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예배

2016-07-24 주일예배



2016-07-24 주일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2016-07-24 주일예배.hwp


음성 다운로드 http://bit.ly/2amPy0Y


가스펠워십 다운로드 http://bit.ly/2aDv7wk




. 강의 수호자_내 영혼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존 오트버그지음

 

아주 먼 옛날 알프스 산 높은 곳에 아름다운 강이 흐르는 마을이 있었다. 강은 태곳적부터 있었던 바다처럼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샘에서 발원했다. 강물을 수정처럼 맑았다. 백조와 거위가 헤엄치는 강가에서 아이들은 웃음꽃을 피우며 놀았다. 강바닥에 있는 바위와 모래, 무지개송어가 훤히 보였다. 노인은 높은 산봉우리 너머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살았다. 그는 강의 수호자였다. 아주 오래전에 고용된지라 마을 주민들은 그를 본디부터 그곳에 있었던 사람으로 여겼다. 그는 산속의 샘을 찾아다니며 물을 더럽히는 나뭇가지와 낙엽, 잔해를 치웠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해, 마을은 재정 회의를 열어 예산을 심의했다. 노인을 감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도로도 보수해야 하고 세금도 거둬야 하고 복지도 확대하려면 강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즉 눈에 안 띄는 일을 하는 노인에게 돈을 쓰는 것은 당장 그만둬야 할 사치였다.

그래서 마을은 노인을 해임했다. 산속 높은 곳의 샘들은 방치되었다. 나뭇가지와 유해 물질이 샘으로 흘러들었다. 진흙과 점토가 강바닥에 쌓인 채 굳었다. 농장의 폐수 때문에 강의 일부가 수렁으로 변했다. 한동안 마을 주민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얼마 후 강은 이전의 모습을 잃었다. 상쾌한 물의 향기가 사라지자 아이들은 더 이상 강가에서 놀지 않았다. 몇몇은 병이 들었다. 마을 주민들은 한때 마을의 젖줄이었던 아름다운 강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을의 생명은 강에 달려 있었고 강의 생명은 수호자에게 달려 있었다. 시의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급히 예산을 마련해서 노인을 재고용했다. 얼마 후 샘은 깨끗해지고 강은 맑아졌다. 아이들은 다시 강가로 모이고 주민들은 건강을 되찾았다. 백조는 돌아오고 마을에 활기가 돌았다. 마을의 존립은 강의 건강에 달려 있었다. 강은 당신의 영혼이다. 당신은 강의 수호자다.

_내 영혼은 무엇을 갈망하는 가, 존 오트버그 지음, 프롤로그 중에서

 

여러분의 영혼은 무엇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그렇습니다. 유대인들도 그러했습니다. 교회를 조금 오래 다니면 신앙이 좋은 줄 압니다.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똑똑한 것처럼 느껴지면 금방 그 사람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드립니다.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렇게 교만해지며, 반대로 심각하게 낙심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리, 성공, 목적달성, 그런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을 신앙에 그대로 대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다른 사람들 즉,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볼 때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병들어 가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차도 생기고, 핸드폰도 생겨서 매우 편리한 것처럼 보이고 좋은 옷, 좋은 집이 계속 발전이 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더 불평이 많아지고, 건강은 더 나빠집니다. 분노와 악이 더 심해집니다. 다시 말해 쾌락은 많아졌지만, 행복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병들어가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된 문제인지 인식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모님 탓을 하고, 환경 탓을 하고, 나라 탓을 합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본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 유대인이 오해한 복음

 

1. 복음이 왜 필요한가?_요한복음9:1-5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_요한복음9:1-5’

 

복음이 왜 필요할까요? 복음이 여러분에게 왜 필요한가요? 딱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좋은 집, 좋은 차가 생기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금방 한계가 옵니다. 오래가지 않습니다. 산다는 것은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영혼은 인위적인 것들로 살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스스로 영혼을 소성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오로지 하나님을 만날 때 소성케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지요. 그 말씀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붙잡았는데 응답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하지 않고 다른 것을 열심히 하였기 때문에 응답이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오셨는데 그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복음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에 오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일 수도 있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인 지식일 수 있겠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내게 오신 예수님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복음이 필요한 분들이 많이 오시길 소망합니다. 그것은 지금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복음이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모르면 저희 교회는 성장할 수는 있어도 성숙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프트웨어인 프로그램이 잘되어있어도, 하드웨어인 교리나 신학이 잘되어 있어도 그것을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회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학교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곳은 어떤 죄인이 와도 예수님을 만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축복된 공간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철저한 율법, 전통과 조직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것을 어기면 안 되었습니다. 결국, 그것을 지킴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영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지식적으로는 너무 잘 알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습니다. 세상에는 맹인이 많습니다.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유대인들은 그것이 중요했습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그들에게는 중요했습니다. 자신들이 깨끗하다고, 자신들이 대단하다고 한마디 들어야 했습니다. 흠이 있으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렇게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유지하게 만듭니다. 영혼이 죄를 짓지 않는다면 바쁘게 만듭니다. 바쁘면 결국 영혼을 돌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해야 합니다. 행여 그것이 돈이나, 명예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의 옷을 입었다면 더 심각합니다. 죄는 욕구와 욕망에 빠져 살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지금, 오늘 복음이 필요한가요? 저는 매일 매순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말씀,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기도, 그분의 인도하심이 다 필요합니다. 단 한순간도 내 뜻대로 해서 제대로 된 결과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 뜻대로 한 것을 제외하고 내 뜻대로 한 것들은 전부 내 욕구였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했을 때는 항상 평안과 안식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2. 유대인들의 오해_요한복음9:6-10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_요한복음9:6-10’

 

유대인들은 심각하게 오해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같은 오해 속에 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오해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오해입니까? 맹인이 낫는 것보다 저 맹인이 거지였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전에 봤던 사람, 전에 알던 사람이 중요합니다. ‘구걸하던 거지가 아니더냐?’ 그것은 우리의 심각한 오해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의 나라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 하나님의 나라와 단절된 상태의 모습입니다. 실로암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치유를 받아 밝은 눈이 되어 새사람이 된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 부름 받은 우리의 실상입니다. 영혼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변화가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힘입니다. 사랑입니다. 아름다움입니다. 거룩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소망해야 할 꿈입니다. 만일 그 소망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목회자인 제가 그것을 꿈꾸지 않는다면 전 삯군 목사겠지요. 유대인들은 겉모양이 멋지거나 세상에서 성공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이 오해한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 유대인이 오해한 사이에_마가복음7:18-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_마가복음7:18-23’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한 사이에 세상은 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이 더러워졌다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맹인이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이 더럽고, 그들이 사는 집이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더럽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짜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생각, 마음, 삶을 보세요. 정치인들, 경제인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보세요. 죄는 절대 우리 삶을 빛 가운데로 가도록 그냥 두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이 진리 안에서 자유 하도록 두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들은 전부 우리의 욕구에서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곧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모두 영혼이 있습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 마귀에게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고 예배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단절되니 영혼은 세상의 욕구를 갈망합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에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한계가 없는 것이 바로 욕구, 욕망입니다. 그것 때문에 은밀하게 죄를 짓고, 은밀하게 불법을 행하고, 은밀하게 범죄를 합니다. 세상은 항상 타락한 상태입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포로가 된 것이 중요한가요?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유를 모르는 그들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 영혼을 돌보는 방법_이사야55:1-2, 요한복음10:7-16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_이사야55:1-2’

 

누구라도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로 살았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전부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내 영혼을 살리는 것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들으면 됩니다. 먹으면 됩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장면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를 보세요. 그는 돈에 대해 적극적인 열망이 많은 사람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애국심도 버렸습니다.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던 일을 했으니 말입니다. 그는 명예도 정직도 다 필요 없었습니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_누가복음19:8’

 

다윗으로 추정되는 시편 저자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 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_시편96:8-9’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그 영혼이 이제야 제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영혼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다른 것으로 갈망을 채워보지만 하나님이 없이 영혼은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저는 분주하고 바쁠 때 꼭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 일들이 겹치는데 어쩔 때는 미칠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지? 진짜 어떻게 하지?’ 발을 동동 구르게 됩니다. ‘빨리 이 문제가 지나갔으면 좋겠어.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짜증과 분노와 미움으로 그 시간을 보냅니다. 열심히 해결하려고 노력도 합니다. 그래서 지나갑니다. 사실 지나가고 보면 별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요?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살면서 욕망으로 인해 점차 이 땅에 쌓기 시작합니다. 채우기 시작합니다. 비교하고, 자랑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다시 세상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습니다. 사실 우리가 겪는 문제의 대부분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문제도 많습니다. 부부 사이에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 주는 말을 한다거나, 무시한다거나, 의견 대립이 있는 것은 전부 내가 무엇인가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에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성숙한 신앙생활이 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여전히 십자가를 통과하기 전처럼 내 자랑이나 내 의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해되지 않습니다. 맹인이 복음을 받아 변화되었음에도 ?’ 라고 생각합니다. 빛 되신 주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였음에도 죄를 많이 지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한 채 종교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_요한복음10:7-16’

 

진정한 안식과 평안은 포기할 때 옵니다. 항복할 때 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항복하느냐입니다. 참 깨닫기 힘들고 어려운 것은 너무 젊거나 너무 많은 것을 이룬 성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양이란 것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지도자가 된 듯 착각하게 만듭니다. 마치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라도 된 듯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방법으로 주신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살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됩니다. 말씀이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겠구나!’ 항복하시길 바랍니다. 버티지 말고 주님께 항복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영혼을 지키고 살리십시다. 오늘 우리가 그 일을 하여야 합니다. 바쁘고 분주하신가요? 이상하게 정신이 없지는 않습니까? 젊을수록 더 그렇지요? 그런데 가만 보니 무엇 때문에 바쁜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바쁘게 살면 해결이 되는가요? 아니지요. 우리 삶은 점차 다른 것으로 중독되고,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주님 내 영혼을 보게 하옵소서. 내 영혼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나를 살리는 주님의 말씀과 은혜 그리고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너무 좋은 것들로 내 영혼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것에 속아 내 영혼 병들어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살았네요. 남탓, 세상탓 하고 살며, 비교하고, 정죄하고만 살았네요. 이제 내 영혼이 변화되어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렵니다. 내 영혼이 두렵고 떨림으로 매일 주님 앞에 서게 하옵소서.

'주일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6-07-31 주일예배  (0) 2016.07.31
2016-07-31 주일예배(전체영상)  (0) 2016.07.31
2016-07-24 주일예배 (전체영상)  (0) 2016.07.24
2016-07-17 주일예배  (0) 2016.07.17
2016-07-17 주일예배 (전체영상)  (0) 2016.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