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spel Letter. '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지 않는 예배 '
저는 한동안 기도제목이 정말 화려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남들에게 말하기 좋고, 기도할 때마다 멋지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제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 제가 원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저의 욕망, 욕심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우기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목사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여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러시나요?’ 라고 원망이 담긴 기도만 하였습니다.
저의 예배는 항상 그럴듯했습니다. 저의 삶도 항상 그럴듯했습니다. 포장을 너무 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영혼이 심각하게 병이 들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겉모양만 화려한 예루살렘성전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 그들과 결탁하여 장사하는 사람들, 자기들의 꿈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자 다윗의 나라여 하며 찬송하며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모습을 보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은 바로 저였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_마가복음11:17’
그들은 예수님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꿈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드리는 예배, 그것 때문에 하는 기도, 그것 때문에 드리는 헌신입니다. 모양은 신앙생활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 기도, 헌신을 기억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고난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오지 않기를, 고난이 오면 피할 길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화려한 성전의 겉모양,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안심하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네 삶은 여전히 어려움이 많아 고단한데 그것을 가리기 바쁠 뿐입니다. 예배에 나와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찬송하면서 사람들 눈치 보기 급급하지는 않습니까? 마음이 황폐하고, 영혼은 병들어가고 있음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지요. 아니 알면서도 체면 때문에, 지위 때문에 회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_이사야56:5-7’
차라리 고난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명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축복임을 진정 은혜임을, 긍휼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화려한 성전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예배가 무슨 소용인가요? 우리의 꿈이 이루어진 들 그것이 무슨 기쁨이 될까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성공이 무슨 축복이 될까요?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예배를 꿈꿉니다. 남녀노소, 직분, 나이를 뛰어넘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어 하나님이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길 원합니다. 우리의 황폐한 마음이 고침을 받고, 병든 영혼이 살아나 말할 수 없는 구원의 감격이 넘쳐 우리 삶이 살아있는 예배가 되길 소망합니다.
_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갈망하며, 오승주목사