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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 Letter. ' 신앙생활은 광야를 지나는 것 '

Gospel Letter. ' 신앙생활은 광야를 지나는 것 '

 

 

지그 지글러의 책 ‘정상에서 만납시다’를 오래전에 읽은 적이 있다. 그 책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쏟아져 나온 처세술이나 자기계발서 같은 책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정상에 오르라는 것이다. ‘산의 정상에 올라야 그것이 성공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저런 책들이 우리나라를 망쳤다고 생각한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마치 실패인양 느끼게 해주었고, 가난은 마치 큰 죄를 지은 것 같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올바르게 사는 것도, 정직하게 사는 것도 필요 없게 되었다. 성공만이 우리가 살아갈 이유가 되었다.

무서운 것은 그런 흐름들이 교회에도 점령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장주의에 빠졌고, 건물이나 숫자가 중요한 성공의 척도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도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기도 제목이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교회와 삶에 예수님은 점차 자리를 잃어갔다. 예수님은 그저 자식들 좋은 대학 갈 때, 회사 승진할 때, 내 문제 해결할 때 필요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말씀만 들어도 감사의 눈물을 흘렸고, 기도하려고 엎드리기만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진심으로 회개하였다. ‘내가 널 사랑한단다’ 이 말씀에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프로그램이 아니고, 전략이 아니고 그저 그렇게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았는데도 내 삶이 변화되는 것을 느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잘못된 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고, 그 변화된 삶 속에서 예수님을 주변 사람들에게 간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목사가 되고 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산에 오르는 삶을 살게 되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큰 교회가 꿈이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큰 사역들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점차 멀어졌다. 마치 탕자처럼 말이다. 그것이 목회자의 우상숭배인 것을 왜 몰랐을까.

 

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예배 하나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가? 정상에 오르지 못한 모습이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왜 창피하지? 예배드리는 것이 왜 자존심이 상하지? 어느 덧 우리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교회에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은 왠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교회의 수준 떨어진다 한다. 그러면서 은근히 정죄하고, 차별한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 안 되나 보다. 이상하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그랬는데, 종교인들이 그랬는데.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_이사야29:13’

 

우리는 광야를 지나가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광야를 지나려면 나를 버려야 한다. 광야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특별한 길도 없다.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할 뿐이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금은보화보다 생수가 필요하다. 큰 집보다 잠시 머물 장막만 있으면 된다. 그것만 있어도 감사가 넘친다. 광야는 결코 혼자서 갈 수가 없다. 함께 가야만 헤쳐 나갈 수 있다.

 

가나안이 광야의 끝이다.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땅이다. 그 말은 우리 일생의 끝이 예수 그리스도여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길 소망하며 사는 것이다. 내 마음에, 내 가정에, 내 자녀들에게, 내 나라에 말이다.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_이사야33:6’

 

예수님과 함께 하면 멀고 먼 광야길이라도 평안하다. 행복하다. 그렇다.

 

 

 

 

_ 광야를 지나길, 그렇게 살길, 오승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