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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찬양예배

2014-08-08 금요예배

<금요예배>


일시:  2014년 8월 8일

제목 : 한마음과 한도

말씀 : 예레미야 32 : 36-44

설교 : 박영성 선교사 (LA 주님이 함께하는 교회)



2014-08-08 금요예배.hwp


음성 다시듣기  https://db.tt/8oiloOmi

영상 다시보기  http://vimeo.com/102937131



가스펠교회 금요예배 20140808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비전을 나눈 친구가 개척을 하고 그 교회에서 말씀을 하는게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많은 친구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 가장 통했던 친구입니다. 그러면서도 부러웠던 친구인 것 같습니다. 제가 중고등학생 때 오목사 때문에 회장을 한번 못해봤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혼에 대한 열정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아무런 문제없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목사는 가정 배경도 그렇기 때문에 영혼에 대한 열정이 더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생긴것과 다르게 유한 사람입니다. 고신대학교 OT때 성극을 하는데 사단 역할이 필요했습니다. 분장할 것도 없고 했는데 바로 오목사를 지명해서 사단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생긴 것과 다르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남달랐고 그것이 부러웠던 친구입니다. 힘들 때 기쁠 때 함께 나누었던 친구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비전, 영성을 빨아먹어야 합니다. 그냥 놔두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목회자로 부르신 것은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특히 이 시간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가족같은 분위기에 있을 때 저분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지 다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동기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개척을 하기 때문에 저도 많은 이야기를 듣고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른들을 보면 소망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함께 온 아이들을 보며 이들이 중직자가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찹니다.

(영상)

 

사단의 역사가 마치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주의를 돌려서 모든 것을 빼내고 있습니다. 각인전쟁. attention이 우리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어디에 집중하는지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마음 한도라는 말씀으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마음, 한길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올해 원단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일심, 전심, 노력이었습니다. 이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길로 갈 수 있는 축복, 한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이 약속을 하셨는가입니다.

 

1. 나뉘어진 마음

 

우리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나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의력이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경 쓸 것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갈기갈기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한 마음으로 일심, 전심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우리가운데 마음이 나뉘어져 있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쉼이 없습니다. 서울은 더욱이나 그렇습니다. 너무 복잡하고 신경 쓸 것이 많습니다. 점점 쉼이 없는 삶이 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를 생각하고 나아갈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이유는 정체성에 있습니다. 정체성이 상실되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에게 영향력이 너무나도 큽니다. 누군가 나에게 얼굴이 크다고 하면 화가 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 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기분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습니다. 상처도 금세 받습니다.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다른 사람이 이야기 하는 것이 내가 되는 것입니까? 분명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데 그것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사회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이런사람이구나라고 합니다. 연예인들이 댓글을 보고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니 이런 사람인가 보다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칭찬, 기대를 보며 그것에 맞추어 살려하기도 합니다. 부모님, 친구들이 나를 보는 모양에 맞추어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니 쉼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렘넌트들이 정체성이 없습니다. 특히 미국에 사는 렘넌트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피부색이 달라서 미국인도 아닌데 그러면서도 한국인도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이 말하는 스펙, 배경에서 나를 찾아가고 판단합니다. 그러니 쉼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쉼이 없는 것은 안정된 삶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안정된 삶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추구해 나갑니다. 특히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안정된 삶을 얻으려면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정된 삶이 오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이정도 하면 됐다 싶을 때 더 필요한 것이 또 생깁니다.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한 모양입니다. 안정을 찾을 수 없고 인생이 피곤해지게 됩니다. 목적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추구하는 사람이 선교사를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안정된 삶을 원하는데 선교지에서 복음전하며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영적인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니 쉼이 없습니다. 무언가가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경제를 허락하시면 헌금해야지라고 하면 절대 헌금을 하지 못합니다. ‘내가 성공해서 전도해야지라고 하면 절대 전도를 하지 못합니다. ‘내가 엘리트가 되어서 복음 전해야지.’라고 했는데 엘리트가 되지 못하며 어떻게 합니까?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성취하고 나서 복음을 전하려 하면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생때 시간이 너무 없어서 이정도만 하고 대학에 가서 전도하겠습니다. 라고 했지만 대학에 가서는 또 바쁜 삶이 왔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팀합숙에서 백운규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4복음서적인 삶을 산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 다니면 밥도 먹을 수 있고 지위도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무리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적인 삶을 살면 감옥에도 가야하는데 그런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가도 된다는 사도행전적인 삶을 사는 젊은이들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에서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 때문에 쉼이 없습니다. WRC가 끝나고 와서 교회에 돌아가서는 화려한 조명, 사운드가 없으니 찬양을 하지 못합니다. 개교회에 가서 보니 16c의 찬송가를 부르고 있으니 지루해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시설이 없는 선교지에서는 찬양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결국 쉼이 없으니 한 마음이 되지 않고 일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쾌락으로 채우게 됩니다. 안정된 삶을 위해 열심히 살고 나서 자신에게 선물을 줘야 하는데 결국 그것이 쾌락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알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겼던 신입니다. 비의 신, 폭풍의 신이었습니다. 가나안은 농경사회였습니다. 광야를 돌아다니던 이스라엘민족은 가나안에 도착해서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어떻게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물어보던 중 바알신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따라가다 보면 바알신을 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바알신을 섬긴다는 이유로 성행위를 했습니다. 쾌락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율법, 삶에 눌린 사람들이 그러니 당연히 바알신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문화를 따라가다 보니 힘든 것입니다. 정체성은 발견되지 않고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과 비교하다 보니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쫒게 되고 그 곳에서 쾌락을 찾게 된 것입니다.

아합왕이 거짓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 세 번의 저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거짓 선지자가 모합 여인을 이스라엘에 풀었습니다. 쾌락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 시대는 쉼을 쾌락을 통해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에 빠질 수 있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보다 더 수준 높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야훼라는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을 경회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쓰던 중에도 이 이름이 나오면 다시 가서 씻고 와서 이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신을 섬길 수가 있습니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각인전쟁입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세상을 따라간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오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이 주는 기준을 따르고 문화를 따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바알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각인전쟁에서 진 것입니다. ‘나는 렘넌트로 자랐는데요.’, ‘나는 목사인데요.’ 이것은 사단에게 통하지 않는 소리입니다. 여기에서 지니 나뉘어지게 된 것입니다.

(36) 안정된 삶을 요구했는데 결과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이었고 당연히 재앙이 온 것입니다. 지금 재앙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교회가 이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밟히운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러주었습니다.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더 도덕적이지 않고 악하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교회가 도덕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결국 종교만 남게 됩니다.

 

2. 회복

 

하나님께서 나뉘었던 유다민족에게 회복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저희는 아무 프로그램 없이 성경을 묵상했습니다. 저도 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어마어마한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 언약적 관계

(38) 하나님이 먼저 언약적 관계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호세아의 첫째 자녀 이름이 로암입니다.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호세아에게 창녀를 부인으로 주고 거기서 얻은 아들을 로암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라 하셨습니다. 각인전쟁에서 진 사람들이 결국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곳에서 빼 내시고 언약적 관계를 회복하신 것입니다.

 

2) 약속의 땅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에 열방이 복을 얻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언약적 관계를 회복한 후에 다시 약속의 땅으로 불러들일 것이라 하셨습니다. 소명, 사명, 천명을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회복시키십니다. 렘넌트들이 각인전쟁에서 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새언약을 주십니다.

 

3) 한마음, 한길

 

(39) 한마음과 한길을 주신 이유는 경외함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worship and forever라고 합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사단은 눈에 당장 보이는 것만 집중하고 시선이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회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에 필요한 것은 믿음뿐입니다. 하나님께 미래를 보여 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내 미래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미국에 지금 유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자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중에 금가루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임재 하셨다면서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를 끝냅니다. 이것이 영적인 것입니까? 눈으로 보이는 금가루는 육적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니 사단이 장난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 삶에서 금가루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내 육신의 귀로 들은 음성은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분명히 하나님이 자신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다고 했지만 현실을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믿음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믿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예배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을 떠나지 않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새언약입니다. 그 전에는 모세에게 돌판으로 주셨던 언약을 이제 가슴속에 각인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40-41)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좌절할 이유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쉽게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쉼표를 찍으십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잡혀갈 때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으신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에 갔을 때 세 그룹이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 예루살렘에서 버티던 남은 자, 애굽에 피신한 자 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살렘에 남은자와 애굽에 피신한 자를 나쁜 무화과나무라 하였습니다. 세상이 기억치 못하게 멸절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좋은 무화과나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재앙을 주기 위해 포로로 보내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쉼표를 마침표라 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오면 애굽으로 피해가려 합니다. 아닙니다. 그것과 부딪혀야 합니다. 렘넌트들에게도 문제가 오면 피하려 하지 말고 겪으라고 합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이 망하게 하려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게 문제가 오면 하나씩 정리를 합니다. 문제가 올 때 버티고 피해가면 렘넌트들에게 무엇을 이야기 해줄 수 있습니까? 말씀을 붙잡고 부딪친 사람이 증인입니다. 여러분들의 문제, 과거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쉼표를 찍은 것이지 마침표를 찍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서 상처받을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이유가 있으니 다시 보아야합니다.

3. 다음세대 전달

 

이것에서 끝나지 않고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9) 한길, 한마음을 주신 이유가 후손을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절대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예레미야를 묵상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많이 넘어지고 속았음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묵상해야 할 내용은 하나님이 충분하고 완전하심입니다. 우리는 방법, 전략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후손에게 그것을 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전달해야 합니까? 복음을 전달해야 합니다. 언약을 전달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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