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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 Letter. ' 마음을 새롭게 하여 '

Gospel Letter. ' 마음을 새롭게 하여 '



저는 겉으로는 화를 잘 못 냅니다. 늘 화를 내시던 아버지처럼 안 살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밝게 사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에는 분노가 많았습니다. 마음으로는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잘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불편했고 속으로 정죄하였습니다. 그렇게 겉으로는 신앙생활 잘한다고 늘 칭찬을 들었지만, 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 제가 마태복음을 설교하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목사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면 참 이상한 말이지만, 사실입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몸부림을 치던 때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때입니다. 그런 저를 하나님은 감람산으로 겟세마네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쉽게 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싶은데 열리지 않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존심인지, 경험인지, 체질인지, 지식인지 혹은 상처인지 모르지만 열리지 않았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_요한계시록3:20’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나 사용하는 성경 구절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도록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 안에 무엇인가 변화된 것을 느꼈습니다. 성공에 대한 열망이 꺾여졌고, 은밀한 죄에 대해서 고백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 깊이 느낀 것 뿐인데, 엄청난 내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또 얼마나 큰 것인지도 알았습니다. 진짜 감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목회에 대한 생각도, 보는 눈도 달라졌습니다. 


‘오래전 큰 교회 철야기도가 유명한 교회에 한 신문기자가 새벽에 교회에 갔더니 철야기도를 마치고 나온 교인들이 육교 밑을 뛰어 건너면서 버스를 타려고 달려가는 모습을 조롱 섞인 표현으로 취재하여 기사를 쓴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메시지 따로, 삶 따로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점차 말쟁이가 되어가는 기독교가 아닌 가 생각해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메시지를 하고 복음도 전하고 다 하면서 제 삶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제가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혁이고, 개혁신앙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_로마서12:1-2’


사도바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산제사는 산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살아있는 우리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몸이 하나님 것이라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것이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주일예배 참석하는 것이 예배가 아니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것이라 여기고 사는 것을 예배라 합니다. 


사실 이렇게 가스펠 편지를 쓰면서도 갈등이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산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에 그런 신앙을 요구하면 성도들이 떠나지 않을까? 이런 악한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 신앙생활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세상의 성공기준을 따라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갈등, 원망, 상처, 문제에 빠지거나 환경, 여건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단 한번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핵심은 ‘자신을 바치느냐, 바치지 않느냐?’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디에’ 우리 자신을 바치느냐? 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 자신의 몸을 바치고 삽니다. 이 시대의 풍조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2:39에서 주님은 악하고 음란하다고 하셨습니다.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악하고 음란한 세상 풍조를 본받고 따르게 하려고 보이지 않지만 엄청난 힘으로 우리 마음에 역사하고 있음을 아십니까? 우리가 보고 듣는 것에 의하여 알게 모르게 마음이 묶여 끌려고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바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사정한다. 부탁한다' '힘들겠지만 순종해라'가 아니고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야, 이런 권면을 받는 너는 복 받은 거야!' 그런 의미입니다. 


이런 차이는 전부 마음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바꾸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가만 있으면서 마음에 변화가 오기를 기다리면 안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_에스겔36:26-27’


마음을 새롭게 바꾸는 은혜가 있길 기도합니다. 저는 이제 마음이 평안해짐을 느낍니다. 중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진짜 신앙생활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가장 멋진 인생이기도 합니다.






_ 송구영신예배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가장 소중한 선물되길 바라며, 오승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