏 짜낸 것이 아내를 누이라고 하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합리화할만한 근거는 있습니다. 아내가 실제로 이복누이입니다. 아내를 설마 빼앗아가고 죽이겠느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고대근동지방의 전통은 아리따운 여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인을 데려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거나 아니면 돈으로 사는 것입니다. 미인을 데리고 사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보고 누이다 하면 내 목숨은 건질 수 있다 라고 안전하다고 상식선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겠다고 떠났는데 기근이 찾아오고 죽음의 위기가 찾아오니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례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로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데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_창세기12:11-13’

 

정말 돈이 없어보거나, 내가 정말 죽음의 위기에 빠지면 내가 얼마나 돈을 의지하고 살았나, 얼마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았나 한순간에 드러납니다. 제대로 믿겠다고 하니 이런 시험이 오는 것입니다. 제대로 믿는다 하니 이런 시험도 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드러나게 하십니다. 아브람이 믿기로 결정했고 하나님도 아브람을 선택하여 인도하시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시험입니다. ‘네가 누이로 행세해야 내가 안전하고 내가 살 수 있고 내가 성공할 수 있다라고 사래에게 설득을 합니다. 인간적인 두려움이 오기 때문에 잘되는 길, 성공하는 길, 세상의 방식으로 살기로 다시 결정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현주소가 아닌가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길을 간다 할 때 이런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수학여행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살겠다고 결정했더니 더 큰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믿음을 놓치면 두려움이 파도처럼 엄습해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게 되고 또 거짓말로 인생이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다시 원점이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아브람 너는 복이야. 너는 복의 근원이야. 너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이야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드리면 이것은 큰 은혜이고 권세 곧 특권입니다. 이 권세는 그러나 권리이면서 의무입니다. 다시 말해 특권은 반드시 책임을 동반합니다. 이 기본적인 진리를 모르면 천박한 종교인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아브람은 이제 믿음의 길을 떠났을 뿐입니다. 아직 아브라함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를 두고 이제 막 믿음의 길을 떠난 믿음의 시작을 한 새신자입니다. 아마도 아직 복음적 그리스도인이 아닌 종교적 그리스도인 일 것입니다. 엄청난 특권을 받았는데 아직 이 특권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는 믿음에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가진 역설입니다. 무슨 짓을 해도 구원받는다는 구원파 같은 교리가 나옵니다. 그것은 아직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안 받았기 때문에 맘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형수가 특별사면을 받아 자유인이 되었다면 다시는 사형당할 죄를 지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것을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아브람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연단시키는 시작입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는 과정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분의 추격은 끝이 없습니다. 아브람은 당장 기근의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보니까 애굽을 선택했고 그러다 보니 아리따운 아내가 문제가 되고 또 대안을 내놓았지만 그 대안이 더 큰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_창세기12:14-17’

 

그 당시에 누이라고 했기 때문에 고관들이 몸값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래가 65세입니다. 127세에 죽었는데 중년여성입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아름다우면 동네 사방에 소문이 났고 그러다가 궁궐에도 소문이 들어간 것입니다. 바로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가나안땅에서 내려온 한 사람의 동생이 절세미인이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바로가 괜찮은 왕이었습니다.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했습니다. 실제로 사래가 누이였다면 대박 난 것 아닌가요? 동생은 여왕이 되고 자기는 거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탄식했을 것입니다. 후회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면서 흔들리면 이렇게 후회하는 것입니다. 아마 엄청나게 힘들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떠났는데 기근을 피해 애굽에 왔더니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것입니다. 저는 제가 고등학교 때 복음을 전했던 친구들을 다 빼앗겼습니다. 저는 저를 의지하고 저를 통해 복음을 전해 듣고 싶었던 청소년들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눈물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으로 불러주셨는데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여러분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오늘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내편으로 끌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인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재단을 쌓겠습니다.’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다가 잠깐 기근을 피해 애굽에 왔더니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눈물의 밤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제 생각에 아브람은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드디어 역사하십니다.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주셨습니다. 그때 바로가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래에게 캐 물었습니다. 그래서 결혼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나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_창세기12:18-20’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면,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지 못하면, 우리가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거짓말은 아브람이 했는데 재앙은 바로가 받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네가 복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누리지 못하면 세상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바로가 아브람을 혼을 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고난을 당하고 또 불신자들에게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하고 있는데 욕을 먹고 있습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라고 말할 때는 분명하게 그것에 따른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책임: 나의 주님을 따라_골로새서1:9-29

 

그리스도인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 즉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간다는 축복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여러분 축복 안 받으셨습니까? 천국백성이 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문제입니까? 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을 못하는가요? 우리가 믿음의 길을 떠나고, 우리가 복이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대답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려고 한다면 책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브람은 이제 막 신앙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람의 실수에 뒷수습을 다하셨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상상할 수 없는 권세와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 권세에 합당하게 사는 책임을 마땅히 다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복음은 특권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며 사는 것은 책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 말씀, 기도는 책임입니다. 그뿐입니까?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바로 책임입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_골로새서1:9-23’

 

저는 여러분과 분명하게 이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과 반드시 뚫고 지나가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첫째, 설교를 분명하게 들으셔야 합니다. 그냥 듣지 마시고 제대로 분명하게 들으셔야 합니다. 이해하고 깨닫고 내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양육을 받으셔야 합니다. 장로님, 권사님, 믿음의 선배들에게 양육을 요청하셔야 합니다. 교역자들에게 양육을 요청하여 복음에 대해 명확하게 알기를 원합니다. 셋째, 소그룹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부탁드리는 것은 아무리 바쁘지만 주일에는 소그룹 모임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평일에 한번 한다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한 달에 한 번도 좋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소그룹에서 뭘 하냐 입니다. 단순한 성경공부나 어려움과 필요를 이야기하는 모임이 아니라 매주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얼마나 실제적이셨는지, 그들을 괴롭히는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말씀을 통해 어떻게 다루셨는지, 그들의 기도생활이 수행되었는지 나누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서로 간증하고 서로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이면서 축복된 대화를 할 수 있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점검을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묵상입니다. 묵상은 우리를 늘 깨워줍니다. 깨닫게 해줍니다. 회개하게 하며 돌이켜줍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항상 성경을 펼쳐 읽으시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생활을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건강한 교회, 교회다운 교회가 세워지는 길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며 사람들을 살리는 길이 될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기근은 우리가 뚫고 지나가야 하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몇 번이나 물어봤습니다. 내가 이 십자가를 져야 하냐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의 길을 가야 하냐고 물어봐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 아닌가요.

 

주님 믿음의 길을 가길 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갈 때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내 가족과 이웃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멈추면 그들은 복음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려워질 것입니다. 복음의 특권을 가진 우리가 그 책임도 다할 수 있도록 오늘 우리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가는 길에 기근도 만나고 불신앙도 만나지만 그때마다 믿음을 선택하여 이 아름다운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축복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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