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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찬양예배

2016-01-29 금요예배





가스펠교회 금요예배 20160129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사람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로마서1:28-32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영적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늘 육신의 세계에서 살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에 대해 무지합니다. 반대로 개인의 상상과 경험, 잘못된 세계관으로 영적인 세계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오늘 영적인 세계의 구조에 대해서 말씀을 나눠야 하는데, 참으로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이 세계는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세계를 배울 때는 신앙인의 기준인 말씀으로 기준을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 90년대 한국 토속 종교인 무속신앙과 기독교가 절묘하게 결합하여서 신비주의 신앙이 등장했습니다. 신비주의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성경을 보아도 신비한 장면에만 관심 갖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비보다는 보고 듣고 느껴지는 영적인 역사(결과)에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기도, 치유하는 기도, 환상, 예언 하는 행위적인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이러한 현상들에 반대해서 이러한 기독교의 ‘신비’의 영역을 무시하고 성경공부만을 강조하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신비주의의 반대하며 오히려 율법주의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기도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간의 이성으로 한정지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 역사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삼고 올바른 영적인 세계를 잘 이해해야 신앙생활 건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가스펠교회 성도님들은 주의하셔야 합니다. 가스펠교회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용받을 수 있는 것은 역사의 흐름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당연한 것인데, 당연하지 않는 시대를 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대를 잘 보아야 교회, 나를 잘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않습니다. 마음도 눈에 보이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 사탄, 인간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바른 기준, 올바른 신앙생활의 방법을 찾아내길 원합니다.



1. 하나님과 사탄의 역사의 차이점_로마서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_로마서1:28’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 하였고,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하나님, 사탄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면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할지 방법이 보이게 될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사탄의 존재에 대해서 명확하게 현재도 실존하고 역사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차이점은 사탄에게는 종말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는 사탄도 이 땅에서 종말을 맞이하고 불과 유황불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세의 때에 사탄은 더욱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신 것을 초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재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사이의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 사이의 시간들을 종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는 사탄에게 두려운 시간이고 촉박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다니며 삼킬자를 찾고 있습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_요한계시록 20:10’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_베드로전서5:8’


사람은 죄의 아래 가운데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선을 행할수 없습니다. 수고하고 힘쓴다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사회에서 말하는 선은 할 수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 선은 절대 행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마귀에게 종노릇하여 마귀의 권세아래 자기의 의지에 따라 가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사람의 의지를 마부의 명령에 기다리는 말에 비유하며, 하나님과 마귀를 그 마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 말에 올라타시면, 그는 온유하시고 숙련된 마부이시니, 말을 적절히 인도하시고, 너무 천천히 가지 않도록 박차를 가하시고, 갑자기 멈추어 서면 재촉하셔서 달리게 하시고, 그리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


하나님은 사람의 의지(말)를 최종적으로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유하심으로 박차를 가하게도 하시고, 재촉하게도 하셔서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십니다.


“ 그러나, 마귀가 안장위에 오르면, 어리석고 방자한 기수처럼 바른 길에서 멀리 벗어나도록 난폭하게 마구 달리게 하고, 도랑에 빠뜨리기도 하고, 벼랑에서 뒹굴게 하고, 때리고 괴롭혀 고집을 부리게 하고 난폭하게 만드는 것이다. ”


하지만 마귀가 안장위에 오르면 인간의 의지를 바른길에 벗어나도록 인도합니다. 바른 길이 아닌 길은 어떤 길일까요? 도랑에 빠지고, 벼랑에 뒹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때리고 괴롭혀서 고집 부리게 하고 난폭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고, 그 권세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가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는 우리의 의지가 사탄의 간계에 사로잡혀서 반드시 그가 이끄는 대로 복종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미 난폭한 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마음은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탄의 역사는 인간의 의지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왕국은 외면적인 것,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의지에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 역시 사람의 마음인 의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말을 인도하실때는 그 목적이 분명하십니다. 구원의 역사로 바른 길에 서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심합니다. 왜 나를 때리시지, 왜 나를 재촉하시지,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문제를 주시지, 저런 사람을 만나게 하시지,.. 하지만 그러한 신호는 전부 바른 길로 다시 들어서게 하시는 마부 되신 하나님의 온유하신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입니다.



2. 동일한 사건에서 하나님, 사탄, 사람이 함께 역사함_로마서1:29-31


우리가 흔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문제와 사건을 만나면 고민하게 됩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일까, 사탄의 일일까, 사람의 일인 것일까? 이중 한가지로 결론을 내립니다.


성경에 그러한 고민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이 욥기서입니다. 당대 의인이었던 욥에게 갈대아 사람들은 욥의 목자를 죽이고 양떼를 약탈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과 욥은 이 선택의 고민들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을 가장 쉽게 이해려면, 그 사건의 목적을 생각하면 됩니다. 

욥의 사건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욥이 재난을 통해서 인내를 연단시키는 것이었고, 사탄은 그를 절망의 상태로 몰아 넣으려 했고, 갈대아 사람들은 법과 정의를 무시하고 남의 재산을 가로채어 이익을 얻으려 한것입니다. 


이처럼 목적이 확연이 다르니, 똑같은 사건에 행위의 성격도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욥에게 주는 환난을 허락하셨고, 갈대아인들이 욥을 괴롭히도록 사탄의 지배하에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갈대아 사람들의 사악한 마음을 주고 죄를 범하고록 인도한것입니다. 사탄의 통치아래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갈대아인들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탄을 자신의 진노의 도구로 여기시고,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사건 속에는 하나님, 사탄, 인간의 행위가 모두 있는 것입니다. 구별하는 방법은 목적과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흔하게 오류를 범합니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한가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역사야! 그리고서는 우리는 방치합니다. 그저 하나님 편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한 사건속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목적에는 관심이 없고 결국은 하나님께 무관심하는 행위입니다. 서론에서 이야기 했듯이 한국교회 성도들이 일부는 이렇게 신앙생활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역사로 칼로 그어 구분 짓고 방임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반대편에서는 오롯이 사탄의 일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사탄의 역사야. 그러니깐 기도해. 그리고서 모든 사건의 이유와 결과를 사탄에게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이 또한 아주 위험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무시하는 생각입니다. 반드시 모든 사건에는 하나님 편에 이유가 있고 사람의 역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모두 사탄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로 구분지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성적으로 신앙생활 한다면서 모든 사건을 인간의 잘잘못으로만 여깁니다. 그래서 중요한 신앙의 영역에서만 하나님과 사탄이 있다고만 알고 실제 삶, 사건에는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건과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어떤 유형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반드시 모든 사건에는 하나님의 목표가 있고, 사탄의 역사도 있고, 사람의 역사도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속에 역사하는 3가지 영적 존재를 생각하고, 말씀속에서 해답을 찾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 바랍니다.



3.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다스림_로마서1:32


하나님은 사람을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신학을 배울 때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을 통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경 말씀 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 사탄 그리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직접 말씀하시거나, 사탄의 역사를 성경에 기록하셔서 말씀하시고, 또한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사람은 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지에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나아오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빛이 사라지면, 어둠과 눈먼 상태가 되며,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사라진다면, 마음이 뒤틀려 악에 빠지고, 난폭한 말이 됩니다. 


사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알면서도 악행을 한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일에대한 말씀인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_로마서1:31’


어거스틴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On Grace and Free Will, xx. 41. 


“ 성경을 부지런히 살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된다. 

즉, 하나님께서 악한 것을 선하게 만드시고, 그렇게 만드신 다음 선한 행동으로 이끄시고, 또한 영생에 이르기까지 이끄시는 바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으며, 

또한 이 세상의 피조물을 보존하는 의지들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실 때에 원하시는 방향으로 그것들을 움직이시며, 그리하여 은혜를 주시거나, 아니면 지극히 은밀하면서도 지극히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벌을 내리거나 하신다는 것이다 ”


여러분의 의지는 강하나요? 하나님 떠난 상태에 있던 우리는 죄가운데 세상가운데 있기 때문에 의지가 약해졌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의 의지또한 병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써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인도 받도록 기도하며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 내 의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동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감동이 없다면 죽기살기로 기도해야합니다. 아니면, 교회를 옮겨서라도 은혜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일이기도 하지만, 종말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지금 선택해야할 나의 의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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